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구판절판


내가 국어의 혼탁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불순함의 옹호자이기 때문이다. 불순함을 옹호한다는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의 단색 취향, 유니폼 취향을 혐오한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른 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쉰다. 나는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순수한 토박이말과 토박이 문체로 이루어진 한국어 속에서라면 나는 질식할 것 같다.
언어 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 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 -25쪽

그렇다면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를 한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무심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충이 <잣나무가>를 부르며 사용한 언어도 한국어라고 부르고, 황지우가 <뜰 앞의 잣나무>를 쓰며 사용한 언어도 한국어라고 부른다. 그 두 언어를 한 언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 사이에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 언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뭘까? 그것은 대답하기 힘든 물음이다. 그 대답하기 힘든 물음에 '혈연적 동일성'이라는 손쉬운 대답이 제출된 시기는 19세기다. 19세기 유럽의 언어학자들은 세상의 무수한 언어들을 '혈연관계'에 따라 분류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들은 '핏줄'이 통한다고 생각되는 언어들을 묶어 '가족(어족)'을 만들어, 그 가족의 '조상(조어)'을 찾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58쪽

지리언어학의 관점에 서면, 방언과 독립적인 언어를 구별하는 가장 커다란 기준은 의사소통 가능성이다. 즉 두 화자가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은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리 언어학의 이 공간차원을 시간차원으로 곧추세울 수도 있다. 즉 '진화상태'의 어떤 언어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든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든, 서로 다른 시점의 이 언어 화자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리라고 추정된)다면, 그 언어는 별개의 언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는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언어라고 할 만하다.
...중략...
우리가 이런 관점에 서면, 의사소통 가능성의 경계에 따라서 시간축 위의 한국어는 수많은 한국어들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가 아니라 무수한 한국어들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 문학이 아니라 무수한 한국어 문학들이다. -69-70쪽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국어 순화'의 '순화'는 제 5공화국 초기 삼청 교육대의 저 악명 높은 '순화 교육'의 '순화'다. 실상, 순결을 향한 집착, 즉 순화 충동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믿음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 이념의 순결성에 대한 집착이 역사의 구비구비에 쌓아놓은 시체더미들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국어 순화'의 충동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121쪽

여기서 꼭 강조돼야 하는 것은 영어공용어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다. 공용어로서의 영어를 반대한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특정집단이 독점하는 걸 허락했다는 뜻이다. 라틴어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의 엘리트들이 지식을 독점했듯이 말이다. 지식과 정보는 곧 권력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 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문제를 떠나서, 한 사회가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을 특정 계급이 독점하는 사회와 전 구성원이 공유하는 사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180쪽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어가 '박물관 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 ... 중략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 모두가 중국인이고 한국인이듯, 먼 미래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이미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가 지금도 10대때부터 배우고 있는 영어에 그리스 이래의 유럽 문화가 담겼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그리스 이래의 (또는 이집트 이래의) 유럽 문화는 지금 우리 제도, 우리 일상 생활, 우리 사상의 본질적 부분이 되어 있다. 그것이 '외래 문명'이라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 '외래 문명'의 힘에 많은 부분이 밀려난 우리의 '재래 문명' - 한문 문명 - 역시 우리가 조금 일찍 받아들인 외래 문명일 뿐이다. 말을 바꾸어, 유럽에서 온 그 '외래 문명'은 우리가 조금 늦게 받아들인 재래 문명일 뿐이다.

-181-182쪽

한글이 한자와 싸워온 과정은 그대로 민주주의가 봉건주의와 싸워온 과정이다. 우리는 한글이 우리 글이어서 써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이 민주주의적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자를 배우지 않을 수는 없다. 지난 2천년 동안 한자를 매개로 해서 무수한 중국어 단어, 일본어 단어들이 한국어에 차용됐고, 그렇게 차용된 한자어들은 당연히 한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에 수입된 한자는 중국어나 일본어에서와는 다른 독자적인 한국 음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차용된 한자어들은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한국어이다. -216쪽

원음주의를 근본주의적으로 밀고 나가려는 사람들은 세 가지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소리의 물리적 특성만을 생각할 뿐 그 소리들이 한 언어에서 조직되는 음운체계를 간과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언어 규범에 대한 최종 심판관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위에서도 이야기한 관습의 문제다. 셋째, 그들은 외국어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237쪽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를 묻고 슬픔을 느낄 때,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를 위한 슬픔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을 위한 슬픔이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를 묻을 때, 우리들의 일부를 거기에 묻는다. 우리가 그들과 공유한 과거를 묻는다. 그들의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그들과 공유했을 미래의 가능성을 묻는다. 가까운 사람의 장례 뒤에 우리가 느끼는 슬픔은 바로 그 사라져버린 우리 자신의 일부가 유발하는 슬픔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이를 위해 마련한 사랑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해 마련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버렸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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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06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너무 좋으신 책만 읽으신다. 좋으시겠어요. 기말 고사 잘 보셨는지요. 행복한 하루 되시기를........

마늘빵 2006-12-06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 기말고사는 다음주에요. 이건 2년전에 읽었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또 다르게 다가오네요.

비로그인 2006-12-0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살아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몇 세대가 더 지나면 한자는 전문영역의 학자들의 언어가 될것이라 예측해봅니다.
라틴어가 그런 경로를 걸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