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아줌마, 앞집 아저씨가 만든 '희망세상'
  <박원순의 희망탐사·10>부산 반송동 사람들
  2007-05-11 오전 11:21:04
  '희망세상'을 만든 반송사람들
  
  부산의 반송동은 꽤나 유명한 마을이다. 여러 신문이 앞 다퉈 이 마을을 소개했으며, 행자부와 국가균형발전위는 대한민국 지역혁신 박람회를 통해 반송마을을 '살기 좋은 마을'의 대표적 사례로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 3월에는 건교부가 추진하는 '살고 싶은 시범마을'로 선정됐다.
  
  그러나 반송동은 넉넉하지 않은 마을하다. 집값도 높지 않고 임대아파트들이 밀집해 있다. 그 넉넉지 않은 마을의 구석구석은 그보다 더 값진 넉넉한 인심과 사람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가득 메운다. 그래서 반송동은 유명한 마을이 됐다.
  
  반송마을의 저력은 높은 집값이나 대단위 공단이 아니라 반송동 주민들로 이뤄진 마을 공동체 '희망세상'이다. 전국에 수많은 마을 가운데 하나였던 반송마을을 지역주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전국의 마을과는 또 다른 최고의 브랜드 '반송마을'을 만들어낸 그들을 찾아 부산에 갔다.
  
▲ 도시에서도 아름다운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반송동 사람들. ⓒ희망제작소

  어려움에서 나온 진한 애정, 마을을 바꾸다
  
  그들은 달랐다. 눈빛이 달랐고 푸릇한 삶의 향이 그득했다. 희망세상의 5평 사무실을 가득 메운 희망세상 전 회장인 고창권 해운대구 구의원과 김형도 회장, 김혜정 사무국장, 석연실 총무간사, 정화헌 행복한 나눔가게 팀장, 김태성 좋은 아버지모임 기획홍보팀장, 김선미 운영위원 그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반송마을을 생기 가득한 마을로 바꿨다.
  
  반송마을은 지난 60~70년대 부산시 곳곳에서 철거된 판자집 주민들이 단체로 이주한 마을이다. 소외되고 지역주민 사이에 패배감과 소외감이 팽배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다들 돈 벌어서 이 마을을 뜨려는 꿈을 안고 살았다.
  희망세상의 전신인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든 고창권 의원은 9살 때 이곳으로 이사 왔다.
  
  "나 또한 어릴 때 어려운 형편에 이곳에 왔어요. 나중에 의대를 졸업하고 다시 여기에 돌아와 개업해 활동하면서 고향과 다름없는 이곳을 사람들이 뜨길 바라는 마을이 아닌 살고 싶어하는 마을로 바꾸고 싶어졌어요. 몇 사람들이 의기투합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98년 만들어진 것이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다들 어려웠기에, 다들 이곳을 뜨고 싶어 했기에 반송마을에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이곳을 뜨고 싶어 했던 주민들이었다는 것은 그들 속에 '왜 우리가 사는 마을은 이럴까', '우리 마을은 달라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 반송마을에 대해 애정도 더 클 수 있었던 거죠. 지금까지는 그럴 계기가 없었던 거예요. 조금씩 달라지는 마을의 모습을 보면서 '아, 우리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용기를 다들 얻게 됐어요. 주민들이 점차 탄력을 받았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우선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소모임이었다. 마을 신문이 발행되는 한편 여러 행사가 벌어져 주민의 화합을 도왔다. 제일 먼저 조직된 소모임이 '함께 나눔반'이었는데 노인과 소년소녀가장들을 위해 밑반찬을 만들어주는 봉사모임이었다. 반송마을에 영세민 임대아파트가 집중되어 있어 3000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가장 필요한 일들을, 지역주민들이 먼저 찾아 한 것이다.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자녀교육반, 영아반도 만들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좋은 아버지 모임'도 만들었다.
  
  주민이 모두 볼 수 있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어린이날에는 지역의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잔치도 벌이는데 주민들이 몇만 원씩 낸 돈으로 이뤄지는 일이라 어렵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역주민 6만 명 가운데 1만 명이 넘게 참여하는 마을의 큰잔치가 됐다.
  
  옆집 아줌마, 앞집 아저씨가 운영하는 희망세상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시작한 지 6년이 넘으면서 반송을 넘어 부산 전역으로 확대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운영진들도 좋은 모임들이 부산 전체로 확대되면 좋겠다는 판단을 하고 '희망세상'이라는 새 이름을 달고 부산 전체로 활동을 확장했다. 함께 하는 지역이 넓어지고 사람들이 많아진 만큼 그들의 활동 또한 더욱 다양해졌다. '행복한 나눔가게'와 '느티나무 도서관'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 반송동 사람들의 생활나눔터가 되고 있는 '행복한 나눔가게'. ⓒ희망제작소

  사람들이 상시적으로 활동하는 고리를 만들고자 설립한 '행복한 나눔가게'는 헌 물건을 기부받아 판매하는 재활용 가게로 수입금은 어린이 지원사업에 쓰고 있다. '느티나무 도서관'은 그저 책만 있는 도서관이 아니라 주부들로 구성된 도서팀을 두어, 어린이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학습여행을 함께하는 등의 적극적 활동을 벌인다.
  이웃들이 이웃에게 벌이는 행복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따뜻한 활동에 힘입어 희망세상의 회원도 늘어났다.
  
  김형도 회장은 "회원도 적고 회비도 들쑥날쑥 했는데 지금은 200여 명의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회비를 내고 있어요. 많지 않은 숫자지만 결코 적지 않지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 덕에 전에는 상근 주부들에게 전혀 지원을 못했는데 요즘은 반찬값이라도 주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사무국에는 사무국장을 포함하여 상근자가 3명이 있다. 모두 이 지역에 사는 주부들이다. 17명의 운영위원도 길거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는 지역주민들이다.
  
  "저는 빵집 아저씨였어요. 너무 멋진 일 아닌가요? 런닝에 슬리퍼를 신고 마을 앞에서 인사 나누던 옆집 아저씨와 앞집 아줌마, 뒷집 총각이 마을을 새롭게 바꾸는 이 기적 같은 일을 진행할 회장이 될 수 있어요."
  
▲ 희망세상 회장 김형도 씨. ⓒ희망제작소

  '빵집아저씨' 김형도 씨의 말에 자부심이 가득 묻어난다. 이유 있는 자부심이다. 실제로 지역에 뿌리를 받고 살아가던 평범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학습과 실천을 통해 지역운동가가 되고 있다. 북한 핵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FTA는 무엇인지, 간부가 되려면 어떤 품성을 가져야 하는지 등을 공부한다. 소모임이나 단체운영은 어떻게 하는지, 지역주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하는 등의 방법도 배운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10년을 그리다
  
  희망세상이 탄생한 지 10년이 되어간다. 지난 10년의 성과도 있고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각오도 있다.
  
  김형도 회장은 "주민자치위원회의 이름으로 '청소년선도자율방범단'을 운영하면서 마을 순찰을 도는 등의 활동을 벌이는데 실제로 청소년 범죄율이 줄었어요. '소년분류심사원'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입소 청소년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하더라고요. 믿기세요? 다른 지역에서도 그런 방범단을 운영하겠지만 저희는 다른 활동과 아울러서 하니깐 아무래도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신뢰를 갖고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이런 수치적 변화와 더불어 반송마을을 다루고 있는 언론의 보도들, 중앙정부에서의 다양한 지원책과 시범마을 등으로의 선정 등은 그들의 지난 10년의 성과를 말해주는 것이다.
  
  성과의 크기만큼 앞으로의 각오도 단단하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벌이는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지원사업'의 반송지역 프로젝트 조정을 맡고 있는 이승훈 씨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반송지역학교를 새롭게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놓는 것보다는 실질적으로 아이들을 지원하고자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여기에 희망세상의 '희망의 사다리운동'이 함께 한다.
  
  '희망의 사다리운동'은 밥을 굶거나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거나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없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고 하는 마당에 모든 아이가 사랑받게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먼저 들지만, 그래도 희망세상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쓸데없는 나무토막도 연결되면 훌륭한 사다리가 되잖아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지역과 지역이 만나면 불가능한 일은 없지 않을까요? 교육부의 지원은 5년이 지나면 끝나는데 벌써 4년차가 됐어요. 하지만 교육복지사업은 계속되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희망의 사다리운동을 생각하게 됐어요." 김형도 회장의 설명이다.
  
  "우선은 학교를 넘어서서 지역교육공동체를 만들려고 해요. 마을 전체가 하나의 학교, 마을 사람 모두가 교육자가 되는 거죠. 이렇게 하면 복지정책과 교육정책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어요. 또 교육부 사업으로 인한 성과를 지속시키고 자생력을 기르기 위해 별도의 회원체계를 운영하는 데에 단 몇 천 원씩이라도 내는 사람들이 300여 명으로 늘어났어요. 정부의 예산은 경직성이 있지만 이렇게 모여진 돈은 가정과 얽힌 복잡한 문제로 둘러싸인 어린이들을 유동적으로 지원하는 데 효과적이죠. 지역사회가 학교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왔고, 앞으로도 이 사업에 주력하고자 해요."
  
▲느티나무 도서관. ⓒ희망제작소

  자랑스러운 명함, "희망세상의 회원입니다."
  
  희망세상은 이렇게 지역사회를 바꿔나가고 있지만 그곳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먼저 바꿔놓았다. 사람을 바꾸는 일, 진정성이 없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김선미 운영위원은 희망세상을 두고 '나의 종교'라고 표현한다.
  
