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yoonta > 스탈린주의 체제의 실체? (박노자)

                      스탈린주의 체제의 실체?

- 1917년 이전의 러시아 – 국가의 폭력 기구가 비대화되고, “위로부터”의 국가 지휘 하의 자본주의가 발전되기 시작한 매우 “전통적인” 사회 – 약 80%의 수출은 농산물이었음. 농촌에서 – 약 3만 호구의 대지주 (주로 귀족)들은 약 7천만 데샤티나, 즉 천만 농민 가구들이 소유한 면적만큼이나 소유하는 등 농촌은 극단적인 “불균형적 토지 소유 관계”에 시달렸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14년에 도시 공업에서 500명 이상의 대규모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전체의 54%에 달하는 등 노동 계급의 대규모 작업장에서의 집중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음. 후진적인 러시아이었지만 군사적 “열강”이었기에 군수공업은 세계적 수준에 있었으며, 대표적인 군수 공업 업체인 Putilov 공장 (St.-Peterburg)은 약 3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등 그 당시 세계 최대이었음. 결국 대공장에서 집중된 노동자들이 혁명 사상에 쉽게 노출됐으며, 도시 노동자의 혁명 운동과 농촌에서의 농민 반란 운동이 합쳐지는 순간 제정 러시아 체제나 매우 취약한 러시아 자본가들의 지배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복합형 불균형 발달의 과정”은 러시아 혁명을 다 준비해놓았음.
- “고질화된 불만의 상태” – 내전이 종식된 1921년 이후에 사실상 재현됐음. 농민들이 노동자 위주의 새로운 국가를 아직 강력하게 이질시했음. 풍년 때에 곡물의 과잉 공급으로 시장 식량품 가격들이 폭락할 수 있었기에 특히 부농들이나 중농들이 식량 방매를 유보하는 등 “식량 파업”을 벌이곤 했으며 국가는 가격의 폭등을 막기 위해 법정 수매 가격을 정해 그 나름의 “저곡가 정책”을 시도하는 등 농민과 국가는 “準 적대 관계”에 있었음. 트로츠키파의 경제학자 Preobrazhensky – 1925년에 “저곡가 정책을 통해서 농민층을 ‘착취’하지 않으면 산업화와 진정한 사회주의로의 이동을 이룰 수도 없으며 부농들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을 달랠 수도 없다, 법정 저곡가 정책을 펴서 농촌의 잉여를 산업 투자로 돌리자”는 이야기로 유명해졌음. 결국 국정 참여 기회가 거의 없었던 농민과, 농업보다 산업을 우선시하는 “도시인들의 국가”의 숙명적 갈등.
노동자들이 산업 발전이 지지부진하는 “신경제정책” 시절 (1921-1928)에 높은 실업률 (25%)과 매우 열악한 생활 조건 등에 시달리고 “무엇을 위한 혁명이었던가”와 같은 질문들을 공개적으로 던지곤 했다. 공업 관료 (주로 당원이 아닌 지배인 등)와 당 관료에 대한 불만 – 트로츠키파 등에 대한 상당수 평당원들의 지지로 이어졌다. 반대파의 지지기반 – 공업시설이 가장 밀집한 모스크바의 소콜니키, 크라스나야 프레스냐 등의 지역. 성장률 2%밖에 안되는 1920년대의 소련 도시 사회 –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 – 관료화되어 더 이상 “밑바닥”을 거의 대표하지 않았음. 노조의 지도부 – 당원이 아닌 일반 노동자의 비율은 12-13%이었음 (1926년). 일반 노동자와 노조 간부, 십장, 지배인과의 관계 – 거의 “혁명 이전의 예속적인 형태”로 돌아왔다는 평가. 
- “1920년대의 구조적 위기” – 결국 스탈린 지도부가 2 가지 방법으로 돌파했음:
* 포섭 – “미완의 혁명”에 대한 좌절과 불만에 젖은 노동자나 농민들을 위해 “신분 상승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1924년 교육부의 훈령 – 대학 입학은 노조 조합원들에게만 허할 것, 전역 군인과 Rabfak (노동자 출신들을 위한 예비 과정) 출신, 내전의 상이군 등을 특채로 뽑을 것 등을 명령했다. 원칙상 해당 노조의 추천서가 있는 젊은 노동자에게는 고등교육 받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 됐다. 그런데 사실상 1930년에 대학생들 중에서는 노동자, 농민 출신의 비율은 37%에 불과했음. 다수는 전문가, 지식인, 자영업자 출신들이었음 – 대학 입학을 좌우하는 대학 교수들은 되도록이면 노동자/농민들의 비율을 줄이려고 노력했음. 대학 교육은 노동자에게는 무상이었지만 노동자/빈농이 아닐 경우에는 여전히 학비를 징수했음. 1933년 경 – 초등학교 입학률이 거의 100% 이름. 1940년대말 – “문맹 퇴치” 거의 완성. 1970년대 중반 – 거의 100%에 가까운 학생들이 중학교 졸업하게 됨 – 중등 교육 보편화. 대학교 입학생의 총수 – 몇 배 증가하여 1940년쯤에 백만 명에 이름. 그런데, “노동자/농민들을 위한 역차별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대학생 중의 노동자/농민 자녀의 비율은 사실 1980년대초까지 45% 정도 넘지 못했음 – 여전히 실질적인 사회적 헤게모니는 고학력자 중산층에 있었음. 1920년대의 또 다른 對사회 “유화 정책” – 낙태수술의 허용 (허가제 – 불법 수술의 비율은 약 20-30%), 이혼 절차의 간소화, 동성연애의 인정 등 – 새 정권에 대한 도시 사회 특히 젊은이들의 환심 사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음 - 1930년대 후반에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거의 다 사라졌음.
