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복거일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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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언어들에서 근본적인 것은
그것들이 어떤 것을 기술하는 데 쓰일 수 있고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어떤 것은, 어찌 되었는지, 이 세상이다.
늘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매체에
- 안경을 닦는 일에 -
관심을 쏟는 것은 철학적 잘못의 결과다.
(칼포퍼)-7쪽

민족주의적 열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적절한 수준에 머물면, 사회의 활력소가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되면, 지나친 이기주의적 행동이 개인에게 해롭듯이, 정치적 짐이 되어 오히려 사회의 생존과 발전을 해친다. 자연히 그것을 현명하게 쓰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을 잘 쓰는 길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시민들의 자아를 넓히는 데 이용하는 것일 터이다. 민족주의는 궁극적으로 확대된 이기주의이므로, 시민들이 일상에서 지닌 '나'라는 개념의 외연을 넓히는 데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 중략 ...
동해의 이름을 조선해로 바꾸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보다는 그렇게 조그맣지만 실속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일본에게 앗긴 것들을 되찾는 길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천년 전 정이 선생이 갈파한대로, "마음에 사무쳐 목숨을 버리기는 쉽지만, 조용히 의로움을 이루기는 어렵다." -45-46쪽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자유를 큰 가치로 여기고 개인들의 자유를 제약하는 사회적 강제를 줄이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공평하게 대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민족주의는 민족적 특질들에 따라 개인들을 차별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그것은 나라를 이루는데 주력이 되는 민족에 속하는 개인들이 소수 민족들에 속하는 개인들보다 더 큰 권리를 갖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민족이 정의하기 어렵고 과학적 근거가 없으며 실제로 민족을 구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민족주의자들에겐 별다른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조화시키는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아니 한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자기 이익 추구를 배척하지 아니 한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리라고 여겨지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도록 허용된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민족국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런 이익의 추구가 다른 민족국가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제약만을 둘 따름이다. 거기에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두 이념들이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65-66쪽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민족구가가 개인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민족국가가 개인들로 이루어졌고 따로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므로, '국익'이란 말은 궁극적으로 민족국가를 이룬 개인들의 이익 집합을 나타내는 '간략한 표현'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국익'은 개인들의 이익들의 함수다. -66쪽

세계가 점점 긴밀하게 통합되고 서양과 우리 사회 사이의 지식의 물매가 여전히 싼 터라, 번역투는 점점 우리 문체의 중심을 차지할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점점 닦여가면서, 그것은 우리 언어 생활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간단한 예로서, '한잔의 술'은 번역투고 '술 한잔'이 우리 말투이므로, 전자를 쓰지 말자는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전자에선 '한잔'에 그리고 후자에선 '술'에 강세가 주어진다. 따라서 그 둘을 다 쓰되 구별하는 것이 우리 말을 기름지게 하는 길이다). 실은 번역투는 우리 언어의 생장점의 한 측면으로 진화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124-125쪽

궁극적으로 영어가 단 하나의 국제어로서 거의 모든 부면들에서 쓰일 것이다. 반면에 민족어들은 점점 활력을 잃고서 차츰 사라질 것이다. 현존하는 3천 개 내지 6천 개 가량의 언어들 가운데 백 년 안에 반이 쇠멸하리라는 추산도 나왔다.
...중략...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런 상태가 민족어들의 완전한 쇠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쉽게 사라지기엔 민족어들은 너무 큰 지적 자산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민족어들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지만 전문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보존되고 계승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선 민족어들은 거의 진화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박물관 언어'들로 남을 것이다. -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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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3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27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육학개론 (한용진 외)
한용진 외 지음 / 학지사 / 2006년 9월
절판


교육학개론은 교육학이라는 학문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목이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교육학개론>의 목차를 보면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교육학의 하위 학문 영역을 순서대로 나열하여 각각에 대하여 개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학이라는 학문이 고민하는 주제들을 나열하고 이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는 방식이다. 전자를 기본형이라 한다면, 후자는 주제형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의 교육학개론은 각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즉 교육학이라는 과목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본형 방식이 보다 이해하기 쉬운 면이 있으며,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과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제형 방식이 더 매력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본 교재는 위의 기본형과 주제형을 적절히 혼합하여, 두 가지 방식의 장점을 취한 종합형 교재로 편찬하였다.
(머리말 중)-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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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 1학년때 교육학개론 처음 배웠는데,정말 재미없어서 수업 시간에 딴 생각하고 친구들하고 장난치고 했었어요.
이렇게 따로 책을 읽으시는것 보니 저와는 많이 다르시네요.

