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김훈과 홍세화의 대담

소설가 김훈과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의 대담(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209332.html)을 아침에 전철에서 읽었다. 전철역으로 가는 버스에서는 이미 김훈의 <남한산성>(학고재, 2007)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지면으로 읽기 전에 온라인에서 대담을 훑어보았고 소설을 읽는 일도 더는 미루기가 어려웠다(그의 다른 장편들을 정독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남한산성>은 기대보다 재미있다. 특히 청나라를 세운 칸이 조선 임금에게 보낸 국서는 명문(?)이다. 설마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인지?). 한겨레가 창간 기념호에 두 사람을 불러모은 건 한때 두 사람이 한 솥밥을 먹은 '입사 동기'라는 이유에서이다(이 또한 '한국인 코드'이다!). 그런 사정이 아니라면, 그냥 '자전거 레이서와 택시 운전사의 대담'이 더 어울릴 만한 타이틀이다('자전거 레이서가 택시운전사를 만날 때'라고 제목을 잡았다가 다시 돌려놓았다). 광고나 소제목들이 눈에 거슬려서 기사는 나대로 재편집했다.  

한겨레(07. 05. 15) 입사 동기 김훈-홍세화 6시간 대담

<한겨레>는 창간 19주년을 맞아 소설가 김훈씨와 홍세화 기획위원의 대담을 마련했다. 두 사람은 남다른 인연을 지니고 있다. 2002년 2월 김훈씨가 <한겨레> 편집국 부국장 대우 사회부 기동팀 취재기자로 입사했으며, 홍세화씨 역시 편집국 부국장 겸 편집위원으로 입사했던 것. 그러니까 두 사람은 ‘입사 동기’인 셈이다. 물론 김훈씨는 2003년 1월 20일자로 사직했고, 홍세화 위원은 정년퇴직 이후에도 기획위원으로 계속 신문사에 몸을 담고 있다. 홍 위원이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보아 ‘진보’에 해당한다면 김훈씨는 보수적인 세계관을 지닌 이로 알려져 있다.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이 상극에 가까울 정도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궁금하고 솔직히 걱정도 됐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둘의 이야기는 활발했고 흥미로웠다. 대담은 9일 오후 서울 신문로의 한 야외 찻집에서 시작됐으며 찻집이 문을 닫은 뒤에는 인사동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김훈씨의 근작 소설 <남한산성>을 막 읽고 난 홍 위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홍: “<남한산성>을 잘 읽었습니다. 그 소설 속 상황을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는데, 저는 거기에는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쉬운 이야기부터 하죠. 김 선생의 경우에는 글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김: “글이요? 글쎄요. 저는 사실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해서 아주 잔혹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에요. 제가 글을 쓰는 것은 아직도 내가 내 자신을 훈련시키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죠. 글에서,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자유 같은 건 저에게 일체 없는 거예요. 이것이 저에겐 노동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죠. 밥을 벌어먹는 노동이기 때문에 그건 끔찍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홍: “뭐, 저에게도 글쓰기가 비슷한 밥벌이의 수단인 건 사실인데, 꼭 그것만은 아닌 것 또한 사실이죠. 역시 글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문제를 무시할 순 없다고 봅니다.”

김: 저도 홍 선생께서 쓰신 책을 많이 봤는데, 역시 지금 말씀하신 소통의 문제, 소통을 통해서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 그런 것들을 읽을 수 있었어요. 근데 글이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매우 아득하고 신뢰하기가 어렵고 위태로운 말처럼 들리기도 해요. 그것은 글을 쓰는 자들의 절망적인 답답함인데, 무기는 세계를 개조하잖아요? 미국의 무기는 오늘 아침도 이 세계를 정확하게 때려부셔가지고 개조해 버리는 것이죠. 그 개조의 방향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네들의 이익에 맞게끔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죠. 근데 말이 세계를 개조한다는 것은 거기에 비하면 참 아득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나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안 믿는 사람이에요.”

