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1)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

   -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야마시로 무쯔미(山城むつみ),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야마시로 : 가라타니씨의 『트랜스크리틱』은 『군조오』(群像) 4월호에서 완결되었지만, 나는 그 후반부, 특히 그 「맺음말」을 읽고 이 연재 전반부의 칸트론이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과 같은 이전의 맑스론과의 차이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가라타니씨라면 그러한 것은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90년에 나온 이와이 카쯔히토(岩井克人)씨와의 대화 『끝없는 세계』에서는 그 후반부에서 가라타니씨는 코뮤니즘에 대하여 「세계자본주의가 곧 코뮤니즘이다」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을 읽었을 때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투쟁을 말하지 않고, 코뮤니즘과 세계자본주의를 직접 연결하여 말하는 가라타니씨의 표현에는 지금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남았다. 그런데 이번의 『트랜스크리틱』에서는 가치형태론을 기초로 하면서 자본에 대한 저항원리를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전회이며 변모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탐구Ⅰ』 이후의 주장인 「파는 입장」의 논의에 관한 것입니다. 「파는 입장」을 강조한 가라타니씨의 논의는 대단히 자극적이긴 하지만, 그 때 이후 내가 줄곧 의문스럽게 생각한 것은 노동력을 파는 입장이라는 것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노동력을 판다, 예를 들면 실업자가 직업을 찾는다, 여기에도 「파는 입장」 일반에 관계된 목숨을 건 비약이 있는 것이지만, 그 윤리성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원리가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트랜스크리틱』에서는 「사는 입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에서 자본에 대한 투쟁원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것도 대단한 이동이라 생각합니다. 가라타니씨의 경우 논점의 이동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이번의 『트랜스크리틱』의 맑스론의 결론부의 이동은 그러한 것과 차원이 다른 커다란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큰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가라타니 : 야마시로씨로부터 『끝없는 세계』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소련 붕괴의 시기에 썼던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는 소련적인 국가자본주의가 보통의 코뮤니즘 혹은 사회주의로서 생각되었지만, 코뮤니즘은 그런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자본주의의 진전을 통해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페르시아만 전쟁 후에 세계자본주의를 아이러니컬하게 긍정한다는 입장은 그 아이러니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지 긍정밖에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단계에서 지금까지 데리다나 들뢰즈가 갖고 있는 비평성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들뢰즈나 데리다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맑스주의자인 것을 처음 표명한 것이며, 그것을 알지 못했고 또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은 얼치기는 여전히 데리다나 들뢰즈를 운운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80년대까지 래디컬한 의미를 갖고 있던 사상이 90년 이후 그 의미를 상실함으로써 그런 단계에서 나는 새롭게 맑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끝없는 세계」라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종말을 항상 연장시켜 가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운동(자본축적의 운동)은 신용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종교적인 세계와 같습니다. 그렇다기 보다는 종교의 편이 거기에서 온다. 자본축적의 욕동은 물(物)을 갖고 싶다고 하는 욕구나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교환가능성 권리의 축적에 대한 욕동으로 개개의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쾌감원칙의 피안」에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욕동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자본의 운동은 자동적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인류의 과반수가 죽어도 그것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면 실제로 환경오염이나 식량위기로부터 인류의 과반수는 죽겠지요. 그것은 대체로 후진국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은 끝나지 않지만, 그것은 그것에 대항하는 운동이 없으면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은 윤리적인 동기 이외에는 없다. 맑스의 경우도 코뮤니즘의 동기는 윤리적인 것으로 그것은 초기부터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윤리적인 동기가 강하다 해도 자본의 운동 자체에 그 계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는 자본의 운동을 그치게 할 수 없다. 예전은 이렇게 생각했다. 자본의 운동이 노동자계급을 점차 궁핍화시키고 비인간적인 상태로 몰아넣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기로부터의 해방으로서 혁명이 발생한다고. 이것은 공황대망론(恐慌待望論)이나 카타스트로피대망론으로 지금까지도 있는 사고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불황은 자본축적의 발전에서 하나의 과정이며, 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모순을 해소하려고 하며, 그것을 노동자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국가자본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만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양기(揚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과 국가에 어떻게 대항하는가. 그 때 나에게는 아무 것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현상보다도 나쁜 상태로 귀착되어 버린다. 현재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가져온 불평등이나 폐해를 국가적인 재분배에 의해 시정해 나간다고 하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사회민주주의로 유럽제국도 미국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소프트한 국가자본주의이며 자본의 운동을 정지시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시장경제」라는 개념은 그것이 자본의 축적과정이라는 것을 소거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신고전파 경제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기업주체와 소비자주체가 있고 시장에서 생산과 교환이 조정된다고 하는 이미지인 것입니다. 결국 시장경제는 G-W와 W-G라는 교환을 가장 효율적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환이 화폐에 의해서만 행해진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한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결국 G-W와 W-G는 G-W-G'라는 자본의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자본의 운동을 은폐하고 교환이 합리적으로 조정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것이 이른바 근대경제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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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식의 생물학적 뿌리