마늘빵 2006-12-14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녀요. 저도 딴 짓 합니다. 별로 재미없는 학문이에요. 마지 못해 하고 있어요. -_-
 
대한민국 50대의 힘
탁석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2월
품절


학연이 희미해져가면서 한국 사회는 두 가지 현상을 낳고 있다. 하나는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주의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의 사슬 중 하나가 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학연은 거대한 집단주의의 온상이었다. 학교라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구심점이 있으며 사춘기를 동일한 공간에서 보냈다는 동류의식은 학연 집단주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몇 회 졸업생인지를 묻고 대답이 돌아오는 즉시 서열이 세워지고 집단이 형성되는 분위기는 어렵게 되었다.
학연이 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이 주체가 되기 시작했다. 50대에게 이것은 매우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 전개였다. 나는 선배를 깍듯이 모셨는데 왜 이제 와서 후배는 없고 나만 홀로 오롯이 남아있는가. 하소연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50대는 힘들지만 적응해왔다. -30-31쪽

권위주의가 지배한 집단문화에서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이 시대에 50대는 양쪽을 다 경험한 세대로서 할 일이 있고 또 할 수 있다. 경험이 스승이라는 말이 있다. 경험을 전혀 해보지 않은 것을 새롭게 구성하거나 실천하기는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50대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공동체 문화를 경험했지만 이기적 개인주의에 의해 기존의 집단주의 문화가 갖는 단점을 깨달을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기적 개인주의를 보면서 공동체 문화가 갖는 미덕을 새삼스레 다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집단주의의 단점은 개인주의를 통해 되돌아보게 되었고, 이기적 개인주의의 단점은 공동체 문화 체험을 통해 되짚어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개인주의 문화에서 자라난 20-30대가 갖기 어려운 유리한 입장이고, 개인주의 문화를 탐탁찮게 여긴 나머지 자성이 부족한 부모 세대에 비하면 공동체 의식을 실천하고 확신시키는 데 훨씬 좋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174쪽

인간은 과연 평등한가? 그리고 평등을 추구할까? 인간은 경쟁하려 하며 경쟁을 통해 사회는 발전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경쟁의 승자가 좌파적 생활을 함으로써 승리의 과실이 자신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 모두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211쪽

자크 아탈리는 <인간적인 길>에서 가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난함이란 지금까지는 '갖지'못한 것이었으나, 가까운 장래에는 '소속되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미래에는 첫째가는 자산이 네트워크의 소속이 될 것이다. 이것은 '주도적으로 성취해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선적 조건이 될 것이다."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한다. 이것은 앞으로의 삶이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의 삶에 이미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실업자는 수입이 끊어졌다는 것보다도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것에 절망한다. 노인이 외로운 것은 아무 곳에도 갈 곳이 없으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심지어 자식에게도 소속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혈연, 지연, 학연에 의해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부작용도 많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됨으로써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앞서 여러번 말했듯이 이런 네트워크는 붕괴되고 있다. 기존의 네트워크는 붕괴되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네트워크는 아직 형성되지 못한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불안의 주원인이다. ... 중략...
자크 아탈리는 "가족 친구 국가, 모든 형태의 네트워크에 대한 소속은 '인간관계성 자산'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금 가진 것이 없다고 혹은 지위가 없다고 좌절하거나 씁쓸해할 것은 없다. 50대는 이 인간관계성 자산이 가장 풍요로운 세대이기도 하다. 자신이 어떤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으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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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15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크 아탈리는 "가족 친구 국가, 모든 형태의 네트워크에 대한 소속은 '인간관계성 자산'이다"라고 말한다."라는 구절을 보면서 인간관계성이야 말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알았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이 책의 리뷰도 기다려지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비로그인 2006-12-1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민학교이후 세상은 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지요.
한국의 50대는 6.25의 페허속에서 태어나 현재의 '풍요'까지
끊임없이 에스컬레이트를 했습니다.
I can Do it을 해온 세대입니다.
근대 합리적 교육의 1세대이니 합리적 사고가 가장 큰 특징이지요.
"..사회 모두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50대에게 사치스러움, 자기과시= 저열함, 자신없음의 증표이지요.
부작용이 있든 없든 시험이라는 비교적 공정한 룰을 통과한 세대이므로
실력있는 사람을 내심 인정합니다. 편법으로 출세한 자는 끝까지 경멸하지요.
비교적 공정한 시각도 지니고 있습니다. 하하