홍:지금까지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볼 때 지금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 그러한 현실에 저항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 그나마 지금과 같은 정도의 이성적인 사회가 가능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인간은 물론 전쟁을 일으키는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동시에 성찰적 이성 역시 지니고 있어서 그걸 토대로 부당한 현실을 상대로 한 싸움을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글쓰기 작업도 그런 것의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두 사람 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이들. 그러나 개인적인 글쓰기의 동기, 그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탐색전을 생략한 채 득달같이 일합을 겨룬 느낌이었다. 과열된(?) 분위기도 식힐 겸 두 사람의 성장기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 보았다. 홍 위원이 1947년 12월생이고, 김훈씨는 1948년 5월생이어서 두 사람은 5개월여의 시차를 두고 같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김훈씨가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두 사람은 같은 학번이 되었는데,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이르도록 한 번도 같은 학교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김: “제 어린 시절은 가난과 억압뿐이었어요. 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왔는데 거기서 좀 자라서 왔어요. 거기서 미군이 철조망 너머로 던져주는 껌과 초콜렛을 얻어먹었죠. 대학 들어갈 무렵 나와 내 친구들의 꿈은 오직 하나였어요. 밥을 먹는 것. 밥. 밥을 좀 먹는 나라를 만들어서, 도대체 밥 세 끼를 좀 먹고 살아야겠다는 소망이 있었어요. 간절한 소망이었죠. 우리는 고조선때부터 그 시대까지 밥을 못 먹었어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보면 해마다 굶어죽은 놈이 수만명씩 나오잖아요. 그리고 우리 어렸을 때도 해마다 보릿고개만 되면 굶어죽었어요. 우리 정부의 행정구호가 ‘기아퇴치’였다고, 기아퇴치.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들려는 게 우리들의 비통한 소망이었지. 근데 우리는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그러니까 그 시대의 박정희 대통령이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든 것이고 우리는 그 밑에서 노예처럼 일했어요. 마소처럼 일하고 개처럼 짓밟히면서 일해가지고 밥 먹는 나라를 만든 거예요.”

홍:전후의 상황이라는 게 대부분이 가난했고 저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나마 조금 나은 축에 속한다고 할까. 고등학교 때까지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해서 빨리 출세를 하나 하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영어보다 수학을 잘해서 이과를 갔고 공대에 들어갔는데, 바로 대학 들어간 해에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 내 가족이 6.25 당시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던가를 통해서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어요. 아까 ‘기아퇴치’라고 하셨는데 전 그에 관한 기억은 별로 없고 대신 학교 담벼락마다 붙어 있었던 ‘반공방첩’이라는 구호가 아주 강력하게 남아 있어요. 저 역시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 구호를 저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였는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 가치관이 붕괴되고, 그래서 공대고 뭐고 다 재미없어지고 방황하게 된 시기가 바로 20대 초반이었어요.”

김:전 대학 졸업을 못했어요. 영문과를 다니다가 중퇴를 해버렸는데, 그리고 다시는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고. 내가 그때 학교를 그만둔 것은 돈이 없어서였어요. 등록금이 없어가지고. 그런데 지금 밥 얘기를 더 하자면, 밥을 먹는 세상을 만들어 놨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악과 억압과 비리를 저질러 가지고,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에요. 야, 밥을 먹는 것에 대한 무서운 대가가 바로 그거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죠.

노무현 대통령은 아마 우리가 밥을 먹는 과정에서 벌어진 구조적인 악들에 도전했다가 참패하신 것 같아요. 그분이 참패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을 개조하고 거기에 도전하는 일은 차기 정권의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계승해 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박정희, 이승만 이후로 깔려버린 구조화된 악과 억압이라는 것은 정말로 만만치가 않은 것이죠. 노 대통령 같은 낭만주의나 대중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힘으로도 그것은 부술 수가 없는 훨씬 더 뿌리깊고 강한 구조적인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어요. 이만큼 생각한 것도 나로서는 상당히 사고가 진보된 것이죠. 그 전엔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웃음)

: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요. 저는 노무현 대통령과 그 지배세력들이 민중이나 이런 걸 표방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명분과 실리를 같이 취하려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죠. 그것이 물론 지금까지 말슴하신 대로 축적된 모순과 60년 가까이 수구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물적 토대, 각 부문별로 결합되어 있는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국민이 변화를 요구하면서 노무현 정부를 세웠던건 사실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과반수의 국회의석도 주었고. 근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결국 자기를 뽑은 민중을 스스로 배반한 결과라고 저는 생각하죠.”

