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나의 고전 읽기 3
김성은 지음, 장 자크 루소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6월
품절


루소에게 독서는 훗날 자기 머리로 생각하기 위한 철저한 훈련이었다. 그는 자기 입맛에 맞는 책 몇 권만 읽고 세상을 모두 아는 양 잘난 척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우선 자신의 입장을 하얗게 비워두고 저자가 전해 주는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 그렇게 수많은 저자들의 얘기를 편견 없이 모두 섭렵한 다음에야 그것들을 비교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만들었다. -42쪽

홉스가 보기에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이 따로 있지 않았다. 선하고 악한 것, 옳고 그른 것은 상대적이며, 국가와 법이 성립되었을 때 비로소 판정 기준이 생긴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하여 이리나 늑대와 다름없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처럼 살아남기도 벅찬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권리를 양도하여 복종한다. -77쪽

가족은 정치사회의 최초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배자는 아버지에 해당되고 국민은 자식들에 해당된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난만큼 그들이 자유를 양도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가족과 국가에 차이가 있다면, 가족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것이 자녀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지만, 국가에서는 지배자가 국민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지배의 즐거움 때문에 국민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사회계약론 1부 2장) -101쪽

사회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오로지 욕망의 충동을 따르는 것은 노예적 굴종이지만 스스로 만든 법을 따르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 1부 8장) -113쪽

사회계약이 유명무실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라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단체에 의해 일반의지를 따르도록 강요되어야 한다는 약속이 사회계약 내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다. (사회계약론 1부 7장) (밑줄그은이 주 :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 -141쪽

영국 국민은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대의원을 선출할 때뿐이며 일단 선출이 끝나면 그들은 노예가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회계약론 3부 15장)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투표일에만 자유롭다. 딱 하루 국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면 나머지 날들은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든 나 몰라라 살아간다. 그나마 투표일마저도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그것을 자랑이라고 떠든다.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데." 그러나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시를 게을리 하는 국민은 잘못된 정치에 침묵으로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빌헬름 라이히라는 학자는 저서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가장 심하게 정치를 타락시키는 것은 스스로 비정치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소극적이고 사회에 무관심한 태도다"라고 경고했다. 루소가 일찍이 간파한 대로, 사회에 속한 이상 그 누구도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170-171쪽

본질적으로 전원 일치의 동의를 요구하는 법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계약이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협동은 가장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나 스스로 다스리고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어떤 구실로도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예속시킬 수 없다. 노예의 아들이라고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로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사회계약론 4부 2장) -202쪽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얘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루소의 후예로서 칸트가 깨달은 것은 모든 인간은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을 넘어서서 인류의 입장에 설 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210쪽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일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하는 고대 로마의 명언)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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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1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하면 다섯명?의 자식을 고아원에 버린 것이 생각나요..

마늘빵 2007-06-1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네 정확하십니다. 9살 연하의 여관하녀와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다 내다버렸죠. 그거 때문에 쉬이 비판받죠. 근데 당시엔 그런게 또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여건이 안되는데 아이를 낳으면 고아원에 버리는게.
 
인간 생명의 시작은 어디인가 -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생명 윤리, 윤리 이야기 지식전람회 6
최경석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1월
절판


인간 개체복제는 체세포복제배아를 착상시켜 약 10개월 간의 임신기간을 거쳐 출산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두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 개체복제를 '인간 복제'라 부르는데, 어떤 이는 인간 배아복제 역시 '인간복제'라 부르기도 하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동하지 않도록 '인간 복제'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32쪽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항상 법으로 규정하는 것의 영역보다 크다. 예를 들어,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옳고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명시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법이나 관습 안에서 용인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며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법이나 관습으로 규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법률로서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관습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도 생명 윤리에 관한 법률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허용하지는 않고 있는지 검토해 보고, 그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그 개정을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6쪽