밤참을 먹으면서 잠시 여유를 부린다고 새로 나온 책들을 검색해보다가 대번에 '필을 받은 책'은 마투라나/바렐라의 <앎의 나무>(갈무리, 2007). 작년 바로 이맘때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가 출간된 바 있어서 벚꽃소식과 함께 '최근에 나온 책들'로 소개한 바 있는데(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857338) 다시 1년만에 그들의 주저라고 할 <앎의 나무>가 마저 출간된 것.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로 출간된 바 있어서 '오래된 새책'에 해당한다. 역자도 같은 것으로 보아 약간 손질해서 다시 낸 듯하다. 물론 제목은 '앎의 나무'로 바뀌었고.

 

 

 

 

소개에 따르면,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구성주의적 관점의 생물학 책"으로 "지은이들은 이 책에서 삶과 앎의 근본과정에 관한 자신들의 체계관을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선보이고 있다. 다윈주의의 영향아래 생물을 객관적인 바깥세계에 얽매여 있는 일종의 '노예'로 보는 종래의 관점과는 달리 이들은 생물의 '자유함'을 다양한 생물학적 지식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거기서 핵심적인 개념이 '오토포이에시스'이다. 나는 작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칠레 출신의 인지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움베르또 마뚜라나; 1928- )의 대담집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이다. 책은 독일어 원저가 2002년에 나오고, 대본이 된 영역본이 2004년에 나왔다고 하니까, 따끈한 책이다. 마투라나는 흔히 동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찍지어서 불리는 이름인데, autopoiesis, 즉 '자기생산' 혹은 '자가생산'의 개념을 창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이미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란 책이 오래전에 소개됐었는데(나도 그 책을 통해서 이름을 처음 접했다), 마투라나는 자기조직 체계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함께 최근에 인문학에서는 부쩍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되었다."

독어판은 영어판과 마찬가지로 1987년에 출간됐고, 영역본의 경우엔 지난 1992년에 개정 3판이 출간됐다. 이번에 나온 국역본 갈무리판은 자작아카데미판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인식의 나무>는 내가 따로 원서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 전작인 <오토포이에시스와 인지>(1980)는 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이다. 추세로 보아 이 책은 내년 이맘때 번역본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07.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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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비정규직 담론은 불평등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 담론비평(2007. 4. 17) 

"비정규직은 불평등의 중심문제 아니다"

 

정이환 교수, '경제와사회'에서 비정규직 편중 담론에 일침

 

리뷰팀 review@dambee.net

 

▲ 부품사 구조조정에 항의하는 모습

기다리던 '경제와사회' 봄호가 출간되었다. 여러 편의 주목할 만한 논문들이 많지만, 그가운데 먼저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의 '기업규모인가 고용형태인가-노동시장 불평등의 요인분석'을 먼저 소개한다. 정 교수는 비정규직 그자체에 집중된 현재의 양극화담론을 송곳으로 예리하게 잘라내서 그 빈틈과 허점을 지적하고 있다.

노동시장 양극화, 그 중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이 불평등의 중심적 문제라는 것은 세간의 상식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 자명한 사실은 아니다. 특히 정책 대안의 실행을 염두에 둘 때에 그러하다. 왜 그러한가.

정 교수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노동패널조사', '사업체근로실태조사' 등의 원자료를 분석해 노동시장 격차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본다. 특히 '고용형태'와 '사업체규모'에 초점을 맞춰서 분석했다. 