  "평범한 주부였죠. 그런데 희망세상을 만들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풍물을 배웠고, 선거운동도 했고, 명함도 생겼어요. 마을신문의 편집부 일을 하는데 사진도 찍고 글을 쓰기도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이 절을 찾아 또는 교회를 찾아 잘못을 반성하고 앞날의 각오를 다지듯 제게 희망세상이 그래요. 일을 하다 보니 봉사가 무엇인지 알겠어요. 작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이 내 앞에 열려 있으니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고요. 여기에서 일하면서 어엿하게 성장한 저를 발견합니다."
  
  김선미 씨가 가지고 있다는 명함은 그럴싸한 직책이 쓰여 있는 그렇고 그런 명함이 아니다. "희망세상의 회원입니다"라는 자부심 넘치는 명함이다.
  
  사무실을 나와 그들이 해 온 일들을 곳곳을 다니면서 소개받았다. 동네 주변은 주민들이 직접 만든 벽화로 갤러리가 따로 없었고, 아파트 뒤 작은 언덕은 나무와 야생화가 가꿔진 아이들의 학습장이 되었다. 그냥 스쳐지나갈 만한 구석구석에도 그들이 함께 한 값진 경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 속에서 제일 중심은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을 주민 모두가 공감하며, 활동가들의 다양한 활동의 중심을 지나는 궤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었다. 마치 지역 활동의 동력이 바로 가족에게 있었듯이 말이다.
  
▲ 반송동 사람들. 뒷줄 왼쪽부터 김태성 고창권 김형도 (필자를 건너 뛰어) 이승훈 정화언 씨. 그리고 앞줄 왼쪽부터 김정숙 김혜정 송정숙 김선미 석연실 씨. ⓒ희망제작소

  
면담일시 -2006년 10월 17일 오전 11시
  
  면담장소 -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2동 77번지
  
  면담인사 - 고창권(해운대구의회 의원. 전 회장.의사) 김형도(희망세상 회장) 김혜정(희망세상 사무국장) 이승훈(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지원사업 반송지역프로젝트 조정자) 석연실(희망세상 사무국 총무간사) 정화언(희망세상 행복한나눔가게 팀장) 김태성(희망세상 좋은아버지모임 기획홍보팀장) 김선미(희망세상 운영위원.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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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도덕 비판의 도덕’에 관한 연구

박종균(한남대 전임연구원)


1. 들어가면서


   니체는 도덕을 오직 비판하고 파괴하려고만 했는가? 아니면 도덕의 비판에 대한 새로운 도덕을 정립시키려 했는가? 이러한 논쟁은 지금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의 권위 있는 니체 해석가들은 니체가 비록 도덕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가치를 옹호하고 있는 바 그것을 도덕적 가치로 여길 수 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즉 니체를 도덕 비판의 도덕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카우프만(Walter Kaufmann)같은 학자는 “승화”(Sublimierung)의 개념을 통해 이를 논증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니체의 힘에의 의지, 즉 충동들간의 세력다툼이 의미하는 바는 동물적 본능의 무차별적인 발산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니체는 『서광』(Morgenröte)에서 “자기억제와 순화 및 그것의 마지막 동기”라는 제목의 긴 아포리즘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1) 이를 통해 카우프만은 니체에게서 나치주의의 혐의로서의 초인(Übermensch) 사상2)을 벗겨내고 니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것은 반정치주의자로서의 니체, 철저한 개인주의자로서의 니체를 말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관련해서 “자기극복”을 통한 “자기만족”이라는 개인적 가치를 지향한 도덕주의자로서의 니체의 상이 새롭게 부상한다. 샤츠키(Theodore Schatzki) 역시 카우프만의 개인주의 해석을 따르면서, 니체의 관점을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순응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주의적 윤리학”3)이라고 부른다. 누스바움(Martha Nussbaum)도 비슷한 입장에서 니체는 “자기지배와 자기계발이라는 스토아적인 가치의 부활”4)을 추구했다고 보면서 니체의 주장을 스토아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게어하르트(Volker Gerhardt)도 니체는 “미래의 도덕”, “비도덕주의자 또는 자유로운 정신들을 위한 도덕”, “비도덕주의의 개인적 도덕”을 주장했다고 해석한다. 즉 니체가 솔직성, 진실성, 책임성, 독립성 등과 같은 가치들을 옹호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니체가 도덕적 요구를 포기했다는 주장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견해이다.5) 야스퍼스도 같은 맥락에서 니체의 보다 높은 인간형에 대한 요구는 그 자체로 도덕적인 요구라고 지적한다. “새롭고, 더 높으며 미정의 도덕, 그것은 ‘창조자의 도덕’이다. 이것이 니체에 의해 형상을 물론 내용에 따라 말해진 것이다. 모든 가치의 창조적 재평가는 이 새로운 ‘도덕’을 초래한다.”6) 톤게렌(Paul van Tongeren)역시 게어하르트와 비슷한 입장에서 니체의 도덕비판이 어느 정도로 도덕적․규범적으로 동기부여 되었는가를 논의한다. 그에 의하면 니체의 도덕비판의 도덕, 다시 말해 도덕적 이상은 삶을 권력의 의지 즉 투쟁으로 이해하고 이 투쟁이 종료되려고 할 때, 투쟁을 요청하고 그것을 강화시키려는 “투쟁의 도덕”이라는 것이다.7) 


   이상에서 살펴본 견해를 종합해 볼 때, 니체는 그의 철저한 도덕비판에도 불구하고 도덕비판의 도덕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논의가 전혀 억견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니체가 옹호하는 가치를 도덕적이라고 보는 견지에서 논의가 전개될 것이다. 2장에서는 니체의 도덕에 대한 계보학적인 분석을 통해 도덕적 가치의 유래를 고찰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니체의 도덕 비판의 방법론을 이해하고자 한다. 3장에서는 니체가 작업한 도덕의 보편성과 절대성에 대한 비판의 양상과 철저한 비판의 이유를 개인적 삶과 문화의 문제와 연계시켜 논의할 것이다. 4장에서는 니체의 도덕 비판의 도덕, 즉 새로운 도덕을 정립하기 위한 원리가 무엇인지를 고찰할 것이다. 니체가 도덕 비판을 통해 진정으로 의도하는 것이 단순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였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의 ‘모든 가치에 대한 가치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는 새로운 가치 창조라는 견지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니체의 새로운 도덕이 오늘의 현실에 어떤 의의를 갖는가를 논의함으로써 결론을 맺고자 한다.


2. 도덕의 계보학

   니체는 근대와 함께 시작된 보편성으로부터의 이탈을 “신의 죽음”으로 극화한다. 신은 곧 보편성을 뜻한다. 니체가 보기에 신을 믿지 않는 현대인들조차 신의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현대인들은 오히려 대용품으로서의 신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거짓 무신론자”였던 셈이다. 특히 도덕은 무신론자들의 신의 대용품이다. 이점에 대해 야스퍼스(Karl Jaspers)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계몽의 과정을 통해 신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 동안의 문명화 과정을 통해 그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외부적 존재(궁극성) 없이는 살 수 없도록 길들여져 왔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에 회의적인 사람들도 그들의 삶의 의미를 부여받기 위해 도덕의 자명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8) 또한 베르그만(Frithjof Bergmann)은 모든 도덕적 표현은 근본적으로 신학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유죄’, 도덕적인 의미에서 ‘책임성’, 도덕적인 의미의 ‘그릇된’ 또는 ‘악’ 등과 같은 용어의 완전한 의미는, 그것들이 신에 대한 믿음과 분리된다면, 파악될 수도 재 진술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것들은 세속화될 수 없는 신학적 언어의 일부인 것이다.9)


   바로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신을 떠나 보내는 사람은 도덕에 대한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한다”10)고 말한다. 신을 추방한 근대인들은 그 허전함을 도덕으로 메우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니체에게 도덕적 가치의 유래11)에 대한 물음은 가장 우선적인 질문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정초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2)


   그렇다면 도덕적 가치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도덕적 가치는 인간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역사단계에서 어떤 특정한 유형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가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이러한 방법을 “계보학”이라 일컫는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을 찾자마자 그 원인에 대한 원인을 묻는 습관이 있다. 기원에 대한 연쇄적 질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존재 즉 신의 도입을 초래한다. 계보학은 이러한 접근 방식을 거부한다. 계보학은 사건의 발생 시점에서 시작하여 그것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봄으로써, 그 사건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존재의 출현을 막아낼 수가 있다. 더욱이 그것은 그 사건의 발생의 시점에서의 필연성을 부정함으로 해서, 지금까지 그것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지배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고도의 정치 권력의 문제와 연계되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에서 계보학을  자연과학적 의미에서의 “역사적 철학”(형이상학적 철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이라고 부른다. 니체는 계보학을 통해서만 “날카롭고 중립적인 눈에게 더 나은 방향, 즉 실제적인 도덕의 역사에 대한 방향을 제공할 수 있다”13)고 믿었다. 그리하여 니체는 지금까지의 철학의 오류는 특정한 시대에 한정된 개념을 영원한 것이라고 믿는데 있는 것이며, 모든 개념은 되어진 것, 특수한 역사적 상황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되어진 것이다. 영원한 사실들이란 없다. 절대적인 진리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따라서 역사적으로 철학하기가 지금부터 필요하고, 그와 더불어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14)


