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공화국의 종말 - 인재와 시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대한민국이 산다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절판


주어진 문제를 틀리지 않고 정답을 골라야 하는 자아의 정신과 의식은 완전히 해체되어 문제를 출제하는 외부자의 일부분, 아니 외부자의 일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몰 주체화 과정이자 몰 개성화 과정이다. 즉 개인의 주체성과 개성을 부정하고 말살해버리는 과정이다. 이처럼 대학 입시에 점령당한, 대학 입시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한국의 교육은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인간 유형을 양산하고 있다. 근대사회는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개인들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 위에 존립한다.-38-39쪽

사실 체벌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몸은 더 이상 규율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정신과 더불어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나의 인격은 너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존엄하고 신성불가침한 것이다. 거기에는 그 어떠한 물리적이 강제력이나 폭력도 가해서는 안된다. 체벌은 다른 사람의 인격에 강제력과 폭력을 행사해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꼴이다. 따라서 교육이나 훈육이 필요하다면 체벌이 아닌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

(밑줄그은이 주 :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현실에서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간혹 발생한다. 명백히 누가 봐도 - 잘못을 저지른 본인을 포함 - 잘못인 것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을 경우, 다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통하지 않는다면, 해당 학생을 포기해버리거나 신체에 폭력을 가하더라도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는 두 가지 길 밖에 남지 않는다. 포기할 수 없으니 후자를 택할 밖에)-50쪽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교육을 담당하는 일선 교사들이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한다. 가르친 사람이 그 결과를 평가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유기적이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가르치는 사람 따로 있고, 평가하는 사람 따로 있다. 후자는 전자를 철저히 무시하고, 전자가 소유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문화자본'을 가지고 전자가 가르친 학생들을 시험한다. 마치 자신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를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한국의 대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비유기적으로 분리시키고 괴리시키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사회집단이다.-68-69쪽

그러나 민사고에서 10등은 어디까지나 10등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일반고의 1등은 어디까지나 1등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신이란 학생들이 동일한 환경과 여건에서 경쟁을 해서 나타난 결과를 점수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신은 학생들이 주어진 조건에서 얼마만큼 학업을 성취했는가를 따지는 제도인 관계로 서로 조건이 다른 고등학교의 내신을 비교해서는 안된다. 민사고 학생의 학업 성취도는 어디까지나 다른 민사고 학생들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특목고의 경우도 그렇고 일반고의 경우도 그렇다. 서로 다른 학교의 내신은 상호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러한 근거로 일반고에서 1등은 민사고나 특목고에서 1등과 동일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108-109쪽

내가 보기엔 내신 그 자체가 말이 안된다. 즉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학업 성취도에 따라서 줄을 세운다는 발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객관화하고 계량화하고 그 결과에 근거해 상호 비교할 수 있다는 생각의 발로이다. 여기서 인간은 객체화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 그리고 인격은 부정되고 무화된다. 남는 것은 산술적 논리일 뿐이다. -109쪽

정답을 고르는 객관식 시험의 경우 내가 받은 90점은 네가 받은 95점과 당연히 비교된다. 정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시험에 정답이 없다면 나의 A학점과 너의 B학점은 단순히 비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너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 중략 ... 그러므로 굳이 내신을 반영해야 한다면,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를 해야한다. 즉 단순히 기계적으로 누가 몇 등급에 속하므로 몇 점을 받는다고 평가해서는 안되고, 그가 주어진 여건에서 어느 정도의 학업 성취도를 보여주었는가를, 그리고 그가 지원하는 대학에서 어느 정도의 학업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평가해야 한다.-109-110쪽

한국인들은 외국의 언론사들이 실시하는 대학의 서열화 작업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거기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대학들이 고등학교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른바 세계적인 대학들은 우수한 교수를 확보하고 뛰어난 연구 업적을 쌓으며 질높은 교육을 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오늘날의 발전을 이룩하고 명성을 획득한 것이지, '쩨쩨하게' 고등학교에 기대고 힘입어 그리된 것이 아니다.-112쪽

최소한 동일한 조건인 경우에는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 공부한 학생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큼 불리할 수 밖에 없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대학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잠재력과 창의성이지 결코 고등학교에서의 학업 성취도를 계량화하고 지수화한 점수가 아니다. -114쪽

요즈음에는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공교육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고등학교들이 제법 눈에 띈다. 그러나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으니, 이러한 학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사교육으로 왜곡된 학교 교육을 바로잡아 전인 교육이나 인성 교육을 시키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다만 학생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학교에서 대학 입시 준비를 시킨다는 점에서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142쪽