수정논증의 지지자들은 잠재성을 '될 잠재성'과 '산출할 잠재성'으로 나눈다. 정자나 난자는 배아와는 다른 지위를 지니는데, 정자나 난자가 지닌 잠재성은 '산출할 잠재성'인데 비해, 배아가 지닌 잠재성은 '될 잠재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0쪽

만약 이에 대해 인간 개체로 발전할 잠재성의 소유자는 반드시 수적 동일성을 유지한 단일 존재자여야 한다고 답한다면, 이런 생각은 도덕 공동체의 일원은 개별적 개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도덕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존재자의 범주는 최근 확대되고 있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개별적 인간이 아닌 집단이나 법인, 동물, 자연 등도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착상 후의 배아부터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소 편협하다고 말할 수 있다. -85-86쪽

샌들은 배아를 사람과 사물 사이에 위치한 존재자로 간주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하고자 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나 돼지의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소나 돼지를 인간의 양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배아의 생명도 존중되어야 하나 사람의 생명은 아니기에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을 수 있다. -105쪽

그렇다면 착상 전의 배아를 단순한 세포덩어리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배아는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유전적 정보에 따라 자신의 발달 과정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배아가 성숙한 인간 존재자로 발달하기 위한 생물학적 프로그램을 자신 내부에 지니고 있다는 점은 배아를 정자나 난자와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106쪽

또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자나 난자가 23개의 염색체를 지닌 것과 달리 배아는 인간 개체와 동일한 46개 염색체를 지닌 생물체라는 점이다. 배아는 이후 여러 인간 개체로 분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들 개체와 동일한 유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특성은 이후 발달단계에서 연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107쪽

'도덕적 지위'라는 것은 상당히 포괄적인 개념이다. 도덕적 지위는 어떤 존재자가 지닌 도덕적 권리와 책임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 지위는 생명권이나 자율권의 소유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자율권의 소유 여부는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라고 해서 누구나 동등한 자율권을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만한 판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율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어린 아이의 행위에 있어서 도덕적 책임과 성인의 행위에 있어서 도덕적 책임은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그 둘의 도덕적 지위가 동등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판단능력을 상실한 환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자율권 행사는 능력에 따라 도덕적 지위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능력에 따라 어떤 존재자의 도덕적 지위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권과 관련된 도덕적 지위에 대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명권에 대해서는 동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3-114쪽

최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요구할 수 없는 동물도 생명권을 지닌다는 주장은 감각 능력을 지닌 존재자에 대한 도덕적 배려를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더 나아가 식물도 그리고 자연도 존중되어야 할 가치를 지닌다는 견해는 생명 일반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권리의 주체가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느냐, 감각능력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달리 말해 도덕적으로 존중해야 할 대상자의 범주가 반드시 자기동일성의 확립이나 감각 능력의 소유여부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34쪽

도덕적 논란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인간 배아연구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낙태에 대한 문제, 안락사에 대한 문제 등,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도덕적 문제에 대해 일치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의견의 불일치는 어느 한편이 잘못된 논증을 사용하거나, 선입견이나 오해가 개입되었거나, 정확하지 않은 논거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불일치는 이런 문제점이 없는데도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이다. 즉 서로가 논리적 잘못이나 선입견이나 오해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사실이 아닌 논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이다. 이런 종류의 의견 불일치를 철학자 존 롤즈는 이성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로서 '이성적 불일치'라고 불렀다. -136쪽

위 사례는 기술적인 의미의 도덕 상대주의와 규범적 의미의 도덕 상대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덕 상대주의를 단지 사회와 문화에 따라 예절이나 규범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는 정도라면 그것은 현재의 사실을 기술하는 기술적 상대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그렇다는 기술에서 그치지 않고, 도덕이란 것이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른 것이 하나의 규범이론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규범적 상대주의라고 해야 한다. -145쪽