   계보학은 도덕으로부터 벗어나, 도덕의 생성근거를 살펴봄으로써 도덕을 비판하고자 하는 니체의 방법론이다. 니체는 자신의 이러한 의도를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유럽적인 도덕성을 저 멀리서 한번 알아보기 위해서, 그것을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다른 도덕성들에 견주어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한 도시의 탑들이 얼마나 높은가를 알고자 하는 나그네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는 이를 위해 도시를 떠난다. 편견에 대한 편견이 되지 않고자 한다면 ‘도덕적 편견에 대한 사고’는 도덕 바깥의 한 위치, 즉 사람들이 올라가고, 기어오르며, 날아가야만 하는 선과 악의 저편 어딘가를 전제한다.15)


   그런데 도덕을 떠나 도덕을 조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도덕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도덕에 길들여져 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제 이를 악물자! 눈을 부릅뜨자! 조정키를 단단히 붙잡자! - 우리는 도덕의 바로 위를 넘어 항해하고 있다. 이 방향으로 항해를 감행함으로써, 우리는 도덕성이 되어버린 우리 자신의 몸뚱이를 억누르고 갈기갈기 찢을지 모른다”16)라고 하면서 도덕을 떠나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것인가를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계보학은 도덕으로부터 벗어나서 도덕을 비판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Gill Deleuze)는 계보학의 비판적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보학은 기원의 가치와 가치의 기원 둘 다를 뜻한다. 계보학은 상대적인 또는 공리적인 가치들에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가치들에 반대한다. 계보학은 가치 자체가 파생되는 가치들의 요인들이 다름을 보여준다. 계보학은 따라서 기원 또는 탄생을 의미하지만 기원에서의 차이 또는 거리를 또한 의미하기도 한다. 계보학은 기원에 있어서 고귀함과 저속함, 고귀함과 천박함, 고귀함과 데카당스를 뜻한다. 고귀함과 천박함, 높고 낮음 - 이는 정말로 계보학적이고 비판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해되면 비판은 역시 그것의 가장 명확한 속성이다.17)

   니체는 어원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선”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규명한다. 이에  따르면 “선”이란 개념은 모든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고귀한(vornehm)귀족적인(edel), 정신적으로 우월한 등의 표현에서 파생했으며, “나쁨”이란 개념은 천민적인(pöbelhaft), 저급한(niedrig), 비천한(vulgär) 등의 표현에서 파생한 것이다.18) 그런데 이때의 “나쁨”은 “악”이란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좋음”과 “나쁨”은 단지 타고난 성격을 지칭할 뿐이지, 찬양되거나 폐기되어야 할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한 것이며, 원래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지는 자연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좋음”과 “나쁨”이란 개념의 유래를 정치적 또는 계급적으로 해석한다. “정치적인 우월 개념이 늘 정신적인 우월 개념을 초래하는 규칙에는 예외가 없다.”19)

 

은혜를 은혜로서, 원수를 원수로서 보복할 힘을 가지고, 또한 그것을 실제로 행사하는, 즉 감사할 것이 있고 보복심이 강한 사람은 좋다라고 불려진다. 반면에 무력하고 보복할 수 없는 사람은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 . . 좋은 사람들은 소수의 계층이고 나쁜 사람들은 먼지와 같은 대중들이다. 좋고 나쁜 것은 오랫동안 고귀하고 저속한 것, 주인과 노예와 같은 것이다.20)

 

   그런데 사회적 신분과 특성을 의미하던 말인 좋음과 나쁨의 관념이 어떻게 전혀 다른 가치들인 선과 악으로 대체가 되었는가? 이는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것의 과정은 원한(Ressentiment)을 통해 성립하는 바, 그것은 약자에 의한 심리적 과정으로 실제적인 아닌 상상적인 혹은 정신적인 복수로 그들 자신을 보상하면서 이루어진다. 즉 노예는 귀족의 힘과 권력을 두려워한다. 그는 무기력하여 주인의 자리를 차지할 힘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 무리의 가치가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 귀족을 극복하려고 한다. 따라서 귀족에게서의 좋음과 노예의 좋음은 매우 다른 양상을 띠게 되는데, 귀족적 인간은 그 개념을 자신에게서 고안해 낸 후 반대 개념을 생각해 내는 데 비해 노예는 상대의 가치를 먼저 나쁜 것으로 정한 후 자신을 그 결과를 평가한다. 그 결과 주인의 덕이라든지 힘은 죄가 되며 자신들 무리들의 덕목을 선으로 여기게 된다. 단순한 성격을 지칭하던 “나쁨”이 이제 드디어 증오의 대상으로서의 “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빈곤한 자들만이 선한 사람이다. 가난한 자들, 천박한 자들만이 선한 사람이다. 고통받고 있는 자들, 결핍된 자들, 병든 자들, 추악한 자들만이 경건한 자들이고, 신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다. 은총은 그들에게만 있으며, 반대로 너희, 너희 고귀한 자들, 강자들, 너희들은 영원히 약하고, 잔인하고, 탐욕스러우며, 만족할 줄 모르고, 신을 모르는 자들이다. 너희들은 또한 영원히 은총을 바지 못하고, 저주받으며, 낙인찍힌 채로 존재할 것이다.21)


   이렇게 “노예적” 가치판단의 배후에는 무력하고, 저급한 다수의 대중들이 소수의 지배계층에 대한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다. “도덕적 판단과 편견은 정신적으로 편협한 사람들이 덜 그러한 사람들에게 즐겨 행하는 복수인 동시에, 그들이 자연에 의해 나쁘게 배려된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22) 요컨대, 도덕은 나약한 자들의 강한 자들에 대한 “정신적인 복수행위”로서 그 성격상 도덕에 있어서 “노예 반란”(Der Sklavenaufstand)이 성공한 결과이다.23) 그러나 이러한 노예들의 가치반란도 그 자체가 창조적이 되어 가치를 산출한다는 점에서는 힘에의 의지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24) 단지 그것이 열등한 자들의 가치를 보편화시키고 절대화함으로써 삶을 부패시킨다는 점에서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모든 선한 것들은 전에는 악한 것들이었다.”25)


3. 도덕 비판과 문화의 타락

   니체는 차이성과 다양성을 묵살하고 극단적인 평등으로 몰고 가는 도덕의 보편성과 절대성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가한다. 먼저 도덕의 보편성에 대해서, 도덕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가치가 아니라, 특수한 역사적 시기의 특수한 계급에 의한 특수한 가치판단에 불과하다.26)  니체에게 있어 도덕은 사회적으로 보자면 특정한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관습체계(das System der Sittlichkeit)에서 기원한다. “윤리(Sittlichkeit)란 어떤 종류의 관습이든 간에 관습에 대한 복종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관습(Sitten)은 그러나 습관적인 행위와 평가방식이다.”27) 그리고 “도덕은 공동체를 어떤 수준, 어떤 질로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이다.”28) 즉 관습은 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것, 해가 되는 것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나타내며 그 관습은 세월이 흐르면서 공정화, 불변화 되면서, 관습의 기원은 차츰 망각되고 관습의 외면적 형식은 보다 공고해진다. 관습으로서의 도덕은 관습 그 자체가 도덕이 되었다는 것보다, 그것에 대한 복종의 감정에서 도덕이 연유했음을 말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우리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복종하는 고도의 권위”29)가 도덕이다.


   따라서 관습에서 유래한 도덕은 보편 타당한 원리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집단이 개인을 굴복시키기 위한 강요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강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로운 복종, 거의 본능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그것은 쾌락(Lust)과 결부되어 그 때부터 미덕(Tugend)으로 불리게 된다.”30)   


   니체는 도덕의 보편성 비판에 이어 도덕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있다. 즉 니체에게 있어서 도덕은 어떤 절대적, 신적 영역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모든 다른 현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도덕은 한 개인 속에 존재하는 여러 충동들 가운데 한 충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 점에서 “도덕에 있어서 인간은 분열되지 않는 자기(Individuum)가 아니라 분열적인 자기(dividuum)로서 행동한다”31)라고 말한다. 분열적인 자기(dividuum)는 도덕의 절대성뿐만 아니라, 도덕의 전제라고 할 수 있는 인격의 통일성마저도 부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 파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32) 니체는 “한 도덕에의 의지는 따라서 이 도덕에 짜 맞추어진 성품의 다른 종류의 성품들에 대한 독재(Tyrannei)로 판명된다. 그것은 파괴이거나 지배적인 것을 위한 단일화이다.“33)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도덕은 절대적일 수 없다. 니체가 모든 도덕은 거짓, 오해 또는 왜곡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절대성이란 거짓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34) 그리하여 그는 ”도덕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 도덕은 어떤 현상들에 대한 의미부여(ausdeutung)에 불과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잘못된 의미부여(Missdeutung)이다.“35) 즉 니체에게 절대적인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이 불가능하고 허위적인 것이라면, 니체가 그토록 철저하게 도덕을 비판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도덕이 거짓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도덕이 삶을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양한 충동(본능)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충동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도덕의 지배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충동들은 악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충동들은 억압될 뿐이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정신의 병이다. 왜냐하면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충동들은 안으로 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가 “양심의 가책”을 “깊은 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아주 심한 병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없어도 될 마음 속 깊이에 존재하는 병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36) 그가 그의 저작 곳곳에서 도덕을 ‘삶을 부정하는 가치’로서 평가하고 있는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 도덕에 길들여진 삶이 늘 부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삶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기 때문이다.37)


   도덕은 이처럼 한 개인의 삶만을 부정하고 억압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어떤 도덕을 유일한 가치기준으로 삼게 됨으로써 인간적 삶의 풍요로운 터전인 문화의 타락이 초래케 된다. 니체가 노예 도덕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이를 상징화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도덕은 노예의 문화이다. 예컨대 고상한 근대의 자유주의 이념이나 민주주의 정치체제, 자본주의 경제체제 역시 노예적 도덕에 기초한 정치 이념이나 체계에 다름 아니다.


