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7 - 나의 소심한 반항
작년초 내가 이 회사에 입사 했을 때에는 자기계발비며, 야근비며, 초과근무수당이며 기본적인 복지는 갖춰져 있었다. 월급이 생각보다 적지만 그래도 개념있는(?) 회사에 다닌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경영하는 CEO의 마인드 - 난 사장과 회장과 CEO의 차이를 모르겠다 - 가 이 정도라면 꽤 기분 좋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사 두달쯤 지나고, 자기계발비로 뭘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제도가 폐지됐단다. 무슨 강의를 들으러 다닐까, 집앞에서 다니던 피트니스 클럽 기한이 끝나면 회사 앞에 등록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폐지됐단다. 어이쿠. 많이 서운했다.
그래도, 시간당 오천원의 야근비는 살아있었다. 아홉시까지 일한다는 전제하에. 아홉시 전에 가면 야근비 없다. 작년 한 해 이렇게 놀아본 적도 없을 만큼 일을 무쟈게 많이 했다. 뭐 다른 직장에 근무하는 야근 밥먹듯이 하고 집에도 못들어가는 사람들과 또 비교를 해보면 많이 한 게 아닐 수도 있는데, 내 입장에선 무쟈게 많이 했다. 무쟈게. 열두 달 중 한 달은 집에 안 들어가고, 잠을 하루에 너댓 시간 잤으니 할 말 다 했지. 주말에는 여섯 시간 이상 일해야 돈을 줬다. 시간당 오천원. 피씨방, 편의점, 음식점 알바비(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맨날 알바비 수준 받는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그런데, 몽땅 폐지됐다. 회사 사정이 어렵단다. 물건이 안 팔린단다. 잘 좀 만들으란다. 더 열심히 일하란다. 월급이 밀렸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알바비도 폐지된 마당에 월급까지 밀려서 사람들은 적금까지 깼다.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나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며. 지금은 월급은 제때 나온다. 그런데, 회사 사정은 여전히 안 좋단다. 근래들어 요상한 이야기가 들렸다. 팀별로 조를 짜서 야근을 한다고 한다. 이건 뭥미?! 아니 왜. 나의 동급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팀장이 그리 지시했단다. 아마도 팀장은 더 위에서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오늘 동료 하나가 당장 할 일은 없는데 '야근하는 날'(?)이라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말했다.
야근하는 날. 살다살다 별 소리를 다 들어본다. 야근해가면서 급히 해야 할 게 없는데도 야근을 해야한다니. 야근수당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일도 없는데 야근을 하다니. 회사가 정신을 놨구나 싶었다. 경영 쇄신한다고 외부 인사 불러다가 부서도 개편하고 그랬는데, 기껏 한다는 게 야근조를 짜고 요일을 정해 야근을 하는 거라니. 입이 떡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았다. 요즘, 개념있는(?) 회사들은 창조경영이다, 창의경영이다, 펀 경영이다 하며 오히려 직원들의 여가를 지원해주고, 최대한 자유시간을 줘서 아이디어를 내는 쪽으로 가고 있다. 얼마전 티비에서도 그런 회사들이 소개됐는데, 이 회사는 흐름을 거스르는구나.
교육을 시켜달랬더니 엉뚱한 노동부 지원 무료 독서 통신 교육을 모두 신청하라고 하지를 않나. 수강 강좌가 죄다 무슨 미래를 준비하는 자기계발, 고객 서비스 만족, 커뮤니케이션, 기적을 만드는 문제해결능력 이런 거다. 들을 게 하나 없는데 - 물론 읽어서 전혀 도움이 안되는 건 아니다 - 그 중 좀 괜찮은 책이 들어있는 강좌를 신청해서 한달에 한권씩 읽고 문제를 푼다. 문제도 책을 온전히 읽으면 풀 수 없는 것뿐이다. 차라리 책을 안 읽고 해답이 있을 만한 구석을 펼쳐서 찾는 게 더 빠르다. 난 그래도 온전히 읽고 싶어서 문제 상관없이 읽고 문제 풀다 모르겠으면 그냥 넘어갔더니 점수가 엉망이다.
다시, 다행히 내가 속한 부서 팀장은 야근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받았는데 나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지시를 받지 않았는지 모르겠는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굳이 지시를 하지 않아도 나는 앞으로 두달 간 다시 죽었다 살아나야 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라 굳이 지금 조를 짜서 야근하지 않아도 그 사람들 일년 야근 시간 다 합쳐도 안 될만큼 많이 일하게 된다. 제발 이번엔 집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다. 앞으로 한달 뒤의 모습이 또 눈에 선하다. 그렇게 죽어라 해도 뭐 돌아오는 거 없다. 그냥 사명감으로 일할 뿐. 사실 나는 강요하면 더 엇나가는 녀석이란 걸 대충 아는 것도 같다. 평상시에도 눈치 안 본다. 자유롭게 냅두면 때되면 알아서 무료 노동한다.
권위주의적이지 않고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해주는 게 그래도 남은 매력이었는데, 그나마도 이제는. 휘모리님 페이퍼보고 버닝했다. 에혀, 지금도 메신저에는 회사 동료가 접속 중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더 열심히 해라.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