롤즈에 따르면 이성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은 구별되는데, 이들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주의 깊게 선택된 목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하거나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 지적 덕목이지만, 이성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성적인 목적이나 관점에 대한 동등한 또는 공정한 고려를 요구하는 윤리적 덕목이다.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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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0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라 할 것인가?"
논란이 구구합니다. 시점에 대한 시시비비는 별로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때때로 '철학함'에 거시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일 때가 있는 듯 합니다.
이를 테면 상기 문제와 같은 논란 시에..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5
박병상 지음 / 책세상 / 2002년 2월
구판절판


일본 소화전공에서 생산한 '트립토판' 이라는 유전자 조작 건강식품으로 1989년 38명이 사망했고 약 6천 명이 근육통과 호흡 곤란 증세를 보였지만 아직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1998년 유럽 시민들에게 GMOs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준 스코틀랜드 로위트 연구소의 아파드 푸스타이 박사는 유전자 조작 감자로 동물(쥐)의 장기가 위축되고 면역 기관이 비대해지는 괴현상을 고발하기도 했다(참고로, 쥐의 장기와 생리는 사람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조작된 유전자가 삽입된 농산물에서 빠져나와 잡초에 전이된 사례도 밝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유럽의 시민 단체들은 GMOs에 괴물이나 먹는 음식이라는 뜻으로 '프랑켄푸드'라는 별명을 붙였다. GMOs를 먹으면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이 된다는 경고인 것이다. -52-53쪽

백성들이 빵을 달라고 하자 고개를 갸웃하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 하고 의아해하던 프랑스의 왕비 마라ㅣ 앙투아네트는 분노한 시민들 손에 붙잡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세계 육류의 절반 정도의 고기를 먹어대는 미국이 배를 곯으면서도 계속 인구를 증가시키는 제 3세계를 답답해하며, 아이를 그만 낳든지 없는 밀가루 대신 고기를 먹으라고 충고한다면 제 3세계 국민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유전자 조작이 인구 증가와 기아에 허덕이는 제 3세계를 위한 대안이라 선전하는 미국계 초국적 자본이 우리를 언짢게 하는 장본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먹을 식량 증산보다 소나 돼지가 먹을 사료의 대량 생산을 연구한다. 그래서 배고픈 자는 여전히 배고프고, 배부른 자만이 연하고 기름진 고기를 골라 먹을 수 있을 따름이다. -59-60쪽

미주 8)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과 같은 용어는 다윈이 사용하지 않았다. 이 용어는 다윈의 추종자인 스펜서가 최초로 사용했고 골상학(머리의 크기와 생김새를 기준으로 상대적 우열을 평가하는 우생학)을 신봉했던 헉슬리가 널리 퍼뜨렸다. 하지만 제국주의가 성행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할 때 다윈이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를 설명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환경에 가장 잘 적응된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낳아 자신의 유전자를 더 퍼뜨리게 된다는 자연 선택의 개념은 제국주의적 견해를 지닌 후학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개념으로 이어졌지만 최근의 생물종 진화 이론은 자연 선택보다 우연을 강조한다. 스테펜 제이 굴드의 <판다의 엄지>(세종서적, 1998)가 참조할 만하다. -172쪽

미주 76)