* 폭력 – 국가에 의한 사회의 무력화와 공포 분위기 조성, 개인의 원자화 – “가시적인 공판” - 1928년의 Shakhty 공판 (“사회주의적인 생산을 사보타주하는 부르주아적 전문가 응징”) 이후 특정 집단들을 겨냥하는 일련의 공판들이 열림. 절정 – 1936-37년의 레닌의 주요 동지 (“파시스트 간첩이자 트로츠키주의적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개 재판 (“Moscow Processes”). 사법적인 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이미 사회가 경험한 기존의 폭력의 규모를 염두에 두어야 함 – 1917-1921년간에 내전, 대량 기아, 이민 등으로 러시아의 전체 인구가 약 1천3백만 명으로 줄어들었음. 그런데, 1940년에 수용소와 감옥을 합쳐서 수감돼 있는 인구는 정확히 1.850.258명 이었음 – 즉, 다수의 주민들에게 스탈린의 숙청보다도 1917-1921년간의 일련의 참극들이 “진정한 참사”로 보였을 것. 수감자 중에서는 거의 상당수를 이루는 것은 각종의 “정치, 사상범”이었음: 1937-1938년에 정치 관련 범죄로 체포, 수감된 인구는 1.344.923명, 그 중에서는 총살된 인구는 681.692명. 그 뒤에는 연간 총살자의 수가 크게 줄어들어 1940년대에 (정치범에 한해서) 7500명 정도이었음. 대체로 총살되는 이들 – 거의 다수의 “舊 공산당원” 등 잠재적으로 반체제 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었던 자 – 잠재적인 적에 대한 “선제공격”. 결과 – 원자화된, 순치된 사회 – “사회적 운동” 가능성의 봉쇄. 
경제적 폭력 – 특히 “농민들의 협동화” – 1929년 이후 – 사실상 농민들의 자율성을 말살시키고 농촌으로부터 잉여를 수취하여 공업부문에 투자시키기 위한 매우 가혹한 “농업 희생 정책”. 결과 – 특히 우크라이나 지방에서의 대량 아사 사태, 아사자의 수는 전국적으로는 1932-34년간 약 4백만 명으로 추산됨. “생존 경쟁” 사회의 탄생 – 하류층 출신의 소련 시민에게는 최대의 과제란 “굶어죽지 않기”, “가족 살리기” 정도. 정권이 안정된 상황에서는 “생존”의 주된 방법은 정권에 대한 충성 – 소련 국민의 “가시적인 충성심”은 상당부분 내면화된 생존의 전략.
* 성장 – 폭력적인 “농촌 말살”을 기반으로 하여 공업 경제는 1930년대에 기적적인 압축 성장을 이루어 도시 주민에 대한 포섭 정책을 가능케 했다. 성장률 연간 13-15%. 1928-1937년간 강철 생산은 3백만 톤에서 1천5백만 톤으로 늘어남 – 거의 5배 정도의 증가. 1930년대말 – 자동차 (연간 20만대), 비행기 생산 등 – 군사화된 중공업의 구축이 거의 완성됐음. 대가 – 실질 임금의 동결 내지 소폭 하락 (1928-1940), 구조화된 과로 (하루 15시간씩 노동), 매우 높은 산재사망률 – 그런데 교육, 의료 분야에서의 국가의 포섭 정책이 민중의 희생에 대한 일종의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었음.
결국 – 박정희 정권보다는 오히려 스탈린주의는 “대중 독재”의 형태에 다 가까웠음 – 기본적인 위로부터의 압축 성장 패턴은 비슷해도.

#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인정할 수 없는 여러 이유:
- 철저한 비민주성.
- 혁명 이전의 시절을 방불케 하는 양극화 - 1930년대 후반의 노동자 월급 평균 150루불, 고급 간부는 보통 3000-4000루불 이상. 같은 탄광에서 광부와 지배인의 월급 차이는 약 80배.
- 전사회의 군사화
- 퇴영적이며 제국주의적 “민족 정책”. 이미 1924년부터 이슬람 공산주의자 Sultan-Galiev 등에 대한 박해 시작 – 1930년 체포, 1937년 총살. “소수 민족 공산주의자”, 즉 소수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할 수 있었던 거의 일체 활동가 - 1930년대말 총살됐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상당수의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적 배경 – 국민주의/대러시아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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