(밑줄그은이 주 : 음주 문화와 와인의 이해 등의 실용적인(?) 과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물론 대학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뒤처져 고리타분한 '상아탑주의'로 남아서는 안된다. 글로벌화와 글로벌 시대는 대학 사회에도 커다란 도전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글로벌 에티켓'을 가르치는 것에 대학의 역할이나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학은 오히려 글로벌 에티켓을 글로벌 시대의 구성요소로서 연구 대상으로 삼아 분석하고 설명하고 그에 대한 과학적인 토론을 전개해야 한다. 즉 글로벌 시대는 대학에게 인식의 대상이지 예의범절의 대상이 아니다. 예의범절로서 글로벌 시대는 시민회관이나 백화점의 문화센터에서 배우도록 하라-162쪽

대학에서는 단 한두 명 밖에 수강생이 없더라도 칸트, 하이데거에 대한 강좌를, 성리학에 대한 강좌를 개설해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토론식과 논술식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대학이외의 그 어떠한 사회문화적 조직이나 공간에 의해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이를 대체할 수 있다면 대학은 굳이 존재할 근거나 의미가 없다. 역으로 만일 대학이 상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면 기업의 존재 근거와 의미는 퇴색하거나 없어질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민 교양 수준의 강좌는 폐지해야 한다. 설령 수백명이 몰린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대학 밖의 어디서 그런 강좌가 열리는지 홍보하는 포스터나 책자는 학생들을 위해서 비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말이다. 대학생에게는 교양을 갖추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추구할 곳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대학 밖 어딘가에-162-163쪽

시험에서도 고등학교와 대학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고 전도된 모습을 보여준다. 서울대는 2008학년도 논술 고사의 시험시간을 5시간으로 결정했다. 문항은 인문계가 3개, 자연계가 4개를 각각 출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다른 대학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술 고사를 거쳐서 들어간 대학에서 치르는 시험은 어떠한가? 대략 한 시간 정도에 걸쳐 2-3문제를 푸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도 말이 주관식 서술형이지 강의 시간에 배운 것을 착실히 암기해 충실히 답안을 채우는 방식이 주종을 이룬다. 결국 변형된 객관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험으로 학생들을 측정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논술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182-183쪽

독일의 대학에서 진행되는 세미나식 수업 방식의 구조와 과정은 다음과 같이 기술해 볼 수 있겠다. 우선 담당 교수는 한 학기 동안 진행할 세미나의 주제, 목표 및 세부적인 주제를 제시한다. 물론 구체적인 사항들을 학생들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또는 그룹에 속해서 담당 교수가 제시한 또는 공동으로 결정한 세미나 주제 중에서 특정한 것에 대해서 발제함으로써, 참석자들에게 토론의 실마리와 자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어느 발제가 좋았느냐, 아니면 나빴느냐에 대한 기준은 얼마나 발제자가 혼자서 많은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느냐에 달려 있다. 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은 이후에 글로 써서 제출해야 하는데 저학년 세미나에서는 주로 발제 내용의 정리 수준에 머문다면, 고학년 세미나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작은 논문 형식을 취하게 된다. 한편 담당 교수는 제출된 글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해당 학생들과 직접 면담하고 토론을 하는데, 그는 여기에서 학생의 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후에 점수를 주게 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비로소 한 과목의 이수가 끝나게 되는 것이다.-217-218쪽

한국에서 엘리트는 명문대 출신과 동일시되는 명목상의 엘리트이다. 엘리트다운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명목상의 엘리트는 당연히 허약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엘리트가 허약하다는 명제는 무엇보다도 엘리트 집단은 획일적이며 정답을 찾아 헤매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그리고 이처럼 허약한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는 당연히 허약할 수 밖에 없다.-229쪽

객관식 시험은 언제나 정답과 오답을 구분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강요함으로써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범주화하는 흑백논리를 키우기 수비다.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이니 '이단'이니 하는 흑백논리를 아주 쉽게 접한다. 물론 이 둘은 한국 사회의 독특한 정치적 경험과 종교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빨갱이'와 '이단'과 같은 흑백논리의 형성에 교육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 또는 우리, 즉 '정답'을 고른 개인이나 집단은 너 또는 너희, 즉 '오답'을 고른 개인이나 집단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답'은 선한 것이요, '오답'은 악한 것이다. 둘이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둘 사이에 접점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정답'과 '오답'은 논의나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객관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찾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273쪽

언젠가 도덕시험에 '다음 중 중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5개의 지문이 주어졌단다. 그러자 그 학생은 자신이 볼 때 중학생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문항을 골랐다. 그는 나름대로 '주관적 정답' - 물론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 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답으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교사에게 항의했더니, 교사가 제시한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교과서 어딘가에 중학생이 되면 하는 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정답이 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중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을 교과서에서 규정할 수 있다는건가. 그리고 학교와 교사는 교과서의 내용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참고 자료로 이용할 수 있지, 어떻게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아니 신주 모시듯이 하면서 무성찰적이고 무비판적으로 학생 평가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객관식 시험을 통해서 말이다. 섬뜩한 기분이 든다.-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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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7-21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점점 찌들어버렸던 불행했던 학창시절이 생각나네요. 언제쯤 학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곳이 될까요.