 
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구판절판


내가 국어의 혼탁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불순함의 옹호자이기 때문이다. 불순함을 옹호한다는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의 단색 취향, 유니폼 취향을 혐오한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른 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쉰다. 나는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순수한 토박이말과 토박이 문체로 이루어진 한국어 속에서라면 나는 질식할 것 같다.
언어 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 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 -25쪽

그렇다면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를 한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무심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충이 <잣나무가>를 부르며 사용한 언어도 한국어라고 부르고, 황지우가 <뜰 앞의 잣나무>를 쓰며 사용한 언어도 한국어라고 부른다. 그 두 언어를 한 언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 사이에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 언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뭘까? 그것은 대답하기 힘든 물음이다. 그 대답하기 힘든 물음에 '혈연적 동일성'이라는 손쉬운 대답이 제출된 시기는 19세기다. 19세기 유럽의 언어학자들은 세상의 무수한 언어들을 '혈연관계'에 따라 분류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들은 '핏줄'이 통한다고 생각되는 언어들을 묶어 '가족(어족)'을 만들어, 그 가족의 '조상(조어)'을 찾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58쪽

지리언어학의 관점에 서면, 방언과 독립적인 언어를 구별하는 가장 커다란 기준은 의사소통 가능성이다. 즉 두 화자가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은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리 언어학의 이 공간차원을 시간차원으로 곧추세울 수도 있다. 즉 '진화상태'의 어떤 언어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든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든, 서로 다른 시점의 이 언어 화자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리라고 추정된)다면, 그 언어는 별개의 언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는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언어라고 할 만하다.
...중략...
우리가 이런 관점에 서면, 의사소통 가능성의 경계에 따라서 시간축 위의 한국어는 수많은 한국어들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가 아니라 무수한 한국어들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 문학이 아니라 무수한 한국어 문학들이다. -69-70쪽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국어 순화'의 '순화'는 제 5공화국 초기 삼청 교육대의 저 악명 높은 '순화 교육'의 '순화'다. 실상, 순결을 향한 집착, 즉 순화 충동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믿음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 이념의 순결성에 대한 집착이 역사의 구비구비에 쌓아놓은 시체더미들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국어 순화'의 충동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121쪽

여기서 꼭 강조돼야 하는 것은 영어공용어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다. 공용어로서의 영어를 반대한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특정집단이 독점하는 걸 허락했다는 뜻이다. 라틴어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의 엘리트들이 지식을 독점했듯이 말이다. 지식과 정보는 곧 권력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 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문제를 떠나서, 한 사회가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을 특정 계급이 독점하는 사회와 전 구성원이 공유하는 사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180쪽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어가 '박물관 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 ... 중략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 모두가 중국인이고 한국인이듯, 먼 미래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이미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가 지금도 10대때부터 배우고 있는 영어에 그리스 이래의 유럽 문화가 담겼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그리스 이래의 (또는 이집트 이래의) 유럽 문화는 지금 우리 제도, 우리 일상 생활, 우리 사상의 본질적 부분이 되어 있다. 그것이 '외래 문명'이라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 '외래 문명'의 힘에 많은 부분이 밀려난 우리의 '재래 문명' - 한문 문명 - 역시 우리가 조금 일찍 받아들인 외래 문명일 뿐이다. 말을 바꾸어, 유럽에서 온 그 '외래 문명'은 우리가 조금 늦게 받아들인 재래 문명일 뿐이다.