그 결과 고용형태와 사업체 규모가 임금격차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둘 중에서 고르라면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보다는 사업체 규모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고용형태보다 사업체 규모가 근로조건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고용형태, 즉 정규/비정규직인가의 여부가 노동시장 불평등의 요인으로 더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해 정교수는 첫째, 기간제 노동자 등 비정규직이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을 든다. 이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고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를 중심으로 노동시장 문제를 보려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둘째, 정규직/비정규직 간 격차는 기업규모 간 격차에 비해 공평성 원리에 더 위배되고 더 심각한 불평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 간 근로조건 격차는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기업 간의 격차로 보여지고, 게다가 한국에는 사회적 표준임금 관행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기업간 근로격차는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는 것.

이에 비해 정규/비정규직 간 격차는 많은 경우 동일 사업체 내에서의 격차이며, 동일한 일을 하는 사람간의 불평등인 경우도 많다. 이것은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 그리고 제3자에 의해서도 부당한 차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기업규모별 불평등이 고용형태별 불평등보다 덜 문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정 교수는 강조한다. 왜냐하면 기업규모별 불평등이 훨씬 클뿐 아니라, 199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업체 내부의 불평등이 사업체간 불평등보다 더 부정의하거나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시장 불평등 문제는 종합적이고 거시적으로 판단되어야 하며 대안도 종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정 교수는 주문한다. 그 대안은 물론 우리 노동시장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영세업체 근로자들을 위한 대책을 충분히 포함하는 것이어야 하며, 기업규모별 격차를 줄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정부나 노동계의 대안은 이들보다는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훨씬 더 잘 조직화, 동원화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영세업체 근로자들은 비정규직보다 더 열악하지만 조직,동원화되지 못하며 사회적 발언도 미약하다. 이에 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양한 방법에 의해 투쟁하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쟁점화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들을 직간접적으로 고용한 대기업에 노동조건 개선요구를 할 수 있다는, 좀 다르게 표현하면 '기댈 언덕'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정 교수는 분석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도 크기 때문에 이들이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은 당연하나, 이것이 노동시장 불평등에 대한 전체적 대안과 잘 결합하지 못하는 경우 일부 비정형 노동자의 조건은 좋아지지만, 노동시장의 전체적 평준화는 잘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정 교수는 일례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경우를 든다. 그들은 지난 수년간 정규직 노조의 대리교섭으로 인해 임금이 빠르게 상승했다. 그 대신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와 사외 부품사 근로자 간의 임금격차는 크게 벌어졌다. 정 교수는 조성재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임금은 사외 1차 부품사에 비해서는 30%, 2차 부품사에 비해서는 51%나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정 교수가 기본적으로 제안하는 대안의 방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정부는 영세업체 노동자들을 위해 근로기준법의 실질적 적용범위를 5인 미만 사업체에까지 확대하고 최저임금 수준을 대폭 올릴 것, 그리고 노동조합은 거시적 관점에서 노동시장 전체적 조건 평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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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개역판 "보르헤스 전집"을 기다리며...

 

민음사 판 보르헤스 전집(전5권)의 번역자인 황병하 씨가 타계한 후에, 아무래도 그냥 정본으로 삼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이 책을 출판사 차원에서 어떻게 좀 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지성이면 감천(?)인지 얼마 전에 <번역은 내 운명>인가 하는 제목의 책을 뒤적이다가, 에스파냐어 번역가인 송병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했다.

  • 나와 보르헤스의 관계는 내가 귀국했던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지금은 폐간된 <외국문학>에서 보르헤스 특집호를 당시 '무명'인 나에게 전격적으로 위임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나는 꾸준히 보르헤스에 관한 글을 출판하고 그의 작품을 번역하며 강의하고 있다. 현재는 민음사에서 출간된 <보르헤스 전집>을 수정, 감수하고 있는데, 보르헤스의 독자들은 곧 새로운 번역본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147쪽)