   정치에서의 노예 반란의 성공 즉, 자유주의의 등장은 모든 인간에 대한 자유와 평등38)의 보장이라는 정치 이념을 실천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니체는 이를 약자들의 자유와 평등일 뿐이며,39) 이러한 사상을 기초로 한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국가의 타락된 형태라고 비판한다.40)

 

자유주의적 제도들은 그것이 완성되자 마자 자유주의적이길 멈춘다. 이후에 자유주의적 제도들만큼 지독하고도 근본적으로 자유를 손상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이 완수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도 남는다. 자유주의는 힘에의 의지를 저해한다. 그것은 도덕으로 승화된 산과 계곡의 평준화다. 그것은 사람들을 왜소하게, 비겁하게 그리고 향락적으로 만든다. 그것과 더불어 군집동물이 늘 승리한다. 자유주의 그것은 독일어로 가축 무리화(Heerden-Verthierung)이다.41)

 

   근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인류의 진보가 아니라, 니체가 보기에 그것은 “노예 도덕의 승리”, 곧 “인류의 퇴보”이자, “인간의 치욕”이었다. 니체가 이와 같은 노예문화 속에서의 삶을 쇠퇴한 삶, 유약한 삶, 피곤한 삶 등으로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니체는 또한 근대사회의 산업화의 결과로 나타난 비인간화, 인간의 왜소화(기계의 나사 같은 존재), 자본화와 물신주의의 현상으로서의 화폐를 통한 노예화, 인간 및 일상생활의 정치화 문화영역에서의 야만화를 비판한다. 기계노동에서 인간은 점차 내적 감각의 불모성, 즉 비인격성과 비주체성(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한 정신적 자각의 결여), 비인간성(자기 자신의 내면적․도덕적 가치에 대한 결여)과 익명성(이름 없는 대중으로의 자기 도피)을 경험한다.42) “삶은 이러한 비인간화된 구동장치와 기계주의에서, 노동자의 비인격성에서, 그리고 노동분화의 잘못된 경제학에서 병든다. 목적은 사라져가고, 문화 수단은, 근대의 학문적 운용은 야만화된다.”43) 화폐가 세속화된 힘으로 나타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삶의 가치는 화폐 획득과 소비를 통해 규정된다. 화폐에 대한 물신주의가 완전히 삶을 장악할 때, 그 외의 모든 가치들은 경제적 가치에 종속된다. 니체는 물질적 부에 대한 욕망과 병행해서 영혼의 빈곤이 진행되고 있음을 직시한다. “그들[쓸데없는 인간들]은 부를 얻지만 그로 인해 더욱 가난해 진다. 그들은 권력을 탐내며 먼저 권력의 보루인 많은 돈을 탐낸다. 이 무능한 사람들은!”44) 이러한 가치가 지배하는 곳에서 인간 영혼의 자기소외와 문화적 타락이 이루어진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황금화 되고 지나치게 치장한 천민”45)이 되는 것이다.


4. 도덕 비판의 도덕

   이상에 본 바와 같이 니체는 도덕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도덕 비판은 새로운 가치 정립을 위한 토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다른 사유의 태도를 요하며 인간을 보는 입장에서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필요로 한다. 또한 모든 부정과 전복은 긍정을 위한 조건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하며, 또한 이러한 긍정은 모든 가치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창조하는 자 외에는. . . 그런데 창조하는 자란 인간의 목표를 창조하고 대지에게 그 의미와 그 미래를 부여한 자이다. 이러한 자들이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창조한다.46)

 

   가치가 인간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도덕기준을 설정하는 것, 이것이 니체가 시도하는 가치전도의 핵심일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모든 부정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에서의 긍정으로 유도되며 그의 비도덕주의는 비인간적 도덕을 극복하는 도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삶을 위해 세계를 해석하고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문화 생활을 영위한다. 단순히 삶을 영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의 자신 이상이 되기 위해 소유하고 의욕하며 생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확보되는 것이 가치라고 할 수 있는데, 니체는 가치에 대해 “가치라는 관점은 생성 과정 속에 나타나는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복잡한 형성물에 관한 보존, 상승의 조건에 관한 관점”47)이라고 말한다. 즉 가치는 생성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과 생성이라는 것은 니체 사유에서 삶이며 삶은 곧 힘에의 의지의 표현으로 사유되어진다. 그렇다면 힘에의 의지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 성격이며 이 힘에의 의지가 있는 곳에는 어디서건 그것의 고양을 위해 조건을 정립하는 방식으로 가치가 존재한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가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기존하던 최고 가치들의 근저에 존재하는 힘에의 의지는 기존의 가치들의 전복의 원리가 되는 힘에의 의지와는 다르다. 지금까지 가치체계에서 인간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던 것은 선한 이상과 덕목들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통해서 선한 인간이 되려는 의지는 힘에의 의지이기는 하지만 이는 이상들이 힘을 갖게 하고 자신은 무기력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도덕을 숭배하는 선한 인간은 그 가치의 근원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이 가치를 무조건적인 것으로 정립하기 때문에 힘을 목표로 하는 인간의 가치평가로부터 가치가 유래한다는 사실이 은폐된다. 그래서 가치들이 그 자체로 존재한 것인 양 믿게 되고 이 가치는 초월적인 것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분명 힘에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지만 이는 힘에 대한 무기력한 포기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새로운 도덕을 위한 원리로서의 힘에의 의지는 성격을 달리한다.

 

자연을 지배하고 힘을 획득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를 지배할 어떤 힘을 획득하는 일. (도덕은, 자연이나 야수와의 투쟁에 있어서 인간을 관철하기 위해 필요하였다.) 자연을 지배할 힘을 획득하는 일을 마쳤다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자유로이 계속 형성하기 위해 이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기 향상(Selbsterhöhung)과 강화(Verstärkung)으로서의 힘의 의지 말이다.48)

 

   이제 힘에의 의지는 힘의 본질로써 모든 것을 평가하는 유일한 평가기준이 되며 모든 것은 그에 비추어 가치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힘에의 의지의 원리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긍정으로서의 도덕이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마땅히 추구해야할 바를 과도하게 강요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데에서, 바로 인간의 삶은 왜곡된다. 인간 내부에 있는 제 충동은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고정된 대립은 없는 것이다. 이를 기꺼이 인정하는 가운데서 삶을 바라보게 하는 것, 이것이 니체의 진정한 의도이다. 삶의 긍정은 곧 대지의 긍정, 몸(Leib)의 긍정이다.


몸은 하나의 큰 이성(Vernunft)이며, 의미들을 지닌 하나의 복합체(Vielheit)이고 전쟁이며 평화이고 양떼이며 목자다.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역시, 육체의 도구이다. 너의 큰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노리개(Spielzeug)인 것이다. . .그 큰 이성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하는 것이다.49)


   결국 가치는 삶과 몸에서 출발하며 이 몸은 단순히 생리적인 몸이 아니라 사유와 느낌이, 갖가지 힘들이 표현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세계는 정지된 불모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의미를 창출하는 생동적, 생성의 세계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인간이 아니라 선악의 피안에 선 자, 모든 생명 속에 깃든 힘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자, 사물의 대립을 견뎌내는 자, 위대한 삶의 시인, 즉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상승시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다른 사람들의 동일한 노력과 상충할 때, 어느 정도까지 힘 의지를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즉 가치척도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니체에 있어서 한 행위의 가치척도는 자기 안에서 표현되는 자기극복의 정도이다. 자기극복 없이는 각 개인의 삶의 정초는 불가능하다. 상승되는 힘에의 의지는 사회적인 힘을 사용할 때 동반되는 우월의식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그리고 현실에 대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자기개방성”50)이다. 근원적으로 니체는 그들 통해 다양한 도덕들 가운데 인간행위가 규정되는 다원적 규범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5. 나오면서

   니체가 도덕비판을 통해 수행하고자 한 것은 가치들의 유래에 대한 계보학적인 해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도덕적 관념에 대한 계보학적인 고찰은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도덕적 가치가 사실은 나름의 목적과 가치를 지닌 해석이나 힘에의 의지의 반영이었다는 점을 여지없이 폭로시킨다. 그런고로 많은 사람들은 니체가 기독교 도덕뿐만 아니라 도덕 전체를 부정하고 파괴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도덕 그 자체를 부정했다기보다는 도덕성에 대한 일방적인 해석에 저항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니체가 도덕과의 투쟁을 통해 우리가 인간이 될 것과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것은 바로 도덕 비판이 비판을 넘어 새로운 가치 창조의 원리가 됨을 암시한다. 새로운 가치의 정립이란 관점에서 니체의 도덕 비판을 이해한다면, 도덕이 당위적 규범으로 인간에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의미를 담지하게 될 것이다. 즉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자는 마치 예술가가 예술품을 창작하듯 자신의 규범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도덕비판의 도덕이 현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선, 니체가 주장하는 “네 자신이 되라”는 의미를 본래적인 자기로의 귀환으로 이해하여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일이다. 이는 자신의 실존적 유일함과 존귀함을 깨닫고 더불어 자기 자신을 실현하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니체에게서 한 개인이란 전체 속에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리는 저열한 대중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자유정신을 소지한 참된 개인으로서의 가능성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오늘날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 체계는 그 제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개인의 삶을 평균화시켜가고 있다. 평균적인 인간의 양산, 틀에 박힌 규범에의 순종, 기술문명에의 지나친 삶의 의존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정신적으로 수동적 삶의 태도가 확산되어가며 도덕적 의미에서는 고상함의 결여가 팽배해 진다. 니체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인간 소외의 시대에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참다운 인간이 되자는 메시지로 공명된다. 