-181-182쪽

한글이 한자와 싸워온 과정은 그대로 민주주의가 봉건주의와 싸워온 과정이다. 우리는 한글이 우리 글이어서 써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이 민주주의적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자를 배우지 않을 수는 없다. 지난 2천년 동안 한자를 매개로 해서 무수한 중국어 단어, 일본어 단어들이 한국어에 차용됐고, 그렇게 차용된 한자어들은 당연히 한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에 수입된 한자는 중국어나 일본어에서와는 다른 독자적인 한국 음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차용된 한자어들은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한국어이다. -216쪽

원음주의를 근본주의적으로 밀고 나가려는 사람들은 세 가지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소리의 물리적 특성만을 생각할 뿐 그 소리들이 한 언어에서 조직되는 음운체계를 간과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언어 규범에 대한 최종 심판관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위에서도 이야기한 관습의 문제다. 셋째, 그들은 외국어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237쪽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를 묻고 슬픔을 느낄 때,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를 위한 슬픔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을 위한 슬픔이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를 묻을 때, 우리들의 일부를 거기에 묻는다. 우리가 그들과 공유한 과거를 묻는다. 그들의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그들과 공유했을 미래의 가능성을 묻는다. 가까운 사람의 장례 뒤에 우리가 느끼는 슬픔은 바로 그 사라져버린 우리 자신의 일부가 유발하는 슬픔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이를 위해 마련한 사랑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해 마련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버렸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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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06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너무 좋으신 책만 읽으신다. 좋으시겠어요. 기말 고사 잘 보셨는지요. 행복한 하루 되시기를........

마늘빵 2006-12-06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 기말고사는 다음주에요. 이건 2년전에 읽었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또 다르게 다가오네요.

비로그인 2006-12-0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살아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몇 세대가 더 지나면 한자는 전문영역의 학자들의 언어가 될것이라 예측해봅니다.
라틴어가 그런 경로를 걸었지요..

 
안락사를 합법화해야 할까? 민음 바칼로레아 34
미셸 오트쿠베르튀르 지음, 김성희 옮김, 김현철 감수 / 민음인 / 2006년 7월
구판절판


치료중단행위에 관한 지침
우리나라에서는 대한 의사 협회가 2001년에 제정하여 2006년 4월 22일 전면 개정한 의사 윤리 지침에 회복 불능 환자의 진료 중단에 관한 내용이 제 16조, 제 17조, 제 18조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사는 죽음을 앞둔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제16조 2항) "의사는 의료행위가 의학적으로 무익, 무용하다고 판단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하여 환자 또는 그 보호자가 적극적이고 확실한 의사표시에 의하여 의학적, 사회통념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법령이 정하는 절차와 방법에 따라 그 의료 행위를 보류, 철회, 중단할 수 있다. (제18조) -23쪽

의사는 인간의 신체를 고치는 데에는 유능하지만, 그 신체가 정신의 또 다른 일면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체는 고쳐졌어도 정신은 계속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래서 의학은 병든 장기를 치료하는 동안은 그 장기가 한 인간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아예 잊는 쪽을 택한다. 치료하고 있는 대상이 다름 아니라 병든 한 인간이라는 사실, 곧 육체와 정신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뒤로 한 채 오로지 장기에만 몰두하는 것이다.-25쪽

환자 가족이 안락사를 요청할 때가 있는데, 소중한 사람의 고통을 보는 게 힘들고 보살피는데 지쳤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가족의 요청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요청하는 사람이 정말 충분히 생각해서 진정으로 죽음을 원해서 이성적으로 부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고통이 이성을 잃게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죽음을 선택할 만한 여유가 정말 있을까? 정말 자기의 진정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일까? -46쪽

사상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존엄성에 대한 그러한 정의를 거부하고, 존엄성이란 개체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주관적인 감정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존엄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노화와 질병을 '존엄성 상실' 상태로 간주하는 것은, 늙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가치 판단으로 곧 이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존엄성은 안락사 합법화를 얻어 내기 위한 인질에 지나지 않는다. 존엄성을 이유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존엄성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있게도 하고 없게도 한단 말인가? -57쪽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사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고통을 덜기 위해 다량의 진통제가 필요할 때 그렇게 처방하는 것과,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과도한 양의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을 질적으로 매우 다른 행위다. 보통 의사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양심 조항에 해당되는 사안으로 의사와 환자의 관계라는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의사는 자신의 의도와 기본적인 규칙에 의해 움직이고, 자신의 가치 체계가 근거하고 있는 원칙에 따라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선택할 것이다.
여기서 어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안락사 문제가 법학이 아니라 윤리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법학은 사회의 폐단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데 목적을 둔 학문이고, 윤리학은 의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학문이다.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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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04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닥타로서 무망한 고통에 견디질 못하는 환자분들을 보면
정말 괴로웠지요...


짱꿀라 2006-12-05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안락사는 찬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말로 아픔을 참지 못하는 환자를 볼때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