송병선의 글이 실린 책은 2006년 3월에 나왔는데, 민음사의 개역판 보르헤스 전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과연 언제쯤 나올 것인지, 그리고 과연 어느 정도까지 "수정"이 될 것인지 궁금하다. 송병선의 글을 계속 읽다 보면 보르헤스의 문체에 대한 언급과 아울러 "수정하고 보니 지금 출간된 번역본의 본문과 내가 수정한 판본과는 무려 원고지로 30매 정도의 차이가 났다"는 말과 함께, 지금의 번역본에는 옮긴이 각주가 많이 있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독자들은 보르헤스의 작품에 담긴 서스펜스나 극적인 반전과 같은 서사양식이 아니라, 그의 현학적인 지식에만 관심을 보이며 그가 파놓은 미로에 빠져" 버리기 때문에, 수정본에서는 보르헤스의 현학적 지식을 설명하는 번역 각주를 대폭 빼 버리기로 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솔직히 위의 대목을 읽고 좀 불안했던 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송병선은 보르헤스를 번역하기에는 최상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문체에 대해서는 내가 논할 처지가 못된다. 제아무리 에스파냐어를 잘 안다고 주장하는, 그리고 실제로도 잘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말로 번역된 문장을 보면 십중팔구 "뉘앙스 문제"를 갖고 꼬투리 잡기가 십상이다. 똑같은 우리말을 해도 그놈의 "뉘앙스"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든데, 외국어 소설을 옮기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뉘앙스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될 만한 문제가 아니다. 누가 번역하더라도 아쉬움과 미흡함과 어색함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아쉽지만 새로운 판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도리밖에 없다.(아니면 인터넷 찌질이들의 합창 가사마냥 "차라리 원서를 읽는" 쪽을 택하든가. 근데 여기서 말하는 "원서"를 읽으려면 영어가 아니라 에스파냐어를 배워야 할 거다. 근데 인터넷 찌질이들의 특징은 십중팔구 "영어원서"는 읽는다고 깝죽대도 기타 언어로 된 "원서"는 읽을 수도 없고, 읽으려 노력도 안 한다는 것.)

각주 문제에 관해서는... 물론 보르헤스의 현학적 지식에 지나치게 매달려서는 곤란하다는 그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르헤스의 현학적 지식을 지나치게 가볍게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우리에게는 현학적으로 보이고 어려워 보이고 낯설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보르헤스 본인이 평생 접해 온 지식이고, 평생 생각해 온 내용이고, 평생 기억해 온 고유명사일지 모른다. 그러니 그가 뜬금없이 툭툭 내뱉는 지식이나 내용이나 고유명사 하나하나에 대해서 아예 신경을 안 쓰고 넘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수많은 각주가 보르헤스를 좀 더 잘 이해하는 데까지 독자들을 인도해줄 만한 탄탄대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틴 피에로>에 대한 각주가 없다면, 한국의 일반 독자들이 "끝"이나 "남부" 같은 특이한 단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마르틴 피에로>부터 <새들의 회의>에 이르기까지 보르헤스가 언급하는 작품들이나 사항들이나 이름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에 그의 책을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그 경지는 아마 보르헤스를 오랫동안 읽고 또 강의해 온 송병선 본인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일 것이다.

내가 보르헤스 번역자로서 송병선을 불신하는 것은 일찍이 몇 권의 번역서에서 보여준 그의 "오역" 때문이었다. 그가 보르헤스를 정말로 좋아해서 그러는지 아닌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고 친다면 그로선 참으로 불행한 것이 "열성"은 앞서는지 몰라도 "능력"은 충분하지 못한 듯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에스파냐어는 "전혀" 모르고, 보르헤스에 대해서도 그만큼 잘 아는 것은 아닌 평범한 독자인 내가) 그의 보르헤스 번역을 읽고 참으로 황당함을 느꼈던 그때로부터 무려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므로, 그의 번역 능력이나 보르헤스에 대한 이해에도 뭔가 장족의 발전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좀 불안을 느낀다. 예전에 발견한 그의 "오역"들의 경우, 그건 에스파냐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상식"이 부족해서 생긴 오류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번역을 하면서도 그게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나로선 그가 "문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각주"의 불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 어딘가 불안하기만 하다. 어쩌면 그 "문체"의 독특함을 살리는 데에만 치중함으로써, 정작 보르헤스의 단점인지도 모르지만 큰 매력이기도 한 "현학적 장광설"을 외면하고, 결과적으로는 약간의 노력과 수고만 있었어도 피해갈 수 있었던 오류를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를 읽는 독자로서, 나는 그의 번역서에 좀 장황한 각주가 달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니, 전집과는 별도로 작은 <보르헤스 소사전>을 만들어 이런저런 작품에 등장하는 갖가지 고유명사나 개념을 설명해 두더라도, 역사적인 의미하고는 약간 다른 "백과사전파"인 보르헤스의 성격대로라면 오히려 재미있어 하지 않았을까? 물론 보르헤스가 이런저런 현학적 지식의 총합인 것만은 아니고, 송병선 역시 아마 그런 면에서 보르헤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함을 지적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보르헤스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충분히 "낯선" 작가다. 그가 노닐었던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한 단락이나, 그가 편애했던 유럽 문학의 주요 작가들, 그리고 그가 재미있어 했던 이런저런 책과 개념과 인물들은 십중팔구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그런 문화적, 그리고 "보르헤스적"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이 전혀 없다면, 솔직히 보르헤스야말로 가장 "곡해"되기 쉬운 작가는 아닐까?