   다음으로, 니체에게 유일무이한 현실은 삶이다. 그는 삶의 도덕을 수립하기 위해 모든 가치의 전복을 시도한다. 지상에서의 이 삶 이외에 어떠한 삶도 없다면 이 삶 자체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이 땅위에서의 현실성 그것이 바로 모든 가치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일한 권위로서 삶에 있어서의 힘에의 의지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삶을 확보하고 보존하며 더 나아가 이를 발전 향상시켜 강화하는 것이다.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그 삶과 자신의 인간성을 왜곡시키지 않고 가장 본래적인 자신을 형성하는 것, 이것을 위한 형식으로 요구되어 지는 것이 새로운 도덕이다.      


   끝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철학은 서구의 문화와 그 가치관이 지닌 폐쇄적 경직성을 타파하고, 삶을 삶 자체로 해방시킴과 동시에 삶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 탈근대적 이론가들에 의해 니체의 글은, 삶 이외의 기준으로 삶을 제약하고, 자연적인 본능을 억압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막는 이상주의와 개인들을 평균화된 권리 주체로 길들이려는 온갖 전체주의적 성격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귀중한 텍스트로 이용되고 있다. 과히 ‘니체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영향은 시간이 갈수록 인문․사회학 전 영역에 걸쳐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아직도 니체를 비판하는 반대 진영의 목소리를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니체의 작업을 통해 최우선적으로, 오직 일회적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니체의 작업은 유의미하다고 사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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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Morality of Nietzsche's Moral Critique"


   Friedrich Nietzsche is commonly referred to as 'nihilist' on the grounds that he rejects morality. Yet this article dose argue Nietzsche dose argue for a specific morality, based upon what he calls the 'the will to power'.


   The centrality of Nietzsche's attack on morality is a matter of reputation as intention. But his central concern is not the attack and destruction of morality, but a  creation of new value and morality. He attack the claim of moral principles to be universal and absolute, but he dose not deny the proper domain of morality.


   The concept of the value is the key to Nietzsche's philosophy. It is the value of value that he seeks to understand. He had demanded a critique of moral values and announced that he was calling in question the value of these values themselves. And It is the revaluation of values that he undertakes as the goal of his philosophizing. Nietzsche argues, moral values, like all values, aim at the maximization of personal power, and the denial of this "will to power" is but a deception of the weak in order to maximize their slight power at the expense of those who are stronger. Using the life as his criterion, Nietzsche argues that truth is not the correspondence between our ideas and the real world, but the value of those ideas for the life.


   According to Nietzsche the Judaeo-Christian and metaphysical moral that is traditionally accepted as true and valid in European civilization and culture is not other than slave morality. Slave wanted to justify their situations by means of absolute value criteria (good and evil) devoid of a sense of reality, because they are too weak to enforce their masters directly. What is primary in slave morality is the evil, meaning the awesome force and pride of the masters. The good is whatever opposes this evil. The slave values especially those qualities which allow him to elude the oppression of the evil masters: humility, compassion, and a willingness to help fellow sufferers. Yet since the slave is at bottom a frustrated master, his moral outlook is stained with hypocrisy.


   He attacks this morality by exposing its origin and development through the methodology, ie what is called genealogy. He wanted to show the western morality as a slave moral not being rooted in anything fine or admirable but rather in weakness, fear, and malice. Even the noble values that we trust such as freedom, justice, love are the mimicry of impotent hatred. And at the core of those moralities is there ressentiment.


   To the contrary of such "other-worldly", "decadent", "impersonal", "herd", and "life-threatening" values is "naturalistic", "life-affirming" personal virtues. Such values are personal needs, desires, aspirations, and "instincts". The source of such values is individual psychology, depending upon th character and circumstance of the individual.


   Nietzsche views man as more than a being that passively alteration. He believes that man is free and that he develops himself. Thus Nietzsche's freedom without transcendence is by no means intent upon simply returning to mere life. It aspires to the life of authentic creation. The creative trans-valuation of all values must bring must forth his new morality.


       

☞ 출처:  (http://jkp.bj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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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5-1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잽싸게 퍼갑니다. ^^
 

탈정치화되지 않기 위한 주체의 이론적 전략

(출처: 담비 www.dambee.net )

 

 

▲ 뒤늦은 국내 상륙을 앞두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의 주저인 '미학의 정치' 등이 도서출판 울력을 비롯한 몇몇 출판사에서 한창 번역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지난 1980년대에, 알튀세르의 맑스 독해팀 일원이었다가 알튀세르와 틀어져서 다른 길을 걸어간 이로만 알려진, 아니 그 이후 15~16년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왔던 철학자다.

랑시에르의 한국 상륙은 "왜 그런 중요한 사람이 번역되지 않는지 정말 이상하다"라는 어느 소장 철학자의 말마따나 뒤늦은 감은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프랑스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뒤를 이어 지성계를 주름잡은 비판철학자 4인방 가운데 에티엔 발리바르는 윤소영 한신대 교수가 지난 80~90년대에 이미 소개해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같은 네오 맑시스트와 '따로 또 같이' 진격하면서 맑스주의가 90년대 후반까지 그 담론적 생명을 이어가는 데 골몰했고, 그의 동료인 랑시에르에겐 너무 무관심했다. 아니, 발리바르가 랑시에르를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한국 학자들의 무관심이 더 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2명인 알랭 바디우와  E. 라클라우가 최근 들어서야 한국에 소개되고 있어 이들과 함께 랑시에르의 책들도 본격 조명될 조짐이다. 알랭 바디우의 책들은 현재 새물결 출판사에서 한창 번역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라클라우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서문을 통해 대중들과 얼굴을 '쎄게' 익혔으니, 아마 곧 주저가 소개돼 대학원생들이 손때를 어지간히 묻힐 것으로 예상된다.

랑시에르의 책이 서점에 깔리기 전에 왜 지금 이 시점에 그의 주저들이 번역되기 시작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매우 극단적인 주체성의 이론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랑시에르는 현대사회가 선전하는 '자유', '평등' 같은 가치들은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고 '괘씸죄'를 건다. '배제된 목소리'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이기도 하며, 랑시에르의 표현대로라면 사회라는 건축물 속에 그 자신의 '공간'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쉬운 예를 들면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들이 거기 해당하며, 일본의 불가촉천민으로 여겨지는 '부라쿠민(部落民)'이 여기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 사람들이 있는데, 민주주의 체제이든 뭐든 간에 이들을 계산에 넣지 않고 호혜와 평등을 주창해왔다는 것이 랑시에르가 벌인 폭로전의 전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랑시에르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해설을 몇차례나 썼다. 특히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 b, 2005)에서는 아주 길게 랑시에르의 비판이론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어 맛보기로서는 안성맞춤이다. 왜 지젝 얘기를 꺼내는가 하면 이런 랑시에르의 핵심주장은 얼핏 접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고 '극단적'인 주장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고대 그리스의 예를 들며, 귀족정과 과두정이 상류층 체제라고 비판하며 스스로의 몫을 요구한 데모스 집단을 강조할 때는 "뭐지?, 원시민주주의로 돌아가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젝은 랑시에르가 결코 앞뒤 재지 않는 원칙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랑시에르의 주장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서 풀뿌리 연대를 강조하는 요즘의 진보주의자들과 기본 멘탈리티는 동일하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렌즈를 국가 내부의 국부적인 현실에 맞출 때가 많기 때문에 훨씬 검증해보기 쉬운 쪽에 속한다.

최근 한국에는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화재가 발생해 3층에 머물던 외국인들이 대량 참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관리가 허술했다, 직원들 근무가 엉망이었다는 후속보도가 나오고, 이들 이주노동자들에게 보호한답시고 수갑을 채우고, 문을 밖에서 잠궈놓았던 정황이 알려지면서 성토여론이 일고 있다.

랑시에르는 바로 이런 존재들, 수갑에 묶여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외면함으로써 체제를 합리화해온 것이 오늘날의 정치철학이라는 것을 탁월하게 이론화했다. 또한 이들 정치철학들은 랑시에르 같은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데, 지젝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원정치(arche-politics), 초정치(para-politics), 마르크스주의적 메타정치, 극정치(ultra-politics)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중 극정치의 예만 들어본다면, 이들은 정치의 직접적 군국화를 통해 정치를 부정한다. 이들이 부정하는 정치는 물론 '사회에 자신의 몫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과 투쟁으로서 발생하는 '사건으로서의 정치'를 말한다. 투쟁을 더 큰 투쟁으로 말소시키는 전략인데, 오늘날 급진적 우파가 계급 투쟁보다는 계급(또는 성)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적 메타정치는 어떤 은폐를 가하는가. 지젝은 이 대목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을 빌려온다. 제임슨은 맑스주의가 때로 인간 행위를 실용성의 극대화로서 보편적으로 모형화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극단적 판본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는데, 양자 모두가 고유한 정치적 사고의 필요성을 없애버리는 것은 똑같다는 지적이다. 그에 비해 랑시에르는 '언어의 모호성' 같은 문학이론을 철학적 사유 속에 도입하면서까지 정치라는 것의 미묘한 운동성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쉬운말로 정리하자면, 소수자들의 정치적 발언은 이러한 네가지 형태의 '부정'에 의해 정치적 시민권을 갖지 못한채 주변으로 끊임없이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들이 밀려만 나겠는가.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의 프랑스혁명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듯, 막히면 터지게 마련이다. 물론 랑시에르에 따른다면 터진다는 것은 물리적 폭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언로가 다양해졌고 사회의 기득권 섹트들이 수없이 쪼개져있는 현 상황에서는 다른 식의 정치적 투쟁이 가능하다는 점을 랑시에르의 이론은 환기시켜주는 듯하다.