마늘빵 2007-07-21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르치는 저도 힘겹습니다. 읽기만 해도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해야한다는게 - 그렇다고 따로 뭔가를 만들어 수업할 능력도 안되고 - 답답합니다. 사고를 강요하는 교과서는 바뀌어야합니다. 특히나 마지막 밑줄긋기 부분에서 볼 수 있듯 도덕교과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옳고 그름을 재단하고, 사고의 틀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코미디죠. 저런걸 가르치는 저나, 시험보기 위해 외우고 있는 학생들이나.
 
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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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대들보 같은 중요한 가족 성원이 세상을 등지면 유족의 생활에는 엄청난 타격이 미친다. 그런데도 자살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험금을 주지 않는다면, 유족의 생활 보장이라는 생명 보험 본래의 사명에 위반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자살로 인한 사망은 생명보험료율의 기초를 이루는 생명표의 사망률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자살을 배제하면 보험회사가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게 된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현재 일본 생명보험회사에서는 가입 후 1년 동안을 자살에 따른 면책기간으로 삼고 있다. 처음부터 자살을 염두에 두고 보험에 가입했다고 해도, 보통사람이라면 1년인나 죽음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는 어렵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과연 이 1년 이라는 기간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23쪽

"신문에서 보았는데,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을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잖아? 원래 독일어를 잘못 번역한 것으로, 전혀 병태와도 일치하지 않고 다중인격과도 착각할 수도 있고 말이야. 게다가 불치병 같은 어두운 어감이 강해서, 그런 선고를 받으면 가족들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버리지. ...... 그와 마찬가지로 정성결여에 대해서도 다른 표현을 쓰는게 좋다고 생각해."

"잠깐만요. 당신까지 단순한 언어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신지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자코 담배만 피웠다.
"당신은 정말로 이 세상에, 인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211쪽

"r전략이라는 것은 곤충처럼 수많은 자손을 만든 다음 거의 내버려두는 방법이고, K전략은 인간처럼 소수의 자식을 에지우지하면서 키우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포유류 중에서도 특히 자식을 소중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K전략자이지요. 옛날에는 잠시 눈을 떼기만 해도 아이가 죽어버리는 유아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부모가 따뜻하게 보살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게 되었고, 문자 그대로 부모 없이도 자식이 자랄 수 있게 되자 r전략의 상대적 유리성이 증가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자식을 만들고 싶은 만큼 만들어두고 내동댕이쳐도 사회가 돌봐주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자식을 남길 수 있지요. 즉, 자식을 열심히 키우는 것보다, 자식을 만들어놓고 도망치는 전략이 유리해져 버린 것입니다."

가나이시는 얼음이 녹은 버번을 한 모금 들이켜 마른 목을 적셨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떠올린 것처럼 히죽거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선의로 가득 찬 길도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 미국에 유학 갔을 당시에 친했던...... 어느 친구에게 배운 속담이지요. 약한 자를 보호해 주는 사회보장제도가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냉혹한 r전략 유전자를 급속히 증가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사이코파스의 정체이지요." -242-243쪽

"이런식의 명렬한 유전독성으로 인한 환경오염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걸쳐 태어난 사람들이 성인이 된 최근 10년은 사이코파스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까요? 한 마디 덧붙이자면, 최근에 문제가 되고 이쓴 전자파가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도, 반드시 망설(妄說)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예로 든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뒤얽히며 인간의 DNA를 손상시켜서, 사이코파스의 증가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실마리를 풀어가는 단계에도 접어들지 못했습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사이코파스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그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49-250쪽

"문제는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한 사람의 사이코파스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승수효과에 의해서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좋지 않은 영향이지요. 그것은 지금의 현실을 둘러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까지 배금주의가 침투하고, 정의와 도덕을 입에 담는 것은 촌스럽다고 조소당하고, 다른 사람을 태연하게 상처입히는 사이코파스적 가치관을 냉정하다든지 멋있다는 이유로 입이 닳도록 칭송하고 있지요. 예를 들면...... 글쎄요. 요즘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절반은 사이코파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전의 만화에는 조금 더 인간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요. 요즘에는 상대방이 악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량한 주인공이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그냥 죽여버리잖아요? 게임에서는 더욱 심각합니다. 적이 되어 싸우는 상대방을 처음부터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히 움직이는 표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251-252쪽

가나이시는 생명보험에 관한 범죄 중에서도 보험금을 노린 살인에는, 다른 범죄에 비해서 사이코파스가 관여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일단 그의 논거는 앞뒤가 맞는 것처럼 보였다. 우발적인 범죄나 격정에 휘말린 범죄와 달리 보험금 살인에는 주도면밀한 계획성과 의심을 받지 않으려는 용의주도함, 나아가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상대를 살해하려고 하는 냉혹한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55쪽

