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chika > 마태효과

 

 

 

 

마태효과,라는 말이 정말 쓰이는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사회학자 로버트 머턴은 '마태효과 Matthew effect'라고 불렀다. 그는 "과학 연구에 대한 공적이 잘못 배당되는 복잡한 패턴"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효과에 따르면, 이미 명성을 얻은 과학자가 자신보다 젊거나 덜 알려진 과학자들을 희생시켜서 특정 아이디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공동연구 프로젝트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무명의 과학자와 노벨상을 받은 그의 지도교수가 함께 논문에 이름을 올렸다면, 실질적인 공로와는 무관하게 노벨상 수상자에게 그 발견의 공로가 돌아갈 것이다. 머턴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리라"라는 <마태복음> 13장 12절을 기초로 마태효과라고 명명했다.

머턴은 마태 효과가 전체적으로 과학의 소통 체계에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왜냐하면 과학 논문이 날로 증가하는 과정에서 특히 중요해 보이는 논문에 관심이 몰리는 편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효과의 불합리한 측면, 즉 무명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가리는 효과도 인식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과학자들이 기초 논문을 쓰지만 오랜 기간 동안 무시되는 사례가 과학의 역사에는 비일비재하다"........... "마태 효과가 권위의 우상으로 변형될 때, 과학이라는 제도에 구현되어 있는 보편주의를 위배하고 지식의 진보를 왜곡시킨다. 그러나 과학 저널 편집자와 심사위원들이나 그 밖의 과학의 수문장들이 이런 관행을 얼마나 자주 받아들이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마태효과라는 글은 이 책에서 읽은것임. (145-146)

 

 

마태오복음서 13: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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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너희가 '톨스토이'를 아느냐

자료를 찾느라고 한겨레21의 박노자 칼럼을 뒤적이다가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칼럼들을 몇 개 읽게 되었다. 그 중 우리 근대문학과 톨스토이에 관련한 칼럼은 '러시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육당과 춘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문학의 뒷계단'에 옮겨놓는다. 딱 3년전쯤 칼럼이다. 최근 영어권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에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가 나란히 선정되어 '최고의 소설가'란 평도 얻은 톨스토이에 대해서 조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물론 이 칼럼의 초점은 '소설가'가 아니라 '사상가' 톨스토이이지만...

한겨레21(04. 02. 26) 너희가 '톨스토이'를 아느냐

근대 초기 한국에서 서구 중심 세계 체제로의 정신적 편입의 한 중요한 통로는 ‘서구영웅 기리기였다. 공자나 맹자가 그 빛을 잃고 ‘나파륜’(拿巴倫·나폴레옹), ‘비사맥’(比斯麥·비스마르크) 등의 ‘제국주의의 영웅’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창간호(1908년 11월) 1면을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모습으로 장식하고, <나폴레옹 대제(大帝)전(傳)>을 연재한 육당 최남선의 잡지 <소년>과 같은 서구 중심주의적 계몽주의의 매체 자본은 물론, 황제 고종도 곽종석(郭鍾錫)과 같은 굳건한 유림들로부터 “나폴레옹을 고대 중국의 무왕(武王)보다 더 용맹스럽게 여긴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서구 위주의 세계관에 일정 부분 포획되었다.