1975년,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O. 윌슨이 <사회생물학 : 새로운 종합>(민음사, 1992)을 출간하면서 촉발된 '유전자 결정론'은 인간을 포함하여 사회나 문화 역시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단든 이론에서 출발한다. 영국의 리처드 도킨스는 몸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내세우며 에드워드 O. 윌슨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지만 하버드 대학교의 같은 학과 교수인 스테펜 제이 굴드와 리처드 르윈틴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는 사회까지 과학의 영역에 맡기라고 주장하는 사회생물학의 주장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회생물학에 대한 윤리적 검토를 시도했고, 프란츠 부케티츠는 사회생물학을 변호하며 유전자의 문화와 조화를 조심스레 타진한다. 번역 출간된 서적을 중심으로, 사회생물학을 동조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책은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1993)을 참조하고, 반론으로 스티븐 로우즈, R.C.르윈틴, 레온 카민이 함께 쓴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 생물학, 이념, 인간의 본성>(한울, 1993)과 리처드 르윈틴의 (궁리, 2001),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드의 <판다의 엄지>(세종서적, 1998)를 참조하라. 타협을 모색한 경우는 프란츠 부케티츠의 <사회생물학 논쟁>(사이언스북스, 1999)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1996년 매트 리들리는 <이타적 유전자>(사이언스북스, 2001)를 발간하여 사회성에 얽힌 유전자의 발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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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0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굴드는 도킨스의 논리에 부러(?) 반대하는 기미를 보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좀 '튀어보려' 한다는 그런 느낌이지요..
막다른 골목에 학설이 도달하면 돌파구를 찾곤 합니다.
굴드가 그렇습니다. 다소 아전인수, 자가발전의 양상을 보입니다.
굴드는 도킨스를 의식합니다.
굴드에게서 자격지심과 얼마간 억지부림을 감지하곤 합니다.
그런 뉘앙스를 제외하더라도 저는 굴드의 학설에 공감하지 않습니다.
'판다의 엄지'는 좋은 책입니다.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비로그인 2007-06-0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르원틴은 좀더 소설적인 문체를 구사하므로 책이 읽히지 않더군요.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이기적 유전자에 일대일 대응하는)는 한권 소장하고 있습니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발치에 못미치는 책입니다.
일종의 인간적 윤리에 부합되는 인간적 희망사항을 열거하고 있지요.
이기적 유전자보다는 못하지만 재미있는 책입니다.


마늘빵 2007-06-06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굴드는 저는 아직까진 간접적으로만 접했는데, 글쎄 전 굴드에게 좀 끌렸더랬습니다. 두 사람 모두 진화생물학 진영에 함께 있지만 차이는 분명 있죠. 그것이 억지스러움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직 판단중지입니다. :)

르윈틴은 아직 모르겠어요. 저는 일단 도킨스의 책을 본 뒤에 도킨스에 대해서는 그다지 동의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다른 도킨스의 비판자들을 시간을 두고 봐야겠습니다. 한사님은 근데 언제 또 이렇게 다 보셨어요. ㅎㅎ
 
개를 위한 변명 - '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남유철 지음 / (주)유미디어(유미디어드림) / 2005년 4월
품절


미국의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철학',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당면 문제에서 출발하는 철학을 제안한 바 있다. 과거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철학 논리에서 시작하여 시대의 구체적인 쟁점에 다가가겠다는 상아탑의 철학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철학이라고 부르면서, 드워킨은 그러한 접근을 특별한 체형의 사람이 기성복 가게에서 맞는 옷을 고르는 것처럼 부질없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16쪽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괜찮지만 보신탕은 안된다"는 주장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개는 가축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개고기를 먹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개의 생물학적 특징 때문이 아니라 개가 인간과 함께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인간에게 유용한 역할을 해 온 개에 대해, 우리가 최소한의 애정과 예의는 보여야 한다는 보신탕 비판자들의 논리는 그래서 지극히 인간적이다. -52쪽

"A라는 행위는 문화적 전통이다" 따라서 "A는 도덕적이고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모든 전통적 행위는 도덕적이고 합법적이어야 한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우리의 고유 문화나 전통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도덕적, 실정법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문화적 전통이 도덕적이고 합법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62쪽

미국 철학자 제임스 레이첼스는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핵심 가치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공동체의 성립 및 유지를 불가능하게 하는 행위에 대한 부정은 모든 문화적 공동체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가치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을 보살펴야 한다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거나, 살인은 안된다는 등의 가치는 공동체의 성립 및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동시에 인류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가치라는 것이다. -81-82쪽

물론, 도덕적 논의는 수학 문제처럼 답이 딱 떨어지는 정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보다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행동이 무엇인가를 고뇌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상대주의는 보다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를 지향하기 위한 인간의 이성적 판단 자체를 의미 없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현재의 모든 상황이 최선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부조리로 귀결된다. -85쪽