박정희에서 노무현에 이르는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에서 두 사람은 예상 가능한 차이와 뜻밖의(?) 공감대를 보였다. 두 사람이 공감대를 이룬 바탕에 <한겨레> 입사동기라는 인연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이쯤 해서 2002년, 두 사람이 <한겨레>에서 한솥밥을 먹던 시절로 거슬러올라가 보았다. 두 사람은 어떤 계기로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한 것일까.

김: “당시 저는 혼자 구석방에 들어앉아서 책만 읽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유령 같은 인간이 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위기를 느꼈어요. 어디론가 다시 삶의 현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나 자신이 괴멸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시 김종구 사회부장(현 편집국장)에게 찾아가서 채용해 달라고 부탁했죠. 신문사에 들어갔더니 월드컵의 대규모 거리 응원이 벌어지고, 그 다음에 효순이 미선이 사건, 이어서 대통령 선거까지 대중들의 힘의 폭발이 이어졌어요. 월드컵은 놀라웠죠. 난 그런 대중의 힘을 처음 봤어요.

대중의 힘은 매우 맹목적인 것 같기도 했는데, 효순이 미선이 사건에 이어 대선까지 그 분위기가 이어지는 걸 보면서 ‘난 다시 집으로 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내 밀실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대통령이 당선되던 그 다음날 사표를 내고 <한겨레>를 떠났죠. 미선이 효순이 사건, 그것은 범죄는 아니었죠. 사고였어요. 그런데 그것을 범죄로 몰아가고 결국 반미주의로까지 끌고 나가는 일련의 흐름에서 <한겨레>는 자기의 사명을 다했죠. 그 과정을 바라보면서 ‘내 생각하고는 상당히 다른 사람들의 집단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이 나와 <한겨레>의 큰 갈등이었어요.”

홍: “저는 프랑스에 머물다가 귀국하게 된 계기가 바로 <한겨레> 입사였어요. <한겨레>에 입사하기 위해서 귀국한 것이죠. 그런데 저는 처음 들어올 때부터 어떻게 해서든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죠.”

김: “심하다, 심해.” (웃음)

홍: “미선이 효순이 사건은 말씀하신 대로 사고인 게 분명하죠. 그런데 만약 미군쪽에서 처음부터 그것에 대해서 그야말로 점령군이 아닌 평등 차원에서의 선언이나 이런 것이 나왔다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미 간의 구조적인 문제, 역학 관계에 대한 인식을 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는 <한겨레>가 역할을 하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감정적 부분을 동원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 때문에 점령군이라는 미군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죠.”

김: “그것은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결과도 되었으리라 생각해요. 효순이 미선이 사건은 앞으로도 언론의 보도와 관련해서 고통스러운 전례를 남긴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고를 계기로 미군과 미국측의 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생산적인 결과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대중의 이성이 매우 교란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홍: “그것은 참 어려운 문제죠. 우리처럼 지독한 미국중심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회에서 대중의 이성은 벌써 오랫동안 마비되어 온 것이 사실이거든요. 거기에서 어떻게 균형감각을 가지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게 무척 어려운 지점이죠.”

김: “아까 소통에 관해 말씀하셨죠. 제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의 말들이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과 의견이 뒤죽박죽이 되는 일이 많아요. 의견을 사실처럼 말해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당파성이 지향하는 바의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언어의 소통기능은 점점 마비되고 언어는 무장하게 되는 것이죠. 무장된 언어가 사회를 막 교란하고 뒤집어엎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말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시대 언어의 풍경인 것이죠.”