톨스토이 수용, 한가지 수수께끼

그럼에도 가끔 제국주의의 반대편에 선 소수의 서방인들이 세계적인 살육의 판도 속에서도 한국 지성인들의 주목을 받곤 했다. 대표적인 서방인으로 바로 현대의 평화주의와 반(反)국가주의의 원조로도 잘 알려진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였다. 1900년대 후반부터 시작돼 식민지 시기의 말기까지 이어진 톨스토이 붐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에 톨스토이 소개의 매개가 된 메이지 말기의 일본의 경우처럼, 톨스토이의 가르침은 근대 미증유의 폭력성에 환멸과 절망을 느낀 이상주의적 젊은 지식인들에게 살육과 증오가 없는 ‘대안적인 근대’의 길을 보여주었다. 톨스토이가 보여준 길이 꼭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에 인도주의적 대안이 제시됐다는 것은 양심을 보유하는 지성인에게 반가운 일이었던 것이다. 또한 불굴의 독립운동가 양기탁이 <신생>(新生)이라는 잡지의 창간호(1928년 10월)에 쓴 논설이 보여주듯,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폭정에 도전하여 박해와 비방을 감수하고 빈농들과 살기를 실천한 ‘안빈낙도의 지사(志士)’, ‘직언(直言)의 선비’의 이미지와 부합된 톨스토이의 인격은 유교적인 심성에 젖은 근대 초기의 지성인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한국 지식인들은 유교와 불교, 묵가(墨家) 철학 등의 동아시아 사상에 대한 톨스토이의 존경의 태도에 감탄하기도 했다. 예컨대 <조양보>(朝陽報) 제10호(1906년 9월25일자)에서 톨스토이를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소개한 한 개신 유림은, 그가 “맹자의 이상을 이룩하려는 세계 일류의 사상가이니 한국의 유림들도 자애 자중할 수 있다”고 했다. 스스로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처럼 되자는 것이 대다수 개화파의 소원이었지만 한국이 부득이하게 ‘먹히는’ 쪽에 속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이 ‘약육강식’을 부정하면서 동아시아에 대한 보기 드문 존경심을 가진 톨스토이의 가르침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톨스토이 사상의 수용을 연구하자면 한 가지 수수께끼에 부딪히게 된다. 톨스토이의 저작 중 <기독교와 애국주의>(1894), <두개의 전쟁>(1898), <죽이지 말라>(1900), <러시아를 비롯한 기독교 민족들이 왜 곤궁에 빠졌는가?>(1907년 탈고) 등 말년의 논문들은 국가와 교회, 애국주의의 허상과 ‘문명’의 허망한 꿈, 과학의 권위 등을 이론적으로 부정할 뿐만 아니라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각자 군대나 학교, 교회 등의 살육·노예화·기만의 기구들을 등지고 살라는 실천적 요구를 담은 것이었다.

100년 전의 톨스토이 저작물들을 읽어보면 많은 성역들이 이미 깨져버린 오늘에조차 그 탈(脫)근대주의적 과감함에 놀라게 된다. “유럽 정부들은 국회에서의 자유주의적 궤변이나 거리에서의 사회주의적 시위들을 엄청난 양보를 하는 척하면서 용납해도 병역 거부나 군비로 쓰일 세금의 납부 거부는 절대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병역 거부야말로 모든 지배의 폭력적인 성격을 노골화하는 피지배자 해방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군사 존폐의 문제를 지배자들의 의지에 맡긴다면 전쟁이 더 끔찍해지지 끝날 리는 없다. 전쟁을 없애려면 지배자에 대한 공포나 지배자들이 제시하는 이득 몇푼 때문에 살인자들의 대오에 몸을 팔아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 자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동시에,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병역 거부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선각자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평화 회의와 관련해서>·1899)

국가와 폭력을 ‘과도기의 필요악’으로 생각하는 100년 전의 ‘주류’ 사회주의자보다도 톨스토이가 훨씬 더 철저한 근대의 이단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 같은 군사주의적 ‘영웅’들이 ‘신민(新民)의 모범’ 대접을 받고 병역이 ‘국민의 신성한 의무’로 의식됐던 개화기나 일제 시대에, 어떻게 이와 같은 철두철미한 ‘급진파’ 톨스토이가 조선 지성계의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톨스토이의 조선 초기 숭배자 중의 한 사람인 최남선의 사례를 들어보자. 나폴레옹의 신봉자로서 <나폴레옹 격언집>까지 잡지 <청춘>(제8호·1917년 6월)에 실은 육당이 어떻게 톨스토이를 동시에 숭배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적 근대국가에 대한 육당의 시종일관적인 선망을 아는 사람이라면 톨스토이를 1908~10년에 ‘예수 이후의 최대 인격자’, ‘대선지자’(大先知者), 공자와 같은 ‘부자’(夫子)로 불렀던 그의 태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육당의 “톨스토이 선생을 곡(哭)함”(<소년>, 제9호·1910년 12월)이라는 일종의 톨스토이 평전을 읽어보면 최남선의 톨스토이관(觀)이 어느 정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靈)의 철학가’ 이미지만 만들다