그에게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실감은 거의 없었다. 사치코의 죽음이 남긴 것은 단지 생리적인 불쾌감과 꺼림칙한 뒷맛뿐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간단명료한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치코가 아무리 잔악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른 살인귀라고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퀴벌레의 목숨을 빼앗은 것만큼의 감정 밖에 솟구치지 않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그는 오히려 뒤꼭지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448-449쪽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 모든 사건이 악의에 가득찬 것으로 보이는 거에요. 그러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교묘한 트릭을 사용하게 되지요. 배신을 당해도 상처 입지 않도록 모든 것에 대해서 마음의 인연을 끊거나 애착을 갖지 않아요.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에 사악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막상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고통당하지 않도록 배수진을 쳐두지요. 우리 사회에 정말로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알아보기 쉬운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는 보통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454-455쪽

생명보험이란 과연 무엇일까. 신지는 자리로 돌아가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뛰어난 치안과 저축을 좋아하는 근면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세계 제일의 가입률을 달성한 시스템.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경제가 순조롭게 발전하여 생명보험회사들은 화려한 봄을 구가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한때의 지나간 꿈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사회 전체가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거대한 도덕적 붕괴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가치를 경시하고 돈이 최고라는 풍조, 사고력과 상상력의 쇠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결여, 그러한 징조들은 이미 손해보험 분야에서 시작되고 있다. 손해보험업계에서는 공공연하게 청구 금액의 절반은 사기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생명보험에까지 파급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렇게 되면, 보장에 대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게 되고, 결국 그 부담은 국민 전체에게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것을 단순히 세기말이나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 전체가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469-470쪽

인간의 정신적 위험인 모랄 리스크는, 예전에는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급격히 감소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방향을 더듬어가고 있다. 그 원인은 죽은 가나이시와 일부 사회생물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복지제도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현재의 복지제도가 약자에게 그렇게까지 따뜻하게 배려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농약이나 식품가공물, 다이옥신, 전자파와 같은 사회오염이, 인간 존재의 근간인 유전자를 잠식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 중략 ...

가나이시의 말을 대변하자면,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하도록 진화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언젠가 그들에게 잡아먹히게 되리라.

그것은 가나이시의 병적인 염세주의가 낳은 환영에 지나지 않을까. 죽음의 악취로 충만한 검은집이 우리 사회의 내일의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470-4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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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안보구 책으로 읽는 거예요? 아프님도 이런책 읽는구나 ㅎㅎ

마늘빵 2007-07-1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먼저 보고 책도 보는거에요. :)
이거 곧 영화칼럼(?) 나갑니다. 쓰려고 마음만 먹고 있는 중. 오늘 중으로 쓰려고 하는데 지금 지치고 더워서 뇌가 호흡곤란을 일으켜서 맛난거 먹으며 쇼파에서 티비나 보다 오려고요.

프레이야 2007-07-14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원작이군요. 저도 언능 이 영화 보고 싶던데, 아직이네요.
아프님 칼럼 기다립니다.^^

푸른신기루 2007-07-1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아프님도 이런 소설 읽는구나ㅎㅎ
急친근^-^
영화는 어땠어요?? 재밌어요??
영화랑 책 중에 어떤 게 더 괜찮아요??

마늘빵 2007-07-1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 이 영화도 좋았고, 책도 좋았어요. 영화는 책으로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함을 표현해줬고, 책은 영화가 담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깊이있는 대화를 담아냈죠.
신기루님 / ㅎㅎㅎ 둘 다 재밌습니다. 이 소설 누구한테 빌린건데;;;

red7177 2007-07-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은 아직 못 읽었는데, 책이 더 으스스하다고 하네요. 정말 그런가요?
조금 더 더워지면 한밤중에 읽으려고 하고 있답니다. ㅋ

마늘빵 2007-07-1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자꾸 상상하게 되니깐요. 근데 영화를 먼저 봐서 책을 통해서 상상되는 장면도 영화의 장면이 먼저 떠올라요. 영화와 다른 으스스한 부분이 책 뒷부분에 나오는데 무섭습니다. 이제 엘리베이터도 못타겠습니다. :)

sweetmagic 2007-07-1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별 용달 보다는 **택배 하지 ㅋㅋㅋ

마늘빵 2007-07-1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매직님 댓글 잘못 단거 같아요. ㅋㅋ 이 페이퍼가 아닌데.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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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법률가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남들이 모두 진리라고 믿어 온 것도 반드시 자기 머리로 한번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지요.-5쪽