홍: “동의합니다. 예컨대 인터넷이 활성화하면서 마치 인터넷이 쌍방향간의 소통의 장이 열린 것이다 라고 하지만 저는 회의적입니다. 토론이란 자기 견해를 밝히는 것뿐 아니라 남의 견해도 들으면서 자기 견해를 수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바로 배설해버리는 식인 것 같아요. 그것은 집단의 외피를 쓴 이기적인 개인들의 뻔뻔한 때문인 것 같아요. 집단의 뒤에 숨어 있는 개인들이 문제인 거죠. 그리고 그게 다 경제지상주의적 가치관 때문인데, 경제사회에서 문화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토론과 교육, 소통에 기댈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요.”

김: “민주사회에서 공동체적인 가치를 위해서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고,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토대 위에서 이 사회는 이루어진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전개되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홍: “그와 관련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관해 조금 말해 보죠.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가장 중요한 건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해야 하는 점이라고 봅니다. 특히 농촌의 피폐화가 걱정이에요.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나,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 그야말로 무서운 변화가 올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한 성찰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죠.”

김:저는 한 나라는 이념이 아니라 이득을 추구해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국가의 도덕성이라고 생각해요. 국가가 이익을 이행하는 것은 도덕적인 일은 아니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부도덕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도덕이나 부도덕을 말할 수가 없는,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이득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참 따지기 어려운 것이죠. 나는 우리 정부가 그것이 결국 이득이 되게끔 앞으로 그걸 헤쳐 나가야 하고 그 이득이 제발 국민 각계각층에 골고루 미치는 이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죠.

난 자유무역협정은 잘했다고 생각해요.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 다음에 <한겨레>가 노무현 대통령의 이념의 일관성을 집요하게 시비한 적이 있었어요. 노무현이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진보의 일관성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를 따지는 것은 참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그런 기사가 나올 때 <한겨레>를 좋아하지 않아요. 다만 농민이라는 한 계층 전체를 희생시키면서 이걸 추진한다는 것은 참 무리하고 부당하고 부도덕한 측면이 조금 있어요. 그에 대해서는 정부의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마땅하죠.”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와서 다시 부딪쳤다. 얘기가 다시 격렬해지려는 참에 마침 찻집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 대신 적포도주가 곁들여지면서 좀 더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두 사람은 음식을 앞에 두고 다시 배 고팠던 지난 시절을 회고한 다음, 요즘 젊은이들이 소중한 청년기를 너무 소홀히 보내는 것 같다는 데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찍었다는 김훈씨가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를 표한 것은 다소 뜻밖이었다.

김: “저는 노무현 대통령께서 정말 약자의 편이 되기를 바랐어요. 전 노 대통령 치하에서 세금 많이 냈습니다. 세금 낼 때 기분이 좋았어요.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책을 써서 인세를 받아서 세금을 많이 낸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어요. 저는 의료보험도 많이 냈어요. 우리 시대의 분배에 기여한다면 정말 좋은 일이죠. 그런데, 신문 보니깐 아니더라고. 강남의 성형외과 의사, 소득세 50만원 올렸다고 시위하고 말이죠. 우리나라 조세정책은, 대통령의 리더십은 거기서 망가지는 것 같더라고요.”

홍: “그렇게 당연히 사회에 내놔야 되는 사람들이 정작 내놓지 않는 그 문제에 대해서 당연히 분노해야 되는 것이죠.”

김: “저 분노하고 있어요.”

홍: “분노의 방식이 문제인데요. 분노가 어떻게 표현되고,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요.”

김: “그건 권력이 해야죠. 정치권력이.”

홍: “한국과 같은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대 언론과 기득권 세력이 버티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력이 그런 일을 순조롭게 하리라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닐까요?”

김: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저는 <한겨레>가 기본적인 객관성을 가지길 바랍니다. 부는 악이고 빈이 선이다, 라는 이분법을 버려야죠. 노동은 선이고 자본은 악이다, 그런 이분법적 정서가 있는 거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 안해요. 지금 한국 노동의 문제는 노동세력 타락의 문제예요. 노동귀족들의 타락에 국민들은 절망하고 있죠.”

홍: “그걸 과연 노동귀족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구요. 또 하나, 한국 사회에서는 타락할 권리가 있는 사람과 타락할 권리조차 없는 사람으로 나뉘어진다고 봅니다. 어느 자리에 서면 다 타락합니다. 타락하게 되어 있어요.”