최남선이 본 톨스토이는 금욕적인 생활과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 미신이 아닌 이성에 근거를 두는 ‘신봉’(信奉·신앙)을 예수처럼 가르쳐준 ‘종교인’이었다. 즉, 그의 탐욕·폭력 극복론은 현실적인 방안이 아닌 원론적인 종교적 이상이라는 것이 톨스토이 사상에 대한 육당의 근본적인 생각이었다. ‘영(靈)의 철학가 톨스토이’ 이미지를 만들려는 최남선은 병역 거부에 대한 톨스토이의 신념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일제의 대륙 침략을 어디까지나 불가피하고 필요한 것으로 보는 육당이었기에, 전쟁을 일으킨 러·일 양쪽 정부가 다 강도에 불과하다는 취지의 톨스토이 러일전쟁 반대의 서한(1904년 8월7일자로 일본의 사회주의자 기관 <평민신문>에 게재)도 이 글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친일적 성향의 신예 개화파가 톨스토이의 탈근대적 대안을 추상화·종교화해서 병역 거부·국가에 대한 불복종 호소와 같은 그의 정치·사회적인 핵심을 빼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소년>과 같은 개화 잡지에서 나폴레옹의 ‘격언’과 톨스토이의 ‘교훈’이 옆자리에 나란히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지상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온건’ 지성인들에 의해 종교화돼 ‘개인 수양의 이념’으로 탈바꿈돼버린 톨스토이주의의 비극…. 물론 톨스토이주의의 주된 ‘강령’으로 “군직(軍職)에 들어가지 말라”(즉, 병역 거부해라)는 것을 든(<개벽>, 제9호·1921) 진보적 천도교인 박달성(朴達成·1895~1934)과 같은 급진적 언론인이나, 지배계급을 ‘기생충’에 비유한 톨스토이의 노동중시론을 선호했던 1920년대 국내외의 조선 아나키스트 등은 사회·정치 사상가로서의 톨스토이를 스승으로 생각했지만, 이광수와 같은 부류의 ‘주류’ 예속 부르주아층의 논객들에게 톨스토이주의는 다만 비정치적인 ‘인격 수양’ 또는 ‘개량된 기독교 윤리’에 불과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닌 톨스토이의 대안 담론을 근대적 국가주의의 지배 담론에 종속시키려고 했다.

최남선과 이광수식 이해를 넘어

그들의 노력은 성공한 듯하다. 러시아 밖에서 톨스토이가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큰 권위를 지닌 나라들 중 하나인 한국에서 톨스토이 사상의 가장 핵심인 병역 거부와 국가주의에의 절대적 반대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이단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문학작품들이 ‘교양인’에게 거의 필독으로 돼 있지만, 군대와 국가를 부정하는 그의 논문들을 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최남선과 이광수식의 톨스토이 이해의 한계를 우리가 언제 넘을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에 접어든 우리가 아직도 100년 전의 친일적인 근대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세계관의 경계선을 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참고 사이트 ]
1. 톨스토이의 주요 저서 디지털판(러먼)
http://www.lib.ru/LITRA/TOLSTOJ/
2. 톨스토이의 주요 저서 영역(英譯)의 디지털판
http://www.ccel.org/t/tolstoy/
3. 톨스토이 저서의 영문판과 여러 관련 영상들
http://www.selfknowledge.com/431au.htm
4. 톨스토이의 영문 전기와 일부 저서의 영문판
http://www.literatureclassics.com/authors/Tolstoy/
5. 톨스토이 학보(영문 학술지- 토론토대학교·캐나다)
http://www.utoronto.ca/tolstoy/

07. 03. 01.