제 기대는 병역거부가 더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 저의 경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는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 전쟁이 분쟁 해결의 중요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이런 세계에 살면서 평화를 모색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뿐이 아닌 평화의 실천을 고민하다보면, 어느새 병역거부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변한 것처럼 여러분도 이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늘다 보면 언젠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그런 날도 오겠지요. 이 책은 '그들'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나'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 저의 지적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35쪽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둘러싼 이런 오해는 용어의 번역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입니다. 서양에서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미로 쓰이는 '양심' 개념이 번역되어 우리 일상에서 쓰일 때 '다른 사람의 평가'와 관련된 객관적인 의미로 확장되었고, 거기에 '적'이라는 일본식 표현까지 덧붙어 그 의미가 매우 불분명해졌습니다. 물론 우리말에서도 '양심'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바른 말과 행동을 하려는 마음'을 뜻합니다. 적어도 사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국어사전이 알려주는 의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관계없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양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그 사람 참 양심적이야"라는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 사람은 자기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야"가 아니라 "그 사람은 참 좋은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야"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오해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38-39쪽

'a good conscience'란 자기 마음에 비추어보았을 때 떳떳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좋은 양심'이냐 아니냐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양심은 누구나 자기 내면에 지니고 있는 거울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적 감각과 관련 있기는하지만, 보편적인 윤리나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각자 나름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이상해 보여도 스스로 자신을 그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떳떳하다면 그것은 'a good conscience'입니다-40쪽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헌법 제19조가 이야기하는 양심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헌법학자들이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양심이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입니다.-40쪽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가 진지하고 절박하고 구체적인 마음의 소리를 뜻한다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행동에는 충분히 '양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이 그저 남들이 다 가는 군대이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징병에 응한다면 그것은 굳이 양심의 자유와 연결시킬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내가 군대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내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 때문에 견딜 수 없어 군대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진 않을 테니까요.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영 행위는 '비양심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과 크게 상관없는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40-41쪽

'양심에 따른 거부'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개인이 행사하는 광범위한 거부권을 의미합니다. 자기 양심에 따라 국가의 요구를 거부하는 모든 행동을 포괄하는 표현이지요. 여기에는 자기가 동의할 수 없는 이념이나 정책을 펴는 국가에 반대해 세금을 내지 않는다든지, 독재 정권에 대항해 투표를 거부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포함됩니다. -42쪽

'양심에 따른 거부'란 매우 광범위한 시민불복종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나라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로 번억해 쓰는 co는 정확히 번역하자면 '양심에 따른 거부'가 맞고, 거기에는 병역거부뿐만 아니라 세금 거부, 투표 거부, 화폐 사용 거부, 집총 거부 등 국가를 상대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거부가 포함됩니다. 이 목록은 얼마든지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양심에 따른 거부의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가 병역거부라는 걸 이해하고 나면 '비양심적 병역이행'같은 기괴한 반대 논리가 자리 잡을 여지는 전혀 없지요. –-49쪽

pacifism은 처음 쓰일 때부터 반전주의를 의미했습니다. 지금도 대개의 영어 사전들은 "전쟁은 잘못된 것이며,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도 잘못이라는 믿음", "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 또는 폭력에 반대함, 윤리적 또는 종교적 이유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함"등으로 평화주의를 정의하고 있지요.-50쪽

'평화주의'라는 단어를 드을 때 퀘이커나 메노나이트, 아미시 같은 특정 기독교 교파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 중에도 국가에 의한 징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므로 평화주의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에 충실한 사람도 역시 평화주의에 속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복잡성을 고려할 때, 우리가 평화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렇게 정의하기 어려운 여러 평화주의에서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것 뿐입니다. 다행히 그 공통 분모를 찾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을 거부한다'는 점이지요. 일단 이 책은 그 공통분모에 기초하여 평화주의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평화주의를 '전쟁에 반대하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 또는 종교적 믿음'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51쪽

평화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이 전쟁만은 '필요악' 또는 '정당한 전쟁'이라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며 찬성표를 던집니다. 심지어 전쟁터에 나가 사람을 죽이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평화주의자 범주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평화주의자가 되려면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것 이상의 강한 확신이 필요합니다.-52쪽

평화주의와 구별해야 하는 개념으로 '비폭력주의'가 있습니다. 비폭력주의는 평화주의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평화주의가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비폭력주의는 '폭력'을 거부하는 입장입니다. 전쟁에 반대하면서도 부모나 교사가 드는 회초리에는 찬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평화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비폭력주의자는 아닙니다. 기독교 교파 중에는 전쟁에 절대 반대하면서도 가정 교육에서 일반인들보다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비폭력주의자는 대부분 평화주의자입니다만, 평화주의자가 되려고 비폭력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통 평화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동물에 대한 폭력까지 반대해서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가권력이 행사하는 폭력에만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이보다 훨씬 범위가 넓은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을 묶는 유일한 공통점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반전주의자가 되려고 반드시 채식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반전주의자가 되려고 반드시 비폭력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52-53쪽

사실 "강도가 네 여동생을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이라는 질문도 여러 차례의 변형을 거쳐서 나온 것입니다. 질문자들은 왜 "강도가 너를 죽이려 한다면"이라거나 "강도가 너를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 같은 질문을 들고 나오지 않았을까요? 이미 그 질문의 답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정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저는 강도를 죽이고 자신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제 생명을 포기하겠습니다"같은 대답을 듣는 것은 질문자에게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신념을 위해 자기 생명도 포기할 수 있다고 결단한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평화주의자들이 그런 존경을 받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굴레를 씌우려고 말이지요.