경제적 성장을 이룬 중산층의 나태한 무의식을 겨냥한 랑시에르의 이론이 한국땅에서 얼마나 생산적으로 음미되고 변형될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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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논문은 아니고,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나 푸코, 들뢰즈 또는 하버마스 이후 세대의 철학자들 중에서 국내에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은 철학자들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시간이 더 있고 지면의 여유가 좀더 있었다면 한 2-3명의 정치철학자들을 더 보태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의 철학자 3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이 글은 아직 교정을 마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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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 -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20세기 유럽 정치철학의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주의 역사였다면, 21세기 벽두의 유럽 정치철학은 역사적인 종언을 고한 마르크스주의 이후에 어떻게 지배에 맞서 저항할 것인가, 어떻게 사회의 변혁을 사고할 것인가라는 화두에 대한 상이한 응답의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유럽정치철학은 근본적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살펴볼 3명의 정치철학자들 중 누구도 더 이상 잉여가치의 착취 메커니즘을 정치적 지배의 핵심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또한 누구도 노동자 계급이라는 정치적 주체에 근거를 둔 정치적 변혁과 대안 사회의 구성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 대신 이들은 모두, 근대 정치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문제들이나 마르크스주의 자신을 포함한 근대 정치 문명 전체에 함축된 모순들을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근대 정치 구조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결과라는 고발로 제시되거나(조르지오 아감벤), 정치란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급진적인 선언으로 표현되기도 하며(자크 랑시에르), 또는 모든 정치 투쟁, 모든 권리에 대한 옹호 투쟁은 인정을 둘러싼 갈등과 다르지 않다는 규범적인 원리의 정초 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악셀 호네트).  

 

  따라서 이들의 이론적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비판적 사회이론이 가능한지, 또 지배자들의 질서에 맞서고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여부를 평가해보기 위한 좋은 시금석을 제공해준다. 현실의 가장 민감한 지점, 가장 깊고 예민한 상처를 진단하고 그 뿌리를 드러내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정치철학이 단지 철학의 한 하위분과에 그치지 않고, 철학과 현실의 마주침, 철학과 현실의 상호침투가 발생하는 자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 바탕이라면, 이들의 작업은 오늘날 정치철학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매우 드문 성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르지오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의 묵시록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1941~)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나 안토니오 네그리와 더불어 이탈리아가 배출한 현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정치철학자로서 아감벤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호모 사케르Homo Sacer󰡕(1995)의 놀라운 성공에 힘입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 관한 하이데거의 관점과 발터 벤야민의 종말론적인 폭력의 비판을 밑바탕에 두고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인권 개념에 대한 비판, 푸코의 생명권력론, 칼 슈미트의 주권 개념 등을 비판적으로 전유하여 정치 공동체의 구조와 정치적 주체의 본성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주장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서양 근대정치철학의 규범적 기초 전체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호모 사케르󰡕의 핵심 테제는 아감벤 자신이 요약하고 있듯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1) 원초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배제ban(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이 구분되지 않는 지대로서의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다.

2) 주권의 근본 활동은, 원초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zoē와 bios의 접합의 임계(臨界)로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의 생산에 있다.

3) 서구의 근본적인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은 도시가 아니라 강제수용소에 있다.

 

  이 세 가지 테제는 이 책 1, 2, 3부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벌거벗은 생명”이란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사용한 “blosses Leben”이라는 개념에서 빌려온 것인데, 아감벤은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및 정치학의 논의와 직접 결부시켜 서양 정치철학을 관통하는 근본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한편으로 “비오스bios”와 “조에zoē” 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식 구분법인데, 전자는 인간에 고유한 생명/삶을 가리키고, 후자는 인간, 동물, 신에게 고유한 자연적 생명/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은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따라서 비오스에 놓여 있다는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on hē on”를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제1 철학으로의 길을 열어 놓았는데, 여기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바로 “순수 존재”, 곧 “온 하플로스on haplōs”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존재자들에 공통적인 삶/생명zoē을 추출해내려는 노력과 “순수 존재”를 분리하려는 노력, 곧 정치학과 형이상학 사이에는 체계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의 최초의 법적 유래를, 고대 로마법에 나오는 “homo sacer”라는 표현에서 찾는다.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희생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sacer”가 종교적 의미에서 “성스러운”을 가리키지 않음을 의미하고(신의 법에서 배제), 그를 죽이는 게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호모 사케르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있으며(인간의 법에서 제외), 그의 삶은 “비오스”가 아니라 “조에”에 해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감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 비로소 이 “조에”, 호모 사케르가 법적ㆍ정치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의 핵심 목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 권력의 문제설정과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을 결합하여 󰡔인권선언󰡕(1789)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인권선언󰡕이 제 1조에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천명할 때의 “인간”은 인간주의적인 전통이 해석해온 것처럼 천부인권의 담지자가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을 가리킨다. 곧 󰡔인권선언󰡕은 아무런 특질도 지니지 않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벌거벗은 생명체가 정치의 대상이 되었음을 공표한 선언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시민들이 누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들은 우선 그들 각자가 인간=벌거벗은 생명체로서 주권자의 통치의 대상으로 포섭된 이후에 얻게 되는 특질들의 표현에 불과하다. 푸코가 말하듯 생명권력이 근대성의 문턱을 이룬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아감벤은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수행한 “민족국가의 위기와 인권”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여기에 결부시킨다. 아렌트는 1차 대전 이후에 특히 유럽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 상황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민족국가의 위기는 동시에 인권 개념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처럼 국가의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 이 사람들은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시시각각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간주의적 전통에서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권 개념은 특정한 정치공동체에 선행하는 천부적인 권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인간은 주권적 권력에 포섭됨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아감벤에게 󰡔인권선언󰡕은 근대 정치철학의 규범주의적 해석과는 정반대로 주권자의 생명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예속의 선언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아감벤은 나치즘이 근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흐름과 전혀 무관한 돌연변이적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잠재력의 표출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주권 개념에 대한 분석과 곧바로 연결되는데, 그는 주권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슈미트의 테제, 곧 “주권자는 법질서 바깥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이 질서에 속해 있는데, 왜냐하면 헌정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는 테제를 준거로 삼고 있다. 그가 이처럼 슈미트의 테제에 주목하는 것은 이 테제가 나치 독일이 수행한 생명정치의 핵심을 매우 정확히 드러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우선 나치 강제수용소의 법적 지위의 특이성에 주목하는데, 강제수용소는 나치 시대에 처음 설치된 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사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단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강제수용소의 설치 및 운용에 관한 사항,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주권자가 국민들의 기본권을 잠정 중단시키고 “예외상태Ausnahmezustand”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에 관한 사항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나치 수용소의 경우는 헌법에 아무런 규정이 없는 가운데 강제수용소를 설치, 운용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는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새로운 점이다. 우선 첫째, 이처럼 명시적인 규정 없이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예외상태에 돌입함으로써,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하게 된다. 바이마르 헌법이 규정하는 예외상태는 정확히 헌법이라는 정상적인 법적 규범에 따라 자신의 효력을 얻게 되는 반면, 나치 법에서는 법적 규범에 대한 준거가 없이 예외상태가 성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에 따라 예외상태는 실질적으로 법질서 자체가 되는데, 이 예외상태는 바로 주권자(총통)의 결정에 따라 직접 성립하기 때문에, 이제는 단지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할 뿐만 아니라 법과 사실 사이의 구분도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아감벤이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치의 특이성, “예외성”은 사실은 전혀 예외가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성립 이래 존재해온 잠재적 경향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조에”와 “하플로스” 사이의 내적 연관성과 고대 로마법에서 homo sacer라는 존재에 주목하고 있는데, 나치가 정상화된 예외상태 속에서 설립한 강제수용소는 이를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곧 주권자(총통)의 권력은 기본권-인권의 “금지”와 이질적인 존재들의 “추방”의 권력이며, 이를 통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일체의 정치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한낱 몸뚱아리로 환원되어, 그를 살해한다고 해서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 “호모 사케르”가 되는 셈이다.