김:홍 선생의 전공이 ‘똘레랑스’입니다만, 똘레랑스라는 건 본래 보수주의자의 것이었어요. 우리가 빼앗긴 거죠. 보수주의의 관용 안에서 많은 걸 해결할 수 있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구요. 그런데 그걸 놓친 거예요. 보수주의자가 타락해서 자기 기득권만 방어하면 된다, 이런 식이 되면서 망하게 된 거죠.”

홍: “‘똘레랑스’의 어원 자체가 참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관용이라고 하기보다는 용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차이를 받아들인다는 거죠. 가장 정확한 것은 사자성어 ‘화이부동’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똘레랑스’를 이야기하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바로 수구세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앵똘레랑스에 대한 반대라는 측면이었습니다.”

김: “저는 우리 현행법에 모든 정의와 개념이 있다고 생각해요. 법치주의를 완성해야 합니다.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똘레랑스’도 이루어질수 있다고 봅니다. 법치주의를 깨자고 들면 곤란하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죠. 인간의 능력이나 경제적 처지가 평등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죠. 다만 법률 앞에 평등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홍:김 선생과 저는 사회를 관찰하고 해석하고 데에서는 많은 부분 일치하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데에서 갈라지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우리 사회에 힘의 논리가 관철될 때 기본적으로 그 힘은 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 법조차 힘의 논리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부와 빈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한겨레> 논조가 부는 악이고 빈은 선이다, 그런 것은 아니죠. 그것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빈곤이 죄악시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사물이라고 봅니다.”

김:가난은 탈피할 대상이지 장려 대상은 아닙니다. 옹호할 가치는 아니죠. 가난에 선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우수한 것은 아니에요.”

홍: “우리가 공화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때, 그 핵심이라 할 애국주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한 사회에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위함을 받았다는 경험 때문이 아닐까요. 한국에서는 그런 경험이 없죠. 끝없이 관리통제의 대상이 될 뿐이죠. 자발성이 없는 거예요. 이를테면 무상교육 얘기를 해 보죠. 그것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육자본 형성 비용을 사회가 대준다는 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계층간 연대와 세대간 연대가 이루어진다는 데에 핵심이 있는 겁니다. 소득이 많은 사람이 소득이 적은 사람의 비용 대주는 것이 계층간의 횡적연대라면,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을 가령 국민연금 같은 형태로 돌려주는 것은 세대간의 종적연대라 할 수 있는 것이죠. 나로 하여금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윗세대가 은퇴할 때 그들에게 지금의 경제활동 인구가 받은 것을 되돌려준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죠.”

식당 역시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벌써 여섯 시간이 훌쩍 넘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보는 세상과 <한겨레>에 대해 열변을 토했지만, 초반과 같은 팽팽한 긴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포도주로 불콰해진 얼굴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보였다. 김훈씨가 대담을 마무리하는 발언을 했다.

김: “저는 사실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우리 둘이 매우 다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말을 나누어 보니 기본은 같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방향은 정말 달라졌네요. 그도 그럴 것이 삶의 여정이 매우 달랐잖아요. 그런 만큼 서로를 더 존중하고 긍정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의 바탕이 천진해야 해요. 천진성이 있어야죠. 천진성이라는 게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거잖아요?”(정리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김훈-홍세화 특별한 만남

김훈씨는 <한국일보> 기자와 <시사저널> 편집국장 등을 거쳐 <한겨레>에서 사회부 경찰 출입 기자로 일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에 이어 최근 새 장편소설 <남한산성>을 발표해 서점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받았다.

홍세화 기획위원은 오랫동안 프랑스 파리에 머물다가 2002년 한겨레신문사 입사를 계기로 귀국했다. 편집국 부국장 겸 편집위원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한 뒤, 지금은 기획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등의 시평집을 냈다.