뭐, 이미 맡은 것, 이제 와서 송병선 말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개역판 보르헤스 전집이 부디 "최소한의 오역"만으로 간행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보르헤스 정도면 송병선이라는 번역자 한 사람의 능력으로는 모두 커버할 수 없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능한 편집자가 한 사람(가능하다면 여러 사람) 따라붙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냥 교정교열이라는 단순업무 말고도 방대한 "상식"을 지닌 사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보르헤스가 언급하는 이런저런 현학적 지식들의 출전이며 의미며 하는 것을 일일이 따져볼 만한 "객기"를 지닌 편집자가 말이다. 문제는 요즘 나오는 민음사 책들을 보면 "그 정도"의 소양을 지닌 편집자가 내부에 없는 것 같다는 점이지만...

 

아... 표지를 위에 쭉 늘어놓고 보니 좀 짜증 난다. 이번에 개역판 만들 때 표지 좀 어떻게 해 보지?(이 박모 씨 표지는 나랑 궁합이 전혀 안 맞는다. 그중 최악은 <여씨춘추>였다는...)

 

그나저나... 황병하 번역본을 읽으며 종종 이런저런 오역을 발견하고 피식피식 웃기만 했을 뿐, 딱히 정리해 둔 것은 없었는데, 이제라도 보르헤스 전집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가며 오역이나 오류가 의심되는 부분은 정리해 올려야 할까 싶다. 가령 오늘 <픽션들>의 "푸네스"를 오랜만에 뒤적이다가 발견한 오류는, 예수가 처형될 때 쓰인 passion flower 라는 꽃을 "직역하면 <정열의 꽃>"이라고 한 각주다. 이것 참... 상당히 초보적인 오류가 이제 와서 눈에 띄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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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후마니타스 출판사를 소개합니다.

* 개인적으로 '그린비', '휴머니스트'와 더불어 가장 맘에 드는 젊은 출판사인 '후마니타스'에 관한 소개 기사를 옮겨 놓는다. 출판사의 이념, 목표, 지향점등과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 등을 놓고 봤을 때, 그리고 이 출판사에서 기왕에 출판된 책들의 면면을 살펴봤을 때 모든 면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출판사인 것 같다. 앞으로도 좋은 책들 많이 독자들에게 선뵈어 주기를 소망한다.

* 한겨레(2007.  4. 8)  / 맛있는 사회과학 드세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첫 책으로 포문
내는 책마다 한국사회 뇌관 건드려 주목
힘있는 주제 맛있는 문장의 재밌는 책 지향
올해 목표 40종…지식 지형도 그려간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박종식 기자 
» 왼쪽에서부터 편집자 성지희씨, 정민용 대표, 박상훈 주간, 편집자 박후란씨, 안중철 편집장. 이들은 출판사 이름의 뜻이 새겨진 명함을 내놓았다. “후마니타스는 인문학을 뜻하는 라틴어로, 원래는 신에 관한 학문에 대비되는 개념이었습니다.” 이들은 책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회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커버스토리 / “사회과학도 된다” 보여주는 출판사 ‘후마니타스’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위기’는 해묵은 이야기다. 1980년대의 맹렬한 사회변혁 열정과 더불어 빛났던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흥성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기운이 꺾이고 색이 바랬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으로 나누어 보면, 사회과학 쪽 사정은 더욱 침울하다. 인문학은 ‘인문교양’이란 이름으로 가벼운 역사책, 심리책들이 쏟아져 나와 그나마 빈곳을 메우고 있지만, 서점의 사회과학 코너는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다. 찾는 사람이 적다 보니 매대도 줄어 구석으로 밀렸다. 한국 출판의 위기는 엄밀히 말하면,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위기다. 실용서로 치장한 출판 외형은 화려하지만, 그 중핵은 공동화 현상을 빚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사회과학 출판은 내부 붕괴로 끝나고 말 것인가. 그렇게 절망하기엔 아직 상황은 유동적이다. 위기는 가파르지만, 그 위기를 역전시키려는 출판인들의 노력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력하고 역동적인 힘의 지원지 노롯을 하는 곳이 도서출판 후마니타스다.