P.S. 그러니까 좀 균형잡힌 톨스토이 수용을 위해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이야기만 읽을 게 아니라 <사랑의 법칙과 폭력의 법칙>(아웃사이더, 2004) 같은 책들도 읽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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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조노동자여, 단결하라!

얼마전 '한국SF 100주년과 러시아SF'란 페이퍼를 올린 바 있는데, 기사에서 인용한 내용 중에 카렐 차페크의 <로봇> 얘기가 있었다. 쥘 베른의 <해저여행기담>(<해저 2만리>)가 1907년에 처음 소개되었고 그 뒤를 이어 1925년에 차페크의 <로봇>이 박영희에 의해 <인조노동자>로 번역된 바 있다는 것.

1907년 ‘해저여행기담’에 이어 1908년 이해조가 역시 번안작품 ‘철세계’를 출간했다. 1925년엔 박영희가 세계 최초로 ‘로봇’이라는 말이 나타난 카렐 차페크의 작품 ‘R.U.R’를 번역한 작품을 선보였다(*차페크의 <로봇>이 그렇게 일찍 소개되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한데 이 책 또한 품절이군).

거기에 내가 붙인 코멘트는 보는 대로이다. 이광수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그 번역과 관련한 칼럼을 읽게 됐다.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정선태 교수의 '번역으로 만난 근대' 연재 중의 한 꼭지이다.

한겨레21(04. 02. 05) 카렐 차페크, <로봇>(RUR) - 계급투쟁이 로봇에 실렸네

“갈군! 갈군! 왜 인조인간을 만들기 시작하였나? 할레마이어군! 파브리군! 왜 자네들은 자네 머리 속에 그런 많은 계획을 생각하였었단 말인가? 왜 글쎄 자네들은 그 비법의 흔적을 남겨놓지 아니하였나? 아, 하느님 ― 나의 기도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 만일 사람을 남겨놓지 않으시려거든 인조인이나 남겨주십시오 ― 아무렇게 하더라도 인간의 그림자뿐만은 남겨주십시오! (다시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다만 잠이나 자고 싶다. (일어나서 창 앞으로 간다) 아직껏 밤이다! 저편에서 아직껏 별이 반짝이고 있구나! 이 세상에는 벌써 한 사람의 인간도 살지 않는데 저 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중략) 모든 것이 소용이 없구나. (시험관을 깨뜨려 부순다. 기계의 돌아가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린다) 기계! 또 기계로구나! (창을 연다) 인조노동자여, 기계를 정지하여다오! 너희들은 기계로부터 생명을 만들어내려고 생각하느냐?”

소수의 인간과 인조 노동자의 대결

로숨 유니버설 로봇회사의 건축주임인 알퀴스트의 절망으로 가득 찬 독백이다. 그는 이 회사의 대표인 도민, 기술담당 이사 파브리, 생리학 연구부장 갈, 로봇 심리연구소장 할레마이어와 함께 외딴 섬에서 인조인간을 대량 생산하여 세계 각 지역에 판매하던 인간들 가운데 ‘기계들’의 반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였다.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생명체를 복제하는 데 성공하고, 이 ‘영혼도 감정도 없는 인간’을 팔아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던 로숨 유니버설 로봇회사의 인간들은 그들이 만든 ‘로봇들’의 반란에 직면해 죽음으로 내몰리고 만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 알퀴스트는 이제 인간을 제치고 인간의 지위에 오른 로봇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내동댕이쳤던 하느님과 별을 찾으며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공상과학(SF) 문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카렐 차페크(Karel Capek·1890~1938)의 희곡 <로봇>(원제는 Rossom’s Universal Robots)은 인조인간이 인간을 대신해 새로운 아담과 이브로 탄생하면서 막을 내린다.