 

  더 나아가 강제수용소란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의 대상으로 출현하는 장소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이제 수용소는 나치의 유대인수용소나 소련의 정치범수용소 같은 것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훨씬 보편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 된다. 예컨대 아감벤은 프랑스 공항에 설치되어 있는 난민 신청자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장소 역시 일종의 수용소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법적 기관에 넘겨지기 전까지 이 사람들은 “예외상태” 속에서 어떤 법적 지위나 권리도 지니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벌거벗은 생명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 전에 참사를 빚은 여수의 외국인보호소 역시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말하는 수용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의 작업은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적 토대인 인권의 원리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자 서양 근대 문명의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혁신적인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아감벤의 정치철학은 그가 원용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해석의 타당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들은 제쳐둔다 하더라도, 정치적 행위를 위한 규범적 기초의 여지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가령 그는 법과 폭력을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고,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와 현대의 서구 자유주의를 본질적으로 등가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나치의 강제수용소와 현대의 난민 보호소 등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과연 어떠한 정치적 행동이 가능할까, 또 어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악셀 호네트와 인정 투쟁


  아감벤이 근대성(또는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면, 독일 비판이론의 제 3세대 대표자로 불리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1949~)의 “인정투쟁Kamp um Anerkennung” 이론은 반대로 근대성이 이룩한 핵심적인 성과, 곧 계몽주의 이래 서양 사회가 이룩한 합리적ㆍ도덕적 진보에 대한 긍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하버마스가 제안한 이론적 전회, 다시 말해 주체 중심적인 철학에서 상호주관성 철학으로의 전회에서 출발한다. 곧 이들에게 주체는 타인들과의 관계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형성되며, 주체가 지닌 언어적ㆍ실천적ㆍ반성적 자율성은 상호주관적 규준들을 내면화함으로써 형성된 산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네트는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성이 지나치게 보편적 화용론에만 의지하고 있으며, 다른 종류의 규범적 토대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곧 주체들 사이의 상호주관적 관계는 언어적 소통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관계 및 구체적인 욕구들을 포함하는 주체들의 정체성의 실현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하버마스의 이론에는 이러한 차원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하버마스는 구체적인 사회적 투쟁들 속에 담겨 있는 규범적 쟁점들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하버마스 이론의 이러한 난점 내지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1990년대 이래 호네트는 헤겔 철학에서 유래한 인정투쟁 이론을 발전시켜왔으며, 이는 그가 하버마스의 이론적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철학자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호네트의 출발점은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데서나 사회가 성립하는 데서 주체들 사이의 상호 인정 관계가 핵심적이라는 데 있다. 곧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그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자기 긍정은 이 개인에 대한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형성되고 또 그것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ㆍ발전될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그는 인정의 세 가지 차원을 구별한다. 곧 한편으로는 엄마와 아이나 연인들 간의 사랑과 상호배려에서 표현되는 정서적 차원의 인정의 관계가 있고,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다른 성원들을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인정하고 배려하는 법적 인정의 관계가 존재하며, 분업적으로 조직된 사회 단체 내부에서 동료들에 의한 사회적 평판이라는 인정 관계가 존재한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인정은 각각의 개인들이 하나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각각의 주체들의 정체성 형성에는 역시 독립된 주체로서의 타인들의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는 또한 상호주관적인 사회화의 조건으로서도 기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정관계의 정치적ㆍ사회적 함의는 어떤 것인가? 호네트가 주목하는 것은 인정의 반대, 곧 무시의 경험이다. 인정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 및 사회적 유대관계의 형성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면, 역으로 개인이 타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그 개인의 정체성 및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기대한 만큼 또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은 그에 대해 저항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무시가 특수한 한 개인에 대해 우발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집단에 대해 구조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이는 곧바로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가령 식민지 주민들이 정복자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나, 소수 인종, 소수 종족들이 한 사회의 지배 인종, 종족들에게 멸시받고 차별받는 것, 또는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조선족이나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별 대우를 받고 무시당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멸시와 차별대우, 따돌림 등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할 때 인정투쟁은 정치적 투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론은 피지배자들이 지배에 맞서 저항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합당한 규범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해줄 수 있으며, 역으로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도 제시해줄 수 있다. 각각의 사회 성원들이 억압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인 반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사회 또는 특정한 집단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다른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사회는 병리적이고 부당한 사회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가령 영미권에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나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등이 발전시킨 “인정의 정치학”보다 좀더 규범적이고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이론은 1980년대 다문화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의 맥락에 따라 전개된 인정의 정치학과 달리 적절한 인정을 받으려는 인간의 욕구는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 본질적이며, 따라서 이는 초역사적ㆍ초문화적인 규범적 기초라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하버마스의 화용론 중심의 상호주관성 모델을 인간학적으로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피지배자들의 부정적 경험을 자신의 비판이론의 원천으로 삼으면서 비판이론이 지닌 해방론적 함축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방론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호네트 자신은 인정투쟁 이론이 지닌 정치철학적 측면들을 발전시키지 않은 채, 인정투쟁 이론의 규범적인 측면을 좀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호네트의 작업에서는 인정투쟁 이론이 사회구조 또는 사회제도들의 형성과 개조, 변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론이 비판이론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적ㆍ사회적 차원에 대한 논의를 보완ㆍ확장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호네트는, 스승인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서양 근대 문명의 가장 어두운 측면, 곧 파시즘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적절한 이론적 해명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얼마간 맹목적이다. 한나 아렌트 이래 또는 비판이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아도르노 이래 현대 철학자들 중 상당수가 근대성에 내재한 도착성의 뿌리를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정투쟁 이론이 정치철학으로서의 이론적 완결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 점은 반드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와 평등의 원리로서 정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철학계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1940~)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스승인 알튀세르에 대한 지적 반역을 감행한 인물로 기억되어 왔다. 1965년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저술한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에 공저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1974년 󰡔알튀세르의 교훈La leçon d'Althusser󰡕이라는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서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독립선언”을 했던 만큼 이러한 평판은 얼마간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1980년대부터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1987), 󰡔불화La mésentente󰡕(1995) 같은 독창적인 저작들을 발표하면서 알튀세르의 그늘에서 벗어나 곧바로 현대 철학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은 하나의 근본적인 통찰, 곧 정치는 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통찰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는 “정치la politique”와 “치안/통치la police”를 구별하면서 출발한다. 치안/통치는 한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하는 구조 일체를 가리키며, 따라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식인 내지 철학자와 대중 사이의 근원적인 불평등을 가정한다. 반면 정치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며, 누구나 다 동등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심지어 지적인 능력에서도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철학은 한 사회의 구조와 성립 근거를 밝히고 그것을 가장 합리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원리를 해명하는 것, “치안/통치”를 확립하는 것, 곧 위계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정치철학”이란 용어모순이며,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와 “치안/통치”,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와 근원적인 불평등의 질서 중에서 우선하는 것은 바로 정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불평등을 가정하는 “치안/통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자로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피지배자들이 지배자를 지배자로서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지배자와 근원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근원적인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는 “치안/통치”의 질서는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를 자신의 존립의 기초로 삼고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을 “잘못/왜곡tort”이라는 중의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인 이유는 “치안/통치”의 질서는 지배-피지배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치안/통치”는 지배와 피지배의 구별이 근원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평등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또한 “왜곡”되고 “뒤틀린”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공동체의 성원들은 모두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동등성 때문에 비로소 “치안/통치”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치안/통치”의 질서는 사회 성원들에게 자원과 권한을 불균등하게 배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치안/통치”의 질서에 대해 저항하는 것, 이를 전복시키거나 변혁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제 3의 용어, 곧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통치”가 조우하는 장소, 곧 “치안/통치”의 잘못과 왜곡이 드러나는 장소를 “정치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은 기존의 “치안/통치”의 질서에서 배제되어 있는, 이러한 질서 속에서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면서 저항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면서 “치안/통치”의 균형잡힌 질서를 뒤틀고 균열을 낼 때, 그것의 잘못을 보여줄 때 나타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은 고정된 불변의 장소, 위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몫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등장할 때마다, “치안/통치”의 도덕적 잘못을 드러내고 이로써 그 존재론적 질서의 왜곡을 보여줄 때마다 형성된다. 아니 그러한 보여줌의 사건 자체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 주체” 역시 어떤 객관적인 속성에 따라 (예컨대 노동자 계급인지 여부)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아테네의 자유 빈민들(“데모이demoï”)이 민주주의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나섰을 때 그들이 곧 정치적 주체였으며, 또 1871년 파리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했을 때, 1968년에 학생-노동자들이 “우리 모두는 독일의 유대인들이다”라고 외치며 거리에 나섰을 때, 그들 역시 정치적 주체들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주체란 어떤 존재론적 규정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치안-통치”의 질서에 따라 규정된 존재론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정치적 투쟁이 전개될 때 비로소 정치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주체화”를 “탈정체화”, “탈분류화”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볼 때 그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랑시에르는 의회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를 “탈민주주의post-démocratie”라고 부른다. 곧 “치안-통치”의 “잘못/왜곡”을 드러내줄 수 있는 여지가 대부분 사라지고 정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집단들의 산술적 합의(“선거”)로 환원되는 곳, 전문가들과 정책입안자들이 통치하는 곳이 바로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자유민주주의(또는 근대성) 일체를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감벤이나 알랭 바디우와 달리 랑시에르는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지닌 긍정적인 함의들을 인정하는데, 이는 이 제도들이 바로 과거 정치적 주체들의 투쟁의 산물이며, 그러한 투쟁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제도들 덕분에 이전에 일어났던 정치적 투쟁의 사건, 민주주의의 사건은 언젠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특정한 제도, 어떤 특정한 정치유형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모든 정치 제도 속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규범적 원리로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지닌 강점은 바로 이처럼 혁명적 전통의 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규범적 측면을 함께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에 정치를 사회적 질서와 대립시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에 관한 사고를 실재의 객관적 조건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구와 근본적으로 절연시키고 있는 것은 랑시에르의 철학이 지닌 중대한 문제점 중 하나다. 게다가 이는 민주주의적 제도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도 얼마간 모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평가는 제도들에 대한 객관적 규정의 가능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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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yoonta > 스탈린주의 체제의 실체? (박노자)

                      스탈린주의 체제의 실체?

