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복거일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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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언어들에서 근본적인 것은
그것들이 어떤 것을 기술하는 데 쓰일 수 있고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어떤 것은, 어찌 되었는지, 이 세상이다.
늘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매체에
- 안경을 닦는 일에 -
관심을 쏟는 것은 철학적 잘못의 결과다.
(칼포퍼)-7쪽

민족주의적 열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적절한 수준에 머물면, 사회의 활력소가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되면, 지나친 이기주의적 행동이 개인에게 해롭듯이, 정치적 짐이 되어 오히려 사회의 생존과 발전을 해친다. 자연히 그것을 현명하게 쓰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을 잘 쓰는 길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시민들의 자아를 넓히는 데 이용하는 것일 터이다. 민족주의는 궁극적으로 확대된 이기주의이므로, 시민들이 일상에서 지닌 '나'라는 개념의 외연을 넓히는 데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 중략 ...
동해의 이름을 조선해로 바꾸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보다는 그렇게 조그맣지만 실속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일본에게 앗긴 것들을 되찾는 길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천년 전 정이 선생이 갈파한대로, "마음에 사무쳐 목숨을 버리기는 쉽지만, 조용히 의로움을 이루기는 어렵다." -45-46쪽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자유를 큰 가치로 여기고 개인들의 자유를 제약하는 사회적 강제를 줄이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공평하게 대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민족주의는 민족적 특질들에 따라 개인들을 차별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그것은 나라를 이루는데 주력이 되는 민족에 속하는 개인들이 소수 민족들에 속하는 개인들보다 더 큰 권리를 갖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민족이 정의하기 어렵고 과학적 근거가 없으며 실제로 민족을 구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민족주의자들에겐 별다른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조화시키는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아니 한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자기 이익 추구를 배척하지 아니 한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리라고 여겨지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도록 허용된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민족국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런 이익의 추구가 다른 민족국가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제약만을 둘 따름이다. 거기에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두 이념들이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65-66쪽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민족구가가 개인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민족국가가 개인들로 이루어졌고 따로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므로, '국익'이란 말은 궁극적으로 민족국가를 이룬 개인들의 이익 집합을 나타내는 '간략한 표현'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국익'은 개인들의 이익들의 함수다. -66쪽

세계가 점점 긴밀하게 통합되고 서양과 우리 사회 사이의 지식의 물매가 여전히 싼 터라, 번역투는 점점 우리 문체의 중심을 차지할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점점 닦여가면서, 그것은 우리 언어 생활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간단한 예로서, '한잔의 술'은 번역투고 '술 한잔'이 우리 말투이므로, 전자를 쓰지 말자는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전자에선 '한잔'에 그리고 후자에선 '술'에 강세가 주어진다. 따라서 그 둘을 다 쓰되 구별하는 것이 우리 말을 기름지게 하는 길이다). 실은 번역투는 우리 언어의 생장점의 한 측면으로 진화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124-125쪽

궁극적으로 영어가 단 하나의 국제어로서 거의 모든 부면들에서 쓰일 것이다. 반면에 민족어들은 점점 활력을 잃고서 차츰 사라질 것이다. 현존하는 3천 개 내지 6천 개 가량의 언어들 가운데 백 년 안에 반이 쇠멸하리라는 추산도 나왔다.
...중략...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런 상태가 민족어들의 완전한 쇠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쉽게 사라지기엔 민족어들은 너무 큰 지적 자산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민족어들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지만 전문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보존되고 계승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선 민족어들은 거의 진화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박물관 언어'들로 남을 것이다. -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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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3 0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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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7 19: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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