이 질문은 그런 악의에 찬 의도로 고안되었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토론을 지향하기보다는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만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논의 대신에 '강간'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써서 이 문제를 남성성의 문제로 전환해 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빈다. "네 여자가 강간을 당할 상황인데, 가만히 있다면 너는 사나이가 아니다"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전쟁터로 남성들을 유혹해내기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바로 '강간'입니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습니까? 또 위의 질문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네 여동생', '네 아내', '네 여자친구' 등 모두 '너의 OO'입니다. 그들이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 소유권 침해를 막아야 한다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67-68쪽

우선 전쟁은 '무죄한 사람의 죽음'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개인적 차원의 방위와 구별됩니다.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내 방위행위의 대상은 분명합니다. 바로 강도 그 사람이 나의 상대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 상관없는 제 3자가 피해를 입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다릅니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은 '언제나' 무고한 양민들입니다. 역사상 모든 전쟁이 그랬습니다. 비행기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 빌딩으로 돌진한 테러범들은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빈 라덴이 주축인 알 카에다라는 테러 조직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은 알 카에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명분은 테러범 응징을 내세웠지만 결국 고통받은 것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민중들이었습니다. 강도에게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과 전쟁을 같은 차원에 놓고 비교하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 중략 ...

전쟁이 위 질문의 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면 설사 제가 그 질문에 "예, 저는 강도를 죽이고 여동생을 살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병역을 거부할지라도 저의 두 태도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69-71쪽

공론의 장에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놓고 팽팽한 논쟁이 벌어져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게 되었을 경우, 누가 논증부담을 져야 할까요? 사람들은 보통 평화주의자들이 논증부담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토론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전쟁의 정당성 또는 불가피성을 전제한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주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네 쪽에서 밝혀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해서 토론 패배를 인정하고 평화주의를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관한 한, 잠정적 추정은 평화주의 쪽의 손을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가져오는 엄청난 인명 손실과 인권 침해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약'이어서, 전쟁을 옹호하는 어느 누구도 감히 전쟁 그 자체를 '선'이나 '정의'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쪽은 어떨까요?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성경의 입장이 과연 평화주의 쪽이었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평화주의적 입장에 설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보았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평화주의 쪽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잠정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면,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기독교 내부의 논증부담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 참여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부담해야 합니다. –-83-84쪽

"병억 기피 풍조가 만연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집중적인 전도 대상이 되는 기독교인들 중 일부가 대체복무제에 귀가 솔직해 넘어갈 수 있다"는 한기총 정연택 사무총장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물론 대체복무제 같은 그럴듯한 미끼가 있다면 기독교인들 중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되는 사람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요. 그러나 한번 생각해봅시다. 대체복무제가 전통적인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허용된다면 이런 걱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개신교 신자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하는 걸 막으려고 여호와의 증인들을 감옥에 보내야 할까요? 기독교인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넘어가는 걸 막는 일은 목사님들이 할 일이지 국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올바른 기독교 교육을 통해 막아야 할 일을 국가 형벌을 통해 해결하려는 태도가 과연 기독교 정신에 맞는지 의문입니다.-108쪽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마라.
(<마태복음> 5:38-42, 비교 <누가복음> 6: 29 ) -112쪽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라는 구절에는 '거역'과 '거스르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거역'은 그리스어 '안티타소'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 군사 용어인 이 말은 '전투 태세를 갖추다'또는 '무기를 들고 대항할 준비를 하다'는 뜻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두 번의 '거스르다'는 그리스어 '안티스테미'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도 무장반란이나 폭력적 저항을 의미합니다. 즉 위의 성경 구절에 나오는 '권위를 거역'한다는 의미는 국가권력에 폭력으로 저항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 국가권력에 대한 '모든' 저항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지요. 따라서 위의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국가권력에 맞서서 무장반란을 일으키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되고 그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가 되는 것입니다. -120쪽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정당한 전쟁 이론의 핵심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제시한 데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전쟁은 정의를 보장하고, 평화를 되찾는 수단으로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전쟁은 반드시 정당성을 지닌 통치자의 지도 아래 이루어져야 하며, 적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적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비전투요원들은 보호받아야 하며, 학살, 약탈, 방화 등은 절대 금지됩니다. 수도사나 성직자들처럼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집합적으로 또는 법적 권위자에 의해 실현되는 '전쟁'과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폭력(또는 살인)
을 엄격히 구분하였습니다. 앞의 것은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136쪽

최초의 동기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그 방법이 정당하지 않을 때는 나의 행동 자체가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의 정당성과 전쟁에서의 정당성을 구분하려는 입장은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불가분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정당성과 전쟁의 정당성은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150쪽