07.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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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5-1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씨는 1948년생이 대학영문과씩이나 다녔으면 사회에서 받아먹을 건 받아먹었다고 생각해야 할 텐데 기본전제가 문제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졸업 못한 걸 엄청 사회적 약자기라도 했다는 식으로 강조하는 건 술 친구들한테나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 2분법이 있어서, 이런 기본 판단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자기가 사회적 약자라면 무한히 밥벌이 얘기를 강조해야지 사회적 책무 얘기는 비교적 개인적인 공간에서 하는 게 좋다고 봐요. 반대로 자기가 사회적 혜택을 좀 받아먹었다고 할 만하다면 밥벌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술먹고 개가 됐을 때나 해야지 공개적인 자리에서 찍찍 하면 안 된다고 봐요.
김훈은 자기가 사회적 약자라는 이미지를 너무 유포해요. 고대 중퇴해서 약자고 총이 아니라 펜을 가졌기 때문에 약자고 하는 식으로
 

달빛에 집 주변을 넋놓고 걷다
[발로 뛰는 진보정치 현장] 배고픈 아이들을 어떻게 할까

통계청 자료가 보여주는 현실은 냉혹하다. 전국 가계조사에 따르면 최저생계비 이하 아동 빈곤율은 8.8%. 아동 10명중 1명꼴로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한 부모 가정 빈곤율은 더 높아져서 12.7%, 65세 이상 노인과 18세 미만 아동으로 구성된 조손(祖孫) 가정은 48.5%에 이른다.

설문조사 결과 부모의 빈곤으로 결식 아동의 낙인이 찍히고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는 응답 아동의 97%에 이른다. 참으로 슬픈 통계다.

슬픈 통계, 가난한 아이들

민주노동당 마포구위원회는 현재 중앙당 환경위원회와 함께 지역에서 빈곤아동 영양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학교의 경우,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에서 공문을 보내서 진행됐고, 마포구위원회는 지역 아동센터를 직접 방문해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지역아동센터는 예전에 공부방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현재 대부분 저소득층 아이들이 방과 후에 함께 지내는 곳이다. 이제까지 모두 네 곳의 지역아동센터를 방문해서, 교사와 센터장을 만났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밀조밀하게 모여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꾸려가는 공간.

설문조사를 통해 중앙당, 의원실과 협조해 반드시 빈곤아동에 대한 개선안을 내겠다고 말은 했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설문조사는 하는데, 나아지는 건 별로 없다”라는 씁쓸한 답변이 돌아와 나를 비롯한 상근활동가를 무안하게 만들었던 곳이다.

사무국장의 제안

어느 날 사무국장이 제안을 한다. “제가 희망나눔에 알아보니까 아이들이 보건소에 가서 단체로 건강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보겠다고 하는데, 한번 시도해 보는 건 어때요.”

희망나눔은 민주노동당 마포구위원회와 지역 시민단체와 주민, 그리고 지역 내 의사들이 함께 모여서 무료건강검진 등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활동하고 있는 단체다. 현장에서 조사된 사안을 가지고, 지역 단체들과 협력해 관을 이용한 사업을 펼친다면 대단히 의미가 깊을 거라 판단하고 일을 진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보건소에서 건강검진을 실시하겠다는 답변이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당 버스를 빌려서, 아이들을 보건소까지 데리고 가는 것. '그래 이왕이면 당 버스가 가야 한다.' 당 버스를 운행하는 최영기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 동안 마포지역에서 와 줄 것을 부탁했다.

“아, 그럼 그런 일에 당 버스가 가야지. 무조건 갈 테니 염려 마.” 최 국장의 시원한 답변이 내 기분을 한껏 즐겁게 만들어준다. “선배님, 아이들하고 약속한 거니까, 꼭 오셔야 합니다.” 다짐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이 나서 해보는 소리다.

   
  ▲ 무료건강검진을 실시하던 날 마포구청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의 환한 웃음이 더욱 가슴 시리다.
 