SF소설의 효시로 알려져 있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하여 올더스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아이라 레빈의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등 이 분야의 뛰어난 작품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초래한 음울하고도 비극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 이에 따른 인간의 진보에 낙관적인 믿음에 빠져 있을 때, 이들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이 야기할 비극적인 결말을 경고하고 나섰던 것이다.

1920년에 발표되어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체코 출신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로봇>도 예외가 아니다. <로봇>은 화학적 결합을 사용하여 원형질이라고 알려진 생명체를 무한 복제하는 기술을 터득한 인간들이 어떻게 인간 자신을 파괴하는가를 예고하고 있는 희곡 작품이다. 과학기술을 장악한 소수의 인간들과 그들이 만든 인조인간 로봇의 대결,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개념이 결국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버리는 ‘과학의 희극’이 <로봇>을 관통하고 있다.

카렐 차페크(*왼쪽 사진)의 희곡 <로봇>이 이 땅에 처음으로 번역·소개된 것은 1925년 2월호 <개벽>을 통해서였다. 1925년을 전후하여 문단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신흥문학=계급문학의 ‘선봉장’이었던 회월 박영희(1901~?, 오른쪽 사진)가 이 작품을 <인조노동자>라는 제목으로 네번에 걸쳐 완역한다. 이른바 ‘병적 낭만주의’에 빠져 있던 박영희의 사상적 변신은 놀라울 정도인데, 1924년 이후 그는 평론과 소설 등을 통해 계급문학과 사회주의적 이념을 전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특히 그가 엮은 ‘중요술어사전’은 네 차례 <개벽>의 부록으로 실렸으며, 이는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잉여가치설, 공산주의, 유물사관, 과격파,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 새로운 사회주의적 개념들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소개한 중요한 자료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신흥사상’에 관심을 쏟고 있던 그의 눈에 카렐 차페크의 <로봇>은 어떻게 보였을까?

사회주의 이념 우회적 전파 통로

<인조노동자>라는 제목만 보아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번역자 박영희는 이 희곡을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을 그린 작품으로 보았던 듯하다. 자본가에 의해 비인간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인조기계’, 즉 로봇으로 파악하고, 기계로 전락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취하고자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기계에 불과했던 ‘인조노동자’들이 공포와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여 자신을 지배하던 인간들을 살해하고 새로운 주권자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이야말로, 사회주의를 비롯한 ‘신흥사상’에 대한 감시자들의 검열이 더욱 촘촘해지던 상황에서, 계급사상을 우회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다시없는 통로였을 터이다.

예컨대 인조노동자의 반란을 이끈 로봇 라디우스가 ‘최후의 인간’ 알퀴스트에게 던지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역사를 보십시오. 사람의 서적을 읽어보십시오. 당신도 사람답게 살려하면 주권자와 살육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수는 번식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완전무결한 세계를, 또 없는 세계를 만들고, 남극에서 북극으로 가는 운하와 또한 새로운 화성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책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해서 우리들은 과학과 미술을 연구하였습니다. 인조노동자는 인간의 문화를 완성하였습니다.” 로봇의 인간선언, 또는 기계와 다름없던 노동자의 인간선언!

<로봇>의 번역 <인조노동자>는 더 이상 ‘SF’가 아니었다. 테크놀로지를 전유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영혼도 감각도 없는 ‘인조인간’으로 내모는 비극적 현실을 타파하라고 ‘선동’하는 팸플릿이었다. 반란의 지도자 라디우스는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서 이렇게 외친다. “전 세계 인조노동자 제군! 전 인류를 우리는 죽여버릴 것이다. 한 사람일지라도 용서함이 불가함. 각 공장, 철도, 기계, 광산과 그 외에 모든 원료를 남기고, 그 외에 것은 모두 파괴할 일. 그러고는 다 각각 노동에 돌아갈 일이다. 노동은 중지함이 불가함.”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저 유명한 ‘공산당선언’의 ‘선언’을 떠올릴 필요조차 없다. 인간, 즉 자본가들을 몰아내고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팸플릿의 기능을 <인조노동자>는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로봇처럼 살았던 식민지 조선인들