식민지가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병역을 강요할 수 없다는 원칙은 이때 처음 수립된 것입니다. 이 법안을 수용하면서 펜실베니아 의회의 한 의원은 "잠깐 동안의 안전을 위해 본질적 자유를 포기하는 자들은 자유도 안전도 얻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눈 앞의 안전을 위해 양심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기억해둘 만한 말이지요. -177쪽

톨스토이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반드시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이든, 이슬람이든, 불교도든 또는 어떤 나라 출신이든지 간에 전쟁을 거부하는 입장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899년 징병을 앞둔 젊은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와 같은 입장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한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 시대를 사는 윤리적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면 병역을 거부해야만 합니다." 톨스토이의 평화주의는 이론적으로 매우 단순한 형태였지만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184-185쪽

"누구든지 양심에 반하여 무기를 들고 전쟁에 복무할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다." (독일 헌법 제 4조) -203쪽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필요하다면 감옥에 갈 때도 있겠지만, 그곳에서도 혼자가 아닙니다. 옳은 것을 위해서 일어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는 아닙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하는 자는 다수'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소수를 다수로 바꾸는 분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께 의지하여 올바른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당신 곁에 계실 것입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베트남 반전 운동에 나서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설교의 주인공으로 킹 목사를 자주 인용하는 한국 목사님들이 막상 킹 목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사실, 정말 아이러니 아닙니까?

킹 목사는 평화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았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최고의 자리에서 반역자의 자리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평화의 실천은 그런 것입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킹 목사를 본받아서는 안됩니다. 평화는 최대한 추상적으로 말로만 떠들어야 하는 것이지, 절대 구체적인 전쟁을 언급하거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세상이 가르쳐주는 지혜입니다.
-227쪽

"내게는 전쟁을 단순화시켜서 생각하고 싶은 아주 개인적이지만 강한 유혹이 있다. 이를테면 제 6계명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살인하지 말지니라'의 말 뜻 그대로 믿고 싶은 마음이 있다. 또한 모든 윤리적인 원리들 가운데 가장 큰 원리인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말의 보편성을 에누리 없이 믿고 싶은 유혹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인간 역사에 더 큰 살상을 막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필요했고 또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았던 순간들이 드물게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이런 결론에 마음이 못내 불편하고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의 저자 M 스콧 펙 박사)-248쪽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입영률 100퍼센트 달성 지시를 내림에 따라 병무청 직원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 모든 병역거부자(또는 병역거부가 예상되는 사람)들을 일단 군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부터는 병무청 직원들이 아예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회장소인 왕국회관을 포위하여 징집 연령에 속한 사람들을 영장도 없이 군부대로 강제 입소시킨 다음, 군부대 내에서 입영 및 소집 명령서를 발부하는 불법을 자행하기도 하지요. 그야말로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높은 실적을 올리려고 멀쩡한 민간인을 붙잡아 억지로 군인으로 만든 다음 군형법을 적용한 것인데 누구도 그 절차상 하자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270쪽

1990년대 초부터 일부 군사법원(국법회의의 후신)은 상관이 총을 두번 주었는데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두 번 다 거절하면, 각각을 독립된 범죄로 보아 마치 같은 죄를 두번 저지른 것처럼 가중하여 처벌하는 편법을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형법상 이른바 '경합범'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를 통해 법정형으로 정해진 징역 2년의 상한선을 넘어 징역 3년을 선고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처음 거부했을 때 즉각 구속하지 않고, 다음날 다시 총기를 수여함으로써 억지로 경합범을 만드는 이와 같은 처벌 방식은 당시 30개월이었던 현역 복무 기간보다 형이 더 길어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 정당화되었지요.-275쪽

동기는 좀 달랐다 하더라도 이들의 행동은 분명히 국가 전체를 병영으로 만들려는 군사독재정권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이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이 '이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단이냐, 아니냐 여부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내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기독교의 '이단' 정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이단'으로 확대해서 받아들였습니다. 주류에 속한 특정 집단이 소수파를 '이단'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회 전체가 그 소수파를 '이단'으로 받아들이는 특이한 시스템이 구축된 것입니다. 반공, 애국, 기독교, 독재정권 등이 일체를 이룬 주류 사회가 소수자를 억압하는 데 철저하게 결합해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278쪽

양심적,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의 경우에는 헌법상 기본적 의무로 되어 있는 병역의 의무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핵심적 기본권인 사상, 양심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그 양자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양자를 적절히 조화, 공존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예외 없는 처벌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 외에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각자의 사상, 양심, 종교에 따른 실질적 평등을 보장받을 평등권 등 헌법상 기본권이 침해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양심적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하여 헌법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단계에 왔다."는 박 부장판사(2002년 1월 29일 서울 지방 법원 남부지원 박시환 부장판사)의 선언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281쪽

