장자 & 노자 : 道에 딴지걸기 지식인마을 6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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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과거의 지평(선입견)을 수정, 보완해야 한다는 가다머의 주장을 주체 중심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는 새롭게 만날 타자에 대해서 근본적인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과거의 성심을 철저하게 폐기해야 한다는 장자의 주장은 타자 중심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연속성은 새롭게 만날 타자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32쪽

장자에 따르면 몸을 가지고 사는 인간은 항상 어떤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는 존재다. 이 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며, 그 문맥과 소통하는 데 근거하는 구성된 마음을 지닐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완성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이나 모두 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때가 낀 거울이나 맑은 거울이나 항상 무언가 비추듯이 말이다. 다만 완성된 사람은 타자와 얽히는 특정한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을 다른 삶의 문맥에 폭력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삶의 문맥에서도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허심(虛心)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33-35쪽

장자가 문제 삼고 제거하려는 것은 성심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작동시키는 성심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 사태'를 문제 삼는다. 장자는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은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부정하려는 것은 '특정한 성심을 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즉 임시적 자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성심은 인간의 유한성에 기인하는 자연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37쪽

이처럼 장자에게는 두 종류의 자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첫째는 그가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 제거하려고 한 것으로서, 과거 의식을 자의식의 기준으로 집착하는 고착된 자의식이다. 둘째는 인간이 사회에서 산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임시적 자의식이다. 임시적 자의식은 구체적인 사태마다 새롭게 구성되는 자의식이다. -40쪽

이렇게 우리 삶은 항상 타자와의 무매개적인 소통을 전제로 영위되고, 오직 이런 무매개적인 소통을 통해서만 변화되어 생성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먼저 삶이 이루어지는 실존적 사태로 소통을 이해해야 한다.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지금 나 자신으로 만들어지고, 앞으로도 전혀 생각지 못한 타자와 만나고 소통함으로써 전혀 생각지 못한 나로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통의 긍정은 공존과 공생의 긍정과 연결되고, 비움으로 상징되는 깨어남은 이런 본래적 존재 양식으로서의 복귀를 의미한다. -43쪽

'알 수 없다'는 경험 또는 실존 상태는 자신만의 판단을 중지하게 만들고,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강제한다. 스스로 판단할 수 없으니, 이제 타자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을 새롭게 조율할 수밖에 없다. 장자는 이것을 인시(因是)'라고 부른다. -57쪽

'저것'과 '이것'이 대립하지 않는 경우를 '도의 지도리(道樞)'라고 부른다. 한번 그 축이 '원의 중앙(環中)'에 서게 되면, 그것은 무한히 소통하게 된다.

'저것(彼)'과 '이것(是)'이 대립하지 않는 것을 기호로 나타내면 '저것=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것'과 '이것'의 관계를 장자의 경우 'A=-A'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 공식은 분명 모순이다. 따라서 'A=-A' 라고 표현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A'라는 것인가, '-A'라는 것인가? 이처럼 장자가 제안하는 '판단중지'의 상태는 기존의 형식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언어와 그에 따라 작동하는 사유의 분멸 작용이 불가능해지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 논리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에게는 이 공간이 인정하기 힘든 불편한 곳이다. 장자는 이런 불편한 '판단중지' 상태에 있을 때만 타자와 소통하는 삶의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59-60쪽

타자와 차이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동일성'을 무너뜨리는 어떤 힘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관조의 대상이나 풍경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삶의 차원에서 사건으로 나에게 닥쳐온다. 내면과 외면이라는 구조 속에서 결코 포착되지 않는 그 무엇이 바로 타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면과 외면이라는 동일성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예측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 타자다. 자신의 아이처럼 귀하게 키운 새끼호랑이가 어느 날 자기 손을 물 수 있다. 그렇게 타자의 타자성은 우리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흔적을 남긴다. -75-76쪽

진정한 의미의 타자와 차이는 자신의 동일성을 파괴하는 그 무엇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타자가 지닌 타자성은 내가 다른 주체로 생성될 수 있게 하는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관조의 풍경이 아닌 타자성을 가진 진정한 의미의 타자는, 어떤 공백이나 의미의 결여로만 나에게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내가 어떤 주체로 생성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77쪽

노자에 따르면 모든 개체는 고립적이고 자족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가득 차서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그릇은 이제 더는 그릇일 수 없다. 어떤 사람도 들어갈 수 없이 가득 차 있는 방은 이제 방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릇은 다른 것을 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비어 있어야 한다. 방은 사람이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비어 있어야 한다. -132쪽

재분배는 통치자가 직접 만들어 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압도적인 폭력을 내세워 남에게서 배앗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되는 재분배의 목적은 단지 안정된 수탈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노자 당시 수탈의 유일한 대상이 농민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국가가 왜 농민을 위해 관개사업이라든지 토지정리 사업같은 대규모 공적 사업을 시행하였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계층이 자본자이기에, 국가에서 가장 보호해야 할 존재도 역시 자본가일 수 밖에 없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폭력에 따른 수탈과 재분배 기능을 수행하지만, 은혜와 선물이라는 겉모습으로 다가와야 한다. 은행에서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처럼 자애롭게 재분배를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은행에서 투자금을 거둬들이는 경우, 채무자 스스로 약속을 이행한다는 겉모양이 유지되어야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177-178쪽

뇌물의 논리와 선물의 논리를 가르는 기준은 사실 대가에 대한 기대 또는 기억 여부에 있다. 내가 타자에게 무엇을 뇌물로 주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준 그것에 대한 대가를 항상 기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뇌물을 받은 타자가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즉 그 사람이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면, 내가 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선물이 되고 만다.
반대로 타자가 내게 무엇을 뇌물로 주었다고 해도 내가 그것이 뇌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내가 이제 상대에게 무엇을 대가로 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면, 상대의 뇌물은 아이너리하게도 나에게는 선물이 된다. -180쪽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거나 받을 때 그것을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뇌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연인 관계는 바로 채권, 채무 관계로 변질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랑하는 사람이 알고 있듯이, 사랑은 채권, 채무 관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오히려 채권, 채무 관계를 잊어야만 다가오는 것이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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