유니버설 로봇회사 대표 도민의 말처럼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인 것이 현실이라면,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에는 어떠한 공존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라면, 그리고 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피착취자 역시 인간임을 선언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924년 일본에서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을 보았을 조선의 청년 지식인 박영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의 소설들과 평론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박영희는 사회주의에서 그 희망을 찾았고, 그 이념을 담은 작품으로 차렐 차펙의 <로봇>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암울한 식민지 근대를 살고 있던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자를 뜻하는 로봇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처럼 <인조노동자>와 함께 실려온 새로운 사상은 많은 ‘맑스보이’와 ‘엥겔스걸’을 낳으면서 저항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바야흐로 러시아혁명의 성공에서 희망을 보았던 사회주의 사상이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비추는 한 줄기 빛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정선태 |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07. 03. 01.

 

 

 

 

P.S. 참고로, 근대/문학과 번역 등에 관련된 정선태 교수의 흥미로운 논저들은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소명출판, 2003),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소명출판, 2006) 등에 갈무리돼 있다. 더불에 근대에 관한 여러 번역서들도 노작이다. 한달 정도 '큰방'에 간다면 다 읽어볼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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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와 무산자 관련도 페이퍼에 정리해 놓기는 했습니다만.
정작 맑스가 사용한 개념을 따르자면, 임금 노동자와 pt가 다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존경받았던, 사람들의 외경을 갖고서 바라보았던 모든 직업으로부터 그 신성한 후광을 벗겨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를 자신들의 유급 임금 노동자로 바꾸어 버렸다." (공산주의당 선언, <선집1>, 박종철출판사, 1991, 403면)

의사, 법률가 등도 '유급 임금 노동자'라는 것은, 여기서 '임금 노동자'라는 것이 소부르 계층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공산당 선언의 말미에는 그 유명한 구절인,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가 나오는데, 제 생각에는 이는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무산자와 임금노동자 중 일부를 대자적 계급으로서 호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혁명의 주체로서의 pt는 단지 생산수단 소유의 여부로 규정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맑스의 서술 속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룸펜 pt'에 대한 경멸과 그들의 반동성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pt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로서 '앞으로' 혁명의 주체가 될 가능성이 자본주의 발전과정에 따라 '농후한(?!)'이들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이는 또 자본주의 발전법칙의 필연성 같은 문제로 나아가서 또 골치 아파지지만, 저는 이를 '강한 개연성'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는 그저 맑스의 텍스트에 입각해 살펴본 pt, 임금노동자, 무산자 등의 개념이고, 실제 '지금-여기'서 역사의 혁명적 주체를 누구로 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노동자' 또는 'pt'라는 개념을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의 문제는 또 다른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로쟈님 방명록에 올린 글.)

에로이카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맑스에게 있어서 'pt'와 '노동자'는 같은 텍스트에서도 다르게 쓰이고 있음으로 참조해야 하겠다. 맑스주의의 '정치경제학 교과서'인 <자본>에서도 맑스주의의 정치 교과서인 '공산당 선언'에서도 두 개념이 동시에 나온다. 물론 이를 잘 정리해놓은 이론가(?) 주석가(?)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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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요즘 베네주엘라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제 전공(?)인 식민지 시기의 광범위한 조합주의 운동에 대한 재평가(또는 주목)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서 흥미와 관심(만?)갖고 있습니다.