후마니타스는 2002년 11월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저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첫 책으로 펴낸 이래 최근의 책 <비판적 평화 연구와 한반도>(구갑우 지음)까지 모두 26권을 펴냈다. 5년 동안 26권이면 많다고 할 수 없는 종수다. 그러나 내는 책마다 주목도와 파급력에서 유서 깊은 출판사들의 묵직한 책들을 능가했다. 후마니타스의 책들은 한국 사회의 뇌관을 건드리는 민감한 주제를 품고 있었고, 번번이 폭탄처럼 터졌다. 후마니타스라는 낯선 라틴어 명사는 지식사회의 친숙한 용어가 되었고, 이제 이 출판사의 책들를 에둘러서는 한국 사회의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로버트 달의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이은 최장집 교수의 새 저서 <민주주의의 민주화>, 노동운동가 하종강씨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 한국 진보의 위기를 탐사한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 힘있는 주제, 명확한 서술로 후마니타스의 책들은 우리 사회에 포진한 난점들의 지형도를 그렸다.

이렇게 마그마를 토해내는 출판 화산의 한가운데 박상훈(43) 주간, 정민용(36) 대표, 안중철(35) 편집장을 포함한 13명의 출판쟁이들이 들어앉아 있다. 생긴 지 5년 된 신생 출판사치고는 식구가 적지 않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 출판사도 출발은 소박했다. 최장집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상훈 주간은 학계에 머물기보다는 바깥에서 길을 찾아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결심이 혼자만의 결심이 아니었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던 가까운 후배 정민용, 안중철씨가 뜻을 같이했다. 이들이 ‘도원결의’를 한 것이 2002년 2월이다. 동지가 된 세 사람은 박 주간의 친구 김재선씨가 쓰던 조그만 사무실 한켠에 세들어 출판사 간판을 내걸었다. 얼마 있지 않아 김재선씨 자기 사업을 접고 후마니타스의 영업부장으로 합류했다.

출판사의 진용은 짜였지만, 이들은 출판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정민용 대표가 대학원 시절 아르바이트로 출판 편집과 교열을 해본 것이 경험의 전부였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기획한 책이 나오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해 내내 후마니타스는 본업과는 상관없는 편집·제작 대행을 하며 기본기를 익혔다. “대학 연구소에서 내는 단행본이나 학술지를 만들어주고 학회지도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제작 대행을 해준 게 다 합쳐서 60여종 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었다.” 정 대표는 웃으면서 그때를 회상했다.

편집·제작 대행하며 기본기 익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출판사의 꿈은 컸다. 세 사람은 후마니타스가 만들 책들의 모습을 미리 그려 선언문으로 간직했다. “도서출판 후마니타스는 사회성이 강한 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 개인의 실존적 문제가 실종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사로서 후마니타스는 말과 글을 다룹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논리와 그 기초 위애서 만들어진 제도들이 결국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스스로 돌아보려 합니다.”

후마니타스라는 브랜드를 단 첫 책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대단한 사회적 주목을 받았지만, 그 후로도 한동안 이 출판사의 주력사업은 제작 대행이었다. “2004년 말쯤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그 한 해 동안 만든 책이 26종이었는데, 그 가운데 우리 이름을 단 책이 단 4종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 식구들과 난상토론 끝에 제작 대행을 확 줄이고 출판으로 정면 승부하자고 뜻을 모았다.” 박상훈 주간의 말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외국 책 판권을 사들이고 변역을 맡기고, 기획을 강화했다. 사실상 재출발이었다. 그 재출발의 결과가 지난해부터 나오기 시작한 굵직한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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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7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4-18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여기 일도 하세요? 출판하시는 분들, 지식 유통, 생산에 중대한 역할을 하시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