- 1917년 이전의 러시아 – 국가의 폭력 기구가 비대화되고, “위로부터”의 국가 지휘 하의 자본주의가 발전되기 시작한 매우 “전통적인” 사회 – 약 80%의 수출은 농산물이었음. 농촌에서 – 약 3만 호구의 대지주 (주로 귀족)들은 약 7천만 데샤티나, 즉 천만 농민 가구들이 소유한 면적만큼이나 소유하는 등 농촌은 극단적인 “불균형적 토지 소유 관계”에 시달렸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14년에 도시 공업에서 500명 이상의 대규모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전체의 54%에 달하는 등 노동 계급의 대규모 작업장에서의 집중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음. 후진적인 러시아이었지만 군사적 “열강”이었기에 군수공업은 세계적 수준에 있었으며, 대표적인 군수 공업 업체인 Putilov 공장 (St.-Peterburg)은 약 3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등 그 당시 세계 최대이었음. 결국 대공장에서 집중된 노동자들이 혁명 사상에 쉽게 노출됐으며, 도시 노동자의 혁명 운동과 농촌에서의 농민 반란 운동이 합쳐지는 순간 제정 러시아 체제나 매우 취약한 러시아 자본가들의 지배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복합형 불균형 발달의 과정”은 러시아 혁명을 다 준비해놓았음.
- “고질화된 불만의 상태” – 내전이 종식된 1921년 이후에 사실상 재현됐음. 농민들이 노동자 위주의 새로운 국가를 아직 강력하게 이질시했음. 풍년 때에 곡물의 과잉 공급으로 시장 식량품 가격들이 폭락할 수 있었기에 특히 부농들이나 중농들이 식량 방매를 유보하는 등 “식량 파업”을 벌이곤 했으며 국가는 가격의 폭등을 막기 위해 법정 수매 가격을 정해 그 나름의 “저곡가 정책”을 시도하는 등 농민과 국가는 “準 적대 관계”에 있었음. 트로츠키파의 경제학자 Preobrazhensky – 1925년에 “저곡가 정책을 통해서 농민층을 ‘착취’하지 않으면 산업화와 진정한 사회주의로의 이동을 이룰 수도 없으며 부농들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을 달랠 수도 없다, 법정 저곡가 정책을 펴서 농촌의 잉여를 산업 투자로 돌리자”는 이야기로 유명해졌음. 결국 국정 참여 기회가 거의 없었던 농민과, 농업보다 산업을 우선시하는 “도시인들의 국가”의 숙명적 갈등.
노동자들이 산업 발전이 지지부진하는 “신경제정책” 시절 (1921-1928)에 높은 실업률 (25%)과 매우 열악한 생활 조건 등에 시달리고 “무엇을 위한 혁명이었던가”와 같은 질문들을 공개적으로 던지곤 했다. 공업 관료 (주로 당원이 아닌 지배인 등)와 당 관료에 대한 불만 – 트로츠키파 등에 대한 상당수 평당원들의 지지로 이어졌다. 반대파의 지지기반 – 공업시설이 가장 밀집한 모스크바의 소콜니키, 크라스나야 프레스냐 등의 지역. 성장률 2%밖에 안되는 1920년대의 소련 도시 사회 –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 – 관료화되어 더 이상 “밑바닥”을 거의 대표하지 않았음. 노조의 지도부 – 당원이 아닌 일반 노동자의 비율은 12-13%이었음 (1926년). 일반 노동자와 노조 간부, 십장, 지배인과의 관계 – 거의 “혁명 이전의 예속적인 형태”로 돌아왔다는 평가. 
- “1920년대의 구조적 위기” – 결국 스탈린 지도부가 2 가지 방법으로 돌파했음:
* 포섭 – “미완의 혁명”에 대한 좌절과 불만에 젖은 노동자나 농민들을 위해 “신분 상승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1924년 교육부의 훈령 – 대학 입학은 노조 조합원들에게만 허할 것, 전역 군인과 Rabfak (노동자 출신들을 위한 예비 과정) 출신, 내전의 상이군 등을 특채로 뽑을 것 등을 명령했다. 원칙상 해당 노조의 추천서가 있는 젊은 노동자에게는 고등교육 받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 됐다. 그런데 사실상 1930년에 대학생들 중에서는 노동자, 농민 출신의 비율은 37%에 불과했음. 다수는 전문가, 지식인, 자영업자 출신들이었음 – 대학 입학을 좌우하는 대학 교수들은 되도록이면 노동자/농민들의 비율을 줄이려고 노력했음. 대학 교육은 노동자에게는 무상이었지만 노동자/빈농이 아닐 경우에는 여전히 학비를 징수했음. 1933년 경 – 초등학교 입학률이 거의 100% 이름. 1940년대말 – “문맹 퇴치” 거의 완성. 1970년대 중반 – 거의 100%에 가까운 학생들이 중학교 졸업하게 됨 – 중등 교육 보편화. 대학교 입학생의 총수 – 몇 배 증가하여 1940년쯤에 백만 명에 이름. 그런데, “노동자/농민들을 위한 역차별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대학생 중의 노동자/농민 자녀의 비율은 사실 1980년대초까지 45% 정도 넘지 못했음 – 여전히 실질적인 사회적 헤게모니는 고학력자 중산층에 있었음. 1920년대의 또 다른 對사회 “유화 정책” – 낙태수술의 허용 (허가제 – 불법 수술의 비율은 약 20-30%), 이혼 절차의 간소화, 동성연애의 인정 등 – 새 정권에 대한 도시 사회 특히 젊은이들의 환심 사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음 - 1930년대 후반에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거의 다 사라졌음.
* 폭력 – 국가에 의한 사회의 무력화와 공포 분위기 조성, 개인의 원자화 – “가시적인 공판” - 1928년의 Shakhty 공판 (“사회주의적인 생산을 사보타주하는 부르주아적 전문가 응징”) 이후 특정 집단들을 겨냥하는 일련의 공판들이 열림. 절정 – 1936-37년의 레닌의 주요 동지 (“파시스트 간첩이자 트로츠키주의적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개 재판 (“Moscow Processes”). 사법적인 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이미 사회가 경험한 기존의 폭력의 규모를 염두에 두어야 함 – 1917-1921년간에 내전, 대량 기아, 이민 등으로 러시아의 전체 인구가 약 1천3백만 명으로 줄어들었음. 그런데, 1940년에 수용소와 감옥을 합쳐서 수감돼 있는 인구는 정확히 1.850.258명 이었음 – 즉, 다수의 주민들에게 스탈린의 숙청보다도 1917-1921년간의 일련의 참극들이 “진정한 참사”로 보였을 것. 수감자 중에서는 거의 상당수를 이루는 것은 각종의 “정치, 사상범”이었음: 1937-1938년에 정치 관련 범죄로 체포, 수감된 인구는 1.344.923명, 그 중에서는 총살된 인구는 681.692명. 그 뒤에는 연간 총살자의 수가 크게 줄어들어 1940년대에 (정치범에 한해서) 7500명 정도이었음. 대체로 총살되는 이들 – 거의 다수의 “舊 공산당원” 등 잠재적으로 반체제 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었던 자 – 잠재적인 적에 대한 “선제공격”. 결과 – 원자화된, 순치된 사회 – “사회적 운동” 가능성의 봉쇄. 
경제적 폭력 – 특히 “농민들의 협동화” – 1929년 이후 – 사실상 농민들의 자율성을 말살시키고 농촌으로부터 잉여를 수취하여 공업부문에 투자시키기 위한 매우 가혹한 “농업 희생 정책”. 결과 – 특히 우크라이나 지방에서의 대량 아사 사태, 아사자의 수는 전국적으로는 1932-34년간 약 4백만 명으로 추산됨. “생존 경쟁” 사회의 탄생 – 하류층 출신의 소련 시민에게는 최대의 과제란 “굶어죽지 않기”, “가족 살리기” 정도. 정권이 안정된 상황에서는 “생존”의 주된 방법은 정권에 대한 충성 – 소련 국민의 “가시적인 충성심”은 상당부분 내면화된 생존의 전략.
* 성장 – 폭력적인 “농촌 말살”을 기반으로 하여 공업 경제는 1930년대에 기적적인 압축 성장을 이루어 도시 주민에 대한 포섭 정책을 가능케 했다. 성장률 연간 13-15%. 1928-1937년간 강철 생산은 3백만 톤에서 1천5백만 톤으로 늘어남 – 거의 5배 정도의 증가. 1930년대말 – 자동차 (연간 20만대), 비행기 생산 등 – 군사화된 중공업의 구축이 거의 완성됐음. 대가 – 실질 임금의 동결 내지 소폭 하락 (1928-1940), 구조화된 과로 (하루 15시간씩 노동), 매우 높은 산재사망률 – 그런데 교육, 의료 분야에서의 국가의 포섭 정책이 민중의 희생에 대한 일종의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었음.
결국 – 박정희 정권보다는 오히려 스탈린주의는 “대중 독재”의 형태에 다 가까웠음 – 기본적인 위로부터의 압축 성장 패턴은 비슷해도.

#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인정할 수 없는 여러 이유:
- 철저한 비민주성.
- 혁명 이전의 시절을 방불케 하는 양극화 - 1930년대 후반의 노동자 월급 평균 150루불, 고급 간부는 보통 3000-4000루불 이상. 같은 탄광에서 광부와 지배인의 월급 차이는 약 80배.
- 전사회의 군사화
- 퇴영적이며 제국주의적 “민족 정책”. 이미 1924년부터 이슬람 공산주의자 Sultan-Galiev 등에 대한 박해 시작 – 1930년 체포, 1937년 총살. “소수 민족 공산주의자”, 즉 소수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할 수 있었던 거의 일체 활동가 - 1930년대말 총살됐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상당수의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적 배경 – 국민주의/대러시아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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