문화상대주의의 논리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문화가 다르면 가치도 다르다는 '사실'을 하나의 '당위'로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 다양하고 상이한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왜 그러한 가치가 지속되고 옹호되어야 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결국, 문화상대주의는 현재의 상황을 무조건 정당화하는 자기 모순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85쪽

물론, 하나의 행위가 '전통'으로 지속되어 온 데에는 분명히 어떤 역사적 문화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성찰할 때는, 그것이 과연 오늘의 시점에서도 정당한가가 중요하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특정 문화권의 전통이기 때문에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비교 평가할 수 없다면, 지구 공동체 공통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 -86쪽

"균등의 원칙을 우리 자신의 종을 넘어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의 요지는 간단하다. 너무 간단해서 이해 관계의 균등한 고려 원칙을 이해하는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원칙이 개인의 생김새나 능력에 무관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바로 이 원칙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종의 생명들을 착취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을 차별 대우해서는 안되듯이, 우리와 종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의 이해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피터 싱어)-120쪽

단지 동물이기 때문에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동일한 이해 관계에 대해 균등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는 이해 관계의 균등한 고려 원칙에 어긋난다고 싱어는 주장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도덕적 원칙에 어긋나는 것을 알면서도 동물이 말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우리에게 항의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을 하는 이들에게도 그들의 행위가 잘못됐다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싱어는 지적하고 있다. -122쪽

싱어는 그의 저서에서, 날개도 제대로 펼 수 없는 좁은 닭장 안에 갇혀서 사육되는 닭의 고통을 예로 들면서 농장 동물의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자유롭게, 고통 없이 사육된 닭이 있다면 공리주의 원칙상 그 닭으로부터 생산된 달걀은 먹어도 괜찮다고 그는 말한다. 반대로 날개도 펼 수 없는 좁은 닭장에서 키운 닭으로부터 나온 달걀은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싱어의 주장이다. 그러한 계란을 소비하는 것은 그러한 사육 방식을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143쪽

미국 러트거스 대학의 법철학 교수인 프란시온은 동물에 가해지는 고통을 종식시키고 그들의 인간에 대한 노예적 상태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동물에게 인간의 재산으로 취급되지 않을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물의 현 예속 상태가 부도덕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종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물을 단순한 재산으로 취급하는 법을 폐기하고 동물에게 재산으로 취급되지 않을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51-152쪽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 하더라도, 저술 하나로 사람들의 생각이나 관습과 제도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변화를 위한 사회 정치적 노력과 행동을 동반하는 캠페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변화를 위한 설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리 있고 설득력 이쓴 '생각'이 먼저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만으로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생각의 조형은 새로운 변화를 위한 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초로서 필요하다. -161-162쪽

"일부 동물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통일된 심리적 실재'라는 미스터리를 이 세계에 부여한다.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들 역시 다양한 감성적, 논리적, 능동적, 의지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보고 들으며, 욕망과 믿음,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다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자신들의 의지를 실현코자 한다. 우리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 동물에게 있어서도 자신들의 운명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육체적인 즐거움과 고통도,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공유하고 있는 것들이다. 나아가서 동물들은 우리처럼 공포와 만족, 분노와 외로움, 좌절과 충족감을 느낀다. 동물들 역시 때로는 교활하게 행동하며 몰염치하기조차 하다. 여기서 열거한 그리고 열거하지 못한 다양한 심리적 상태와 특징들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때, 우리 인간과 동물은 (나의 용어를 빌리자면) 모두 정신적, 심리적 삶을 살아가는 '삶의 주체'임과 동시에 자신들의 행복을 저해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삶의 주체'들이 자신의 생명과 삶을 소중하게 취급받을 최소한의 도덕적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93년 톰 리건)-164-165쪽