대체복무에 반대하는 분들은 애국심이 남달라 강한 분들입니다. 누구라도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의 애국심이 지금의 수준을 뛰어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애국심은 남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남이 어떻게하든, 남이 돈을 써서 병역 면제를 받든말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든말든, 나는 내 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입니다. 그리고 남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내가 상당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것도 애국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애국자들이 대체복무와 같은, 남에 대한 배려를 받아들이고도 남을 애국심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314쪽

남북 대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감옥에 넣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가치 자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모순된 논리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엄청나게 제한했던 유신정권과 논리 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어차피 소수자들은 다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체복무 인정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따뜻한 배려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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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들에게 들려주는 행복의 길 청소년 철학창고 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홍석영 옮김 / 풀빛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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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까? 이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대답들은 모두 '행복'으로 모아진다. 행복은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의 선이다. 어떤 사람도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은 서로 다르고, 때로는 같은 사람도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고유한 일과 기능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고유한 일, 자기에게 어울리는 일을 탁월하게, '매우 잘' 수행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해지며, 그런 행복은 생애 전체에 걸쳐 완전한 덕을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인 '정신의 덕이 있는 활동'을 행복이라고 규정하고, 행복한 사람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탐구한다.
(1부 행복에 대하여) -12쪽

행복이 완전한 덕에 따른 활동이라면, 이제 덕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 행복에 대해 더욱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덕은 '인간의 덕'이다. 인간의 덕이란 신체의 덕이 아니라 '정신의 덕'을 의미한다. 정신의 덕은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구분된다. 철학적 지혜나 이해력은 지적인 덕이고, 너그러움이나 절제는 도덕적인 덕이다.

그러면 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정념, 즉 감정을 잘 다스리고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념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중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간은 수학에서 말하는 평균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중간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이며, 또한 참된 덕이다.
(1부 행복에 대하여) -22쪽

국가의 통치 형태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의 타락한 형태에도 세 가지가 있다. 세 가지 통치 형태는 군주제, 귀족제, 그리고 재산 능력에 기초를 둔 유산자제(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국가 형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화제라고 부름)이다. 이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군주제이고, 가장 나쁜 것은 유산자제이다. 군주제가 타락하면 참주제가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1인 지배의 정치 체제이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즉, 참주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군주는 백성의 이익을 추구한다. 군주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돌본다. 따라서 참주제는 타락한 정치 형태 중에서 최악의 형태다.

귀족제는 그 통치자들의 악덕으로 인해 과두제로 타락한다. 과두제에서는 국가에 속하는 것을 제멋대로 분배한다. 즉, 좋은 것을 전부 혹은 대부분 자기가 갖고, 관직을 언제나 같은 사람들에게 주며, 무엇보다도 재물에 연연한다.

유산자제는 민주제로 타락한다. 사실 이 둘은 거의 비슷하다. 유산자제는 다수의 지배를 이상으로 하며, 재산이 있는 사람은 모두 평등한 것으로 여긴다. 한편 민주제는 다른 타락한 정치 형태들보다는 덜 나쁘다. 시민들 스스로의 선거에 의해 지도자를 뽑기 때문이다.
(6부 다시 행복에 대하여)-165-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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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1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 카테고리 목록을 보시면 금방 아실거에요. :)
전공 맞습니다.
 
몽매한 자를 깨우치다 이이의 격몽요결 Easy 고전 10
김세서리아 지음, 김우정 그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삼성출판사 / 2006년 12월
절판


"모를 섬기는 자는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행실이라도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고, 반드시 부모에게 명을 받은 뒤에 그것을 행해야 하는 것이니, 만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도 부모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자세히 말씀드려서 부모님이 허락하신 뒤에 행할 것이다. 끝애 허락하지 않으신다 해도 곧바로 자기 마음대로 제 뜻을 이루어서는 안된다."
(밑줄그은이 주 : 그 정신은 본받아 마땅하나 언제나 문자 그대로의 말이 옳아보이진 않는다) -89쪽

예전엔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의식의 개념이 들어 있었다면, 요즘의 장례식은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영원히 제외시키는 의식의 절차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례식장이나 납골당 같은 것이 집 주변에 생기는 것을 꺼리는 것도 그러한 생각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죽음을 자꾸만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하려는 현실의 세태가 조금은 아쉽게 느껴집니다.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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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12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내용은 그다지 깊이있진 않습니다. 이이와 관련된 주변머리들을 훑으신다고 보면 돼요. 이지고전 시리즈 네 권짼가 보는데 다른 책에 비해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워낙 또 <격몽요결>이란 책이, 맹자나 공자 처럼 뭐 말할거리가 많은 책도 아니라. 그럭저럭 볼만해요. <격몽요결>은 1차 서적 붙들고 있긴 힘드니깐.

마늘빵 2007-06-1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 그렇담 요 책으로도 괜찮을거 같아요.

2007-06-12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