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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 박완서 묵상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박완서 선생의 이 책은 흥미롭게도, 연극적 형식을 띄고 있다. 일종의 묵상집이요, 신앙간증문이라 할 수 있고, 성경의 한 부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 형식이다. 모두 2~3페이지의 분량으로 되어있는데, 서사구조를 단순화할 수 있다.
1. 성경 내용에 대해 논리적 이성으로 반박이나 거부. "이 말씀만은 이해할 수 없다"
2. 이에 대한 풀이 및 자신의 반성
3. 성경 내용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회개.
이러한 구조로 도식화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04~106페이지의 '에미의 마음'은 마태 15장 21-28절 말씀을 가지고 쓴 것이다.
처음에 박완서 선생은 귀신 들린 딸을 가진 가난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언행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그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어미에게 대답도 안하고 상대를 안 하다가 '나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라고 말하고 "자식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주인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며 유대인중심적 말은 한다. 이에 그 에미가 '개들도 그 주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하니 예수님은 그 믿음을 칭찬하고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다. 이처럼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고 나서는, '주님은 늘 그러하셨듯이 여인의 딸도 주님의 권능으로가 아니라 에미의 믿음으로 고치게 하고 싶어셨던 거로군요'라는 식으로 끝을 맺는다.
이 구조로만 본다면, 이는 일종의 꽁트식 '성장소설'과도 같다. 화자(박완서)는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시작한다. 그러다가 곰곰히 반성해보니, '이런 의미였군요'하면서 이해한다. 이는 예수님과의 대화 형식으로 보통 진행되고, 독자는 이를 엿듣는 입장이 된다.
기도나 편지나, 화자-> 청자의 방식인데, 이를 모노드라마처럼 꾸며서
T1 시작: 화자(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화자) -> TE 끝: 화자(성경을 이해하는 화자)로 바뀌면서 청자에게 이해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이를 책으로 묶어내고 이것이 1996부터 1998까지 천주고 <서울주보>에 연재되었으니만큼, 이 '연극'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독자이고, 화자는 분명 이를 의식하고 있다.
이러한 연극은 성경을 받아들이기 힘든,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독자의 의문을 풀어주는 효과로 기능한다. 70여년 전에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에서 쓴 방식과 비교해볼 수 있다.
여기서 임화는 어린 소녀(화자)와 공산주의 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오빠(청자)를 설정해서 그에게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공산주의 운동에의 다짐을 굳건히 하고 있다.
이보다 박완서 선생의 방식은 더 나아간 것이, 청자를 일종의 '성장소설'과 같게 변화시킴을 통해서이다. 독자는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화자와 '함께' 성경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는 겸소한 자기 고백이 아니라, 오만이고 연극이고 '거짓'이라고 이름붙일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를 '문학'이라 이름 붙여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예수님께 하는 '기도'를 모두에게 공개하고, 짐짓 성경 말씀을 모르겠다고 시작해 놓고는, 정작은 다 알고 있는! 이것은 거짓 기도가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재단하기에 앞서, 박완서 선생의 서문을 다시한번 읽어보자. 그는 스스로 고백한다. 자기가 이런 글쓰기가 '봉사'라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오만이었고, 이러한 글쓰기가 자신에게 '봉사'하였다고.
"성서를 여러 번 읽고 묵상한 것처럼 은근히 자랑을 한 게 방금 전인데 성서의 가장 큰 가르침인 겸손을 몸에 붙이기는 아직아직 멀었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저의 교만을 뉘우치오니 주여, 저의 이 회개를 불쌍히 여기소서"(8) 라고.
그렇다. 이 서문 덕택에, 이 책이 오만한 연극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성경을 읽고 잘 이해 안되는 부분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욕망은 이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구조에서 박완서 선생은 계속 글을 써야 했다. 그녀가 처음에 잡은 연극적, 계몽적 구조 자체가 활동한 부분에 오히려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박완서 선생의 화자는 연극적으로 깨닫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연극'이라는 구조 자체가 화자(박완서 선생)을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였으리라.
그래서 일견 연극적이고 계몽적인, 어찌보면 작위적인 묵상을 읽는데도, 재미와 감동이 있었다. 실제 그녀가 글을 쓰면서, 또는 글의 구조에 의해서 '쓰여지면서' 느꼈을 감동을 다시 느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