"종속이론은 살아있다"
중남미 좌파 부상에 영향…'민중교육'은 이론의 핵심

   
 
 

50년대의 매카시즘 선풍을 치르고 난 미국은 60년대 들어 중남미에 대해 ‘진보를 위한 동맹’이란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그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은 반공주의에 있었고 자본과 기술을 투입하여 중남미의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여러 이유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발전된 종속이론은 우리나라에 80년대에 소개가 되었다. 이 당시 중남미는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이 상징하듯이 군부독재가 지속되거나 비록 민주화된 정부가 권력을 잡았더라도 신자유주의 개방화,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연히 비판적 종속이론이 중남미에서도 힘을 잃고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민족주의만 남고 다시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속이론과 케인즈 경제학 

무료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를 들어가면 쉽게 알 수 있듯이 1930년대 이후 변화된 세계경제의 흐름의 분석 에서부터 칠레의 산티아고에 있는 ‘유엔 중남미 경제 위원회’(CEPAL)를 중심으로 1940년대에 종속이론의 첫 시발점이 된 논쟁이 시작되었다.

종속이론의 배경에는 케인즈 이론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로스토우의 경제 발전 단계론은 어느 나라든지 이 단계를 밟기만 하면 자동적, 기계적으로 근대화되고 발전된다는 것인데 이 이론을 중남미의 상황에 맞는 발전 이론으로, 다시 말해 주체적(민족주의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수입을 규제하고 수입대체 산업을 국가가 주도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전략을 개발해냈다. 실제로 대부분의 중남미 정부들이 1940년대 후반 이후 경제 발전 전략으로 이를 실천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라울 프레비쉬, 페르난도 엔리께 까르도주, 알도 훼레르, 셀소 후루따도, 아니발 핀또, 오스발도 순켈 등이 있었다

세계 공황 이후 중심국가들의 수입이 위축되면서 원자재 중심 수출국들인 남미는 수출물량의 축소만이 아니라 공업제품과의 교역 조건 악화로 인해 직접적 영향을 받게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지속되어왔던 세계 경제의 통합과정에 단절이 일어나게 된다.

남미의 원자재 수출품들의 세계 무역에의 참여가 위축되게 된다. 이 시기(1940년대~1950년대 중반까지)에 수출의존적 경제에서 산업정책과 투자가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전략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내수 중심 수입 대체 전략은 오래 갈 수 없었다.

수입대체를 위한 최종 소비재 산업도 외국으로부터 기계와 부품 등을 수입해야 했는데 외환 지불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경제 구조는 비효율적인 방향으로 운용될 수 밖에 없었고 곧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런데 60년대 이후 남미의 원자재 수출이 크게 증가하면서 세계 경제에의 편입이 확대되면서 위기 상황이 나아졌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다.

대통령이 된 종속이론가

종속이론가 중의 하나였던 페르난도 엔리케 까르도주는 얼마 전 브라질의 대통령이었고 브라질 야당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는 사민주의 스타일의 신자유주의 추종자로 알려져 있다. 주변부에서 벗어나려는 급진적 정치성향과는 거리가 멀고,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던 종속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투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남미 각국의 경제,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특히 59년의 쿠바 혁명 성공 후 60년대에 걸쳐 ‘대안적’ 연구로 발전 이론 대신에 후기 종속이론이 나오게 된다. 안드레 군데르 후랑크, 테오토니오 도스 산토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경제 현상이 경제적 논리만이 아니라 정치, 군사, 외교 등의 역사적 맥락의 산물임을 밝힌 것이다. 안드레 군데르 후랑크는 로스토우를 통렬히 비판한다. 중심부 국가들은 주변부 국가들의 저발전을 대가로 발전한 것이라 하였다.

20세기 내내 정체되어있던 중남미 경제 상황의 원인을 복합적으로 찾아보자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이론적 탐구의 결과 가장 중요한 결론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뉘어져 있고 양자 사이에는 불평등한 교역구조, 비대칭적인 사회적 인프라 등으로 자본, 기술을 투입하여도 계속해서 ‘저발전의 발전’ 상황만이 지속된다는 비판이었다.