리건은, 육식은 (의식 있는 동물인) 가축의 '본원적 가치'인 생명 그 자체를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빼앗는 행위이므로 결코 도덕적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고통의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무조건 육식을 회피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반대로 동물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일방적으로 빼앗기지 않을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175쪽

리건은 권리론이 주장하는 채식주의가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자들의 채식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싱어의 공리주의에 따르면, 만약 채식주의가 동물에 가해지는 고통을 줄이지 못한다면 그 채식주의는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리건은 반박한다. (그 이유는 그 채식주의가 공리를 생산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건은 그래서, 싱어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한 개인이 채식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얼마나 많은 타인들이 채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리건이 말하는 권리론의 채식은 다르다. 권리론의 채식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채식을 하느냐, 혹은 그러한 윤리적 채식주의가 실제 효과가 있느냐는 사실과 관계없이, 한 개인이 무조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177-178쪽

"상황에 관련된 모든 개체를 존중한다는 전제 아래 그리고 특수한 고려를 배제한다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모든 개체는 더욱 불리한 경우에 처해지는 상황을 피해 갈 권리가 있다. 설혹 그러한 행위가 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또 다른 개체에게 피해를 준다 하더라도." (톰 리건)-179쪽

"권리가 있다."고 주자榜?것은 이미 주어졌어야 할 것이 박탈당해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현재 없는 것을 새로이 달라고 주장하기보다 - 왜냐면, 새로운 것을 달라고 할 때는 그 이유를 적극적으로 충분히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이미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현재 주어져 있지 않다는 식의 논리로서, 왜 그것이 없는지를 도리어 상대에게 설명하게 하는 수사학적 기교라고 할 수 있다. 리건이 내세운 동물의 권리론도 이러한 시류를 편승하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의무를 강제할 수 없는 권리, 즉 법률적 권리처럼 강제성을 전혀 갇지 못하는 도덕적 권리에 불과하다면, 진정한 의미의 권리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왜냐면, 그 때의 권리란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상징적 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0-201쪽

우리가 동물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도덕적 질문의 앞에는, 우주와 지구 환경을 공유하는 하나의 생물체로서 인간과 다른 생물체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이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우리의 철학적 명상은 결국 삶에 대한 성찰과 세계관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 점에서 볼 때 보신탕 논란의 진정한 요체는 그것이 혐오 식품이냐 아니냐, 민족 고유의 음식이냐 아니냐, 개가 가축으로 분류되어야 하느냐 아니냐, 외국 동물 애호가들의 시비에 굴복해야 하느냐 아니면 고유 음식 풍속에 대한 민족 자존심을 지켜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보신탕에 대한 논란은 고래나 돌고래 사냥에 대한 논란이나 영국의 여우 사냥 금지 혹은 야생 동물에 대한 보호 여부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는 지구 환경을 공유하고 있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선택의 문제이고 현실적으로는 동물에 대한 각기 다른 정서를 가진 사회 구성원들 간의 경제적, 정치적 갈등에 대한 조정 그리고 법률적 접근 방식의 문제이다.
-209-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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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03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건의 생각은 '대자대비' 부처님의 생각과 유사하군요..

'보신(생존이 아닌)'을 위해 타생명체의 생명력을 이용하는 인간의 저열함에
자괴감을 느끼곤 합니다.
'한의사'들의 논리?!.. 녹용과 웅담과 기타 등등..
우주의 기(氣)를 내 몸속으로 끌어들이는 무서운 요기들, 도사들..
도저한 인간의 이기심을 봅니다.... 아프락사스님.


마늘빵 2007-06-0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리건은 부처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거의 같다고 봐야죠. 여기서도 저자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저자는 리건의 논리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비판을 가하더군요.

2007-08-14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14 18:20   좋아요 0 | URL
<시귀>라는건 소설인가요, 한번 검색해봐야겠네. 그쵸. 우리가 당하는 입장이라면 또 다를 겁니다. 언제나 우리는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에 육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건 아닐까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육식했는데... ;;;

2007-08-14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14 18:22   좋아요 0 | URL
하하. 그쵸 이런건 모순이 아니고 고민 아닌가요. :) 참 큼지막한 주제 여러개를 꺼내셨는데,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님과 같은 '고민과정'에 있습니다. 모순은 나의 어떤 행위가 다른 행위와 충돌을 일으킬 때를 일컫는거니, 이런 고민과정엔 해당사항 없을 듯 합니다. 요새 고민 많으신가봅니다. :) 좋은 현상(?)이에요. 크크.

2007-08-15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15 23:24   좋아요 0 | URL
남들이 사서 고민한다는 그런 고민들, 어쩌면 삶을 참 불편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전 개개인의 그런 사서하는 고민들로 인해 세상이 좀 더 나아진다고 믿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 나아진 세상에 사실상 얹혀살고 있는 셈이지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 변화가 시작된다고 봅니다. :)

2007-08-16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16 10:5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데서 블로그 하는 재미를 느낍니다. 재미보다 좀 더 나아간 무엇이지만.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하고 있으니 저도 더 생각해보게 되고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희망의 밥상
제인 구달 외 지음, 김은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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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면 세계의 기아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유전자 변형으로 자양분이 고갈된 토양을 되살리고, 식량을 증산시킬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몬산토, 뒤퐁, 다우, 기타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의 종자 공급을 장악해 가고 있는 속도로 볼 때, 유전자 변형의 가장 큰 동기는 금전적인 탐욕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의 식량 공급을 특허권으로 통제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한편, 자연 자원을 고갈시킬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농법이 저개발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저개발 국가의 지도자들은 세계은행이나 국제 통화 기금 등으로부터 다국적 기업과 협조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다국적 기업들은 저개발 국가들을 대상으로 자사의 농경 기술을 팔기 위한 시장을 개척하는 한편, 낮은 비용으로 식품을 생산(종종 노예의 노동력을 동원하기도 한다)함으로써 저개발 국가에 곡물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다. 결국 저개발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식민지 착취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셈이다. -102-103쪽

세계의 기아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연구를 해 본 사람이라면 지금 지구 어디선가 8억 명의 사람들이 굶고 매일 3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는 이유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정치 불안, 불안정한 식량 유통 체계, 정부(지방 정부든 중앙 정부든)의 부패, 인구 과밀 또는 과도한 방목으로 인한 토양의 황폐화, 거대 기업의 농토 장악으로 지역적 특색에 맞는 농경이 불가능해진 점,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리고 도시로 떠나는 이농 현상 등 그 이유는 다양하다. 이농 현상의 경우 농업으로 생계를 잇던 농부들이 그 수단을 빼앗김으로써 점점 더 가난해지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마저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더 비극적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농부들은 대대로 물려받으며 농사를 짓던 땅을 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지만 도시에서 찾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시는 이미 대량 실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자리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때 자부심을 갖고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굶주림에 지쳐 거지가 되어간다. -103-104쪽

해바라기 씨앗을 수확한 여인네들은 가까운 곳에는 그 씨앗을 내다 팔 만한 시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종묘 회사에서 웨일웨일에서 수확한 해바라기 씨앗을 되사겠다고 했다. 그러나 농사를 지은 여인네들에게는 전혀 이익이 남지 않을 만큼 턱없이 낮은 가격이었다. 게다가 더 분통 터지는 일이 있었다. 농부들이 다음에는 더 큰 수확을 거두기를 바라며 거두어들인 해바라기 씨앗 중 일부를 새로 뿌리기 위해 남겨 두었다. 그러나 곧 종묘 회사에서 그들에게 판 씨앗은 열매를 맺지 않는 불임 씨앗임이 밝혀졌다. '터미네이터 종자'라고도 부르는 이런 씨앗은 유전자를 변형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제 자신의 배아를 죽여 재생산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 종자다. 종묘 회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새로 파종할 해바라기 씨앗을 전보다 더 비싼 값에 팔아먹는 파렴치한 횡포를 저질렀다. -109-110쪽