안드레 군데르 후랑크에 의하면 주목할만한 점은 이런 ‘대안적’ 비판이 정통 마르크시즘 계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는 현재 신자유주의/ 반신 자유주의 대결 국면에서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 추진도 ‘교조적 진보’인 베네수엘라 공산당 등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나게 한다.

종속이론이 힘을 잃게 된 것은 1973년의 칠레 피노체트 쿠테타부터 였다고 한다 . 이때부터 약 25년간은 중남미에서 신 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추진되던 시기라고 보면 된다.

리카르도 비교우위론의 허구성

그러나 종속이론은 중남미보다 세계중심부의 자본 축적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데 더 큰 공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67년에 <저발전인가 또는 혁명인가?>를 썼던 안드레 군데르 프랑크의 <비판과 반비판>(1978) 이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리카르도가 그의 비교우위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든 유명한 영국의 옷감과 포르투갈의 포도주 교역이란 사례는 어떻게 약 150년 동안 ‘자유로운’ 무역이 아니라 중상주의에 의해 영국에는 유리하고 포르투갈에는 불리하게 노동분업이 포르투갈에 강요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

영국은 1703년에 포르투갈과 메투엔 조약을 맺어 네델란드와 독일은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와의 교역권을 잃게 되었고 포르투갈은 영국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중심부 국가들이 중남미의 풍부한 농산물, 광산물의 원자재를 불평등한 교역조건을 통해 착취해왔음을 폭로한 것이다. 중남미의 일차 산품들은 마치 우리의 공산품처럼 수출품이다. 그런데 원자재와 공산품의 교역은 그 자체로 불평등한 것이다. 종속이론에 의하면 원자재 생산 그 자체가 저임금과 저발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 국가들의 저임금과 저발전이 ‘자본과 노동의 유기적 구성’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 하였다.

중남미 좌파의 부상과 종속이론 

시간이 흘렀어도, 종속이론의 문제의식이 전부 소진된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잃어버린 10년’이란 지적, 즉 신 자유주의 정책 방향에 대한 비판 자체가 종속이론의 문제의식에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가 수치상으로는 성장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삶의 질과 실질 소득은 줄어드는 구조적, 항구적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새로운 좌파들은 새로운 시각에서 일반 민중의 급진적인 사회운동에서 그 활로를 찾고자 하였고 이미 우리가 알다시피 1989년의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대중 소요' 사건과 같이 일반 시민, 대중의 불만이 거리의 정치로 분출되는 데로 연결된다. 이 흐름이 결국 90년대의 중남미 좌파 부상의 밑거름이 되게 한 것을 인식하면 어떻게 종속이론이 중남미에서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

종속이론의 핵심적 문제 의식 중에는 ‘민중 교육’이 있었으나 이를 주도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좌파들은 중남미가 종속적 주변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민의 교육’ 즉 무료 진료, 무료 교육이 핵심적 전략임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

특히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메르코 수르 국가들이 최근 추진하고 있는 ‘중남미 통합’ 운동은 바로 그 동안 숙명처럼 주어졌던 ‘주변부’에서 벗어나 새로운 ‘중심부’의 한 축이 되고자 하는 비전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종속이론의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미르 아민 등 종속이론가들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 공세로 비롯된 중남미 경제, 사회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용기 있게 반신자유주의의 꿈을 꾸었다. 실제로 유럽의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세대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강구하고 실천하는 데 에너지를 공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론적,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지만 중남미 현실의 가장 큰 모순을 피하지 않고 정면 대결하였고 이를 통해 중남미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공로는 종속이론가들에게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2007년 02월 27일 (화) 08:20:40 안태환 / 멕시코 redian@redian.org

 

안 그래도 요즘 베네주엘라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제 전공(?)인 식민지 시기의 광범위한 조합주의 운동에 대한 재평가(또는 주목)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서 흥미와 관심(만?)갖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집단이 많은데요. 저도 스페인어나 다시 해볼까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전망이 없는 시대는 아니에요. 진짜.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세계는 극변기입니다! 언제나 역사 속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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