문제는 '그들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나 '그들도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이다. (제레미 벤담) -123쪽

2004년 봄의 어느 날, 로스는 실수로 왼손 가운데 손가락을 칼에 베었다. 상처는 정상적인 경우라면 오래가지 않고 금방 아물만한 정도였다. 그러나 로스의 상처는 크게 부풀어 올라 골프공만 한 크기가 되었다. 로스를 치료했던 의사는 로스의 상처가 항생제 내성이 강한 박테리아에 감염되었으며, 이 박테리아는 공장의 닭으로부터 감염된 것이라고 믿는다. 몇 개월 동안이나 항생제로 치료했지만 감염은 치료되지 않았고 감염에 의해 곪아 버린 손가락을 절단해야했다. 손가락을 절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로스의 극단적인 반응과 항생제에 대한 무기력한 반응이 새로운 공중 보건의 연구를 시작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고, 이 연구에 따라 체사피크 만 지역의 닭가공 공장 근로자들이 항생제 내성 검사를 받았다. -155쪽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동물을 대하는 방법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저항력이 없는 동물일수록 인간의 잔인함으로부터 인간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마하트마 간디)

-167쪽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육식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첫째, 인간의 몸은 해부학적으로 많은 양의 고기를 자주 섭취하는데 적당치 않다.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은 장의 길이부터가 다르다. 육식 동물의 장은 짧아서 (제 몸 길이 정도) 먹이 중에서 소화되지 않는 것도 부패하기 전에 재빨리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있게 되어 있다. 초식 동물은 식물성 먹이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장의 길이가 길다. (보통 자기 몸의 네 배 정도) 인간의 장도 길이가 길다. 따라서 육식을 하면 고기 찌꺼기가 장에 너무 오래 머무르게 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아도 인간은 육식에 적합한 신체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고기를 찢거나 베어내기 적합한 이빨도 없고 발톱도 없다. 마지막으로, 유기농 축산물을 섭취하지 않는 한 육식을 하면 공장식 사육장에서 가축을 사육할 때 사용한 항생제와 호르몬이 사람의 몸까지 오염시킨다. -225-226쪽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3분의 1에서 거의 절반가량이 사람이 먹을 가축을 살찌우기 위한 사료로 쓰인다는 통계가 있다. 미국에서도 농지의 56퍼센트가 고스란히 쇠고기를 생산하는데 쓰인다. 영국에서는 70퍼센트의 농지가 가축의 사료를 재배하는데 쓰인다. 유럽과 일본에서도 그와 비슷한 정도의 가축들이 식용으로 사육된다. 많은 선진국들이 자기 나라에서 소비될 가축을 자기 영토 안에서 모두 기를 수 없다. 유럽에서 식용으로 쓰일 가축 모두에게 먹일 풀과 곡물을 재배하려면 유럽 연합 전체 면적의 일곱 배에 해당하는 토지가 필요하다. -232-233쪽

1헥타르의 토지에 감자를 심으면 스물 두 명이 1년을 사 수 있다. 같은 면적에 벼를 심으면 열아홉 명, 곡물을 심지 않고 소나 양을 길러 쇠고기와 양고기를 생산하면 단 한 명 내지 두 명 만이 그 고기로 1년을 살 수 있다. 물론 사람이 1년 내내 감자가 옥수수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육류의 생산을 늘리는 방법으로는 굶주린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수치로 알 수 있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육류를 소비하기 위해 지구상의 농지를 파괴해야 한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육류의 생산을 늘리는 것보다는 육류의 소비가 심한 음식 문화에 변화를 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235-236쪽

희망을 잃는다면 삶을 계속 나아가게 하는 생명력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할 용기,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전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질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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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7-05-2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 할 내용이 정말 많은 책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