보건소 아이들 무료 건강검진해 줘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를 들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마포구청 내에 있는 보건소에 들어가는 당 버스. 보건소에 들어가 담당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 건강검진을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보건소에서도 “이런 일이 있으면 앞으로도 협조 하겠다”며 언제든지 오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가 방문했던 아동센터에 있는 아이들의 수는 적게 잡아도 200명 이상은 된다. 오늘은 10여명에 불과했지만, 이후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역사업을 펼칠 때, 다시 시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동 전문가들은 최저 생계비 이하 빈곤아동이 100만 명 정도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의 먹거리 문제는 특히 심각한 상황이다. 사람은 아침, 점심, 저녁을 먹는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결식아동 급식지원은 학교 밖에서 이뤄지는 보건복지부의 아동급식 지원사업과 학교 안에서 이뤄지는 교육부의 학교급식비 지원 사업으로 구분된다. 쉽게 말해서 학기 중 점심은 교육부에서 아침, 저녁과 방학 중에는 보건복지부가 결식아동에 대한 급식을 담당한다는 얘기.

이수정 민주노동당 서울시 의원의 행정사무감사 자료에 보면, 지난해 서울시교육청 관내 학교의 학교급식비 지원학생은 초중고생 71만1,230명 중 9만215명으로 전체 학생의 6.2%에 달한다. 전년도와 비교해 보면 약 1만4,000명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아침은 먹는지, 저녁은 먹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같은 해 9월, 아침, 저녁을 서울시와 자치구로부터 지원받는 결식아동은 2만2,577명으로 작년 2만9,643명에 비해 오히려 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청은 9만215명을 지원하고, 지자체는 2만2천577명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건 차이가 나도 너무 나지 않는가. 지자체 따로, 교육청 따로 행정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빈곤아동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등록된 아동의 4분의 1만 지자체에서 지원을 하고 있는 상황. 그러면 나머지 4분의3에 해당하는 빈곤아동은? 아무도 모른다. 아침은 먹는지, 저녁은 먹는지 알 수 없고, 방치될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는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누가 지역에서 숨죽이고 있는 빈곤아동을 밝혀내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까.

물론 빈곤아동에 대해, 단순히 먹거리 문제로만 접근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박경양 전국지역아동센터 공부방협의회 공동대표도 "결식아동의 문제는 '빵'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정서적 지원과 함께 가족지원, 학교적응지원 등 복합적 지원이 필요한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나 빈곤아동에 대한 급식지원 실태를 통해, 정부와 지자체의 빈곤아동 정책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는 분명히 있다.

봄날은 아름답고, 현실은 냉혹하고

돌이켜 보면, 아이들과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가 봄 소풍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순전히 내 주관적인 느낌이었다. 지역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자족이 컸겠지. 게다가 당 버스까지 왔으니 얼마나 멋져 보였겠는가. 하지만 실제로 보건소에서 조사된 아이들의 건강 수치를 보고도 소풍처럼 느껴졌을까.

한 소설책 말미, 한 문장을 보고 요즘도 늦은 시간 달빛을 희롱하며 집 주위를 넋 놓고 산책하게 됐다. “우리에게 다시 골목 가득 꽃향기를 담고 봄밤이 당도했으니!”

아침에도 낮에도, 봄날에 취해서 살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허나 현실은 언제나 냉혹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마냥 찬탄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언제쯤이 되어야 우리에게 봄밤의 서정은 평등해 질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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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5-1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분 공감하고 감탄스럽지만
평등한 사회로의 길과 개인의 선의 사이의 아득한 거리감에 늘 곤혹스러울 뿐입니다. 물론 기관과 정당의 협조가 있었지만 일의 출발은 개인의 선의였으니. 국가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군요. 어떤 대안의 차원에서 시도된 일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전한 한계로밖에 보이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좀 더 획기적인 기획과 시스템을 갖춰 정례적인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텐데요.

기인 2007-05-1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국가라는 것이 일종의 재현시스템이라면, 재현되지 않고 억압되는 목소리들.. 이를 재현하려는 노력.. 사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지 않을까요.. ^^
 
 전출처 : 로쟈 > 일본의 근대성에 대한 에세이

동국대 대학원신문에 게재된 리뷰 하나를 담비에서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idxno=1604&rsec=MAIN§ion=MAIN). <일본 근대 독자의 성립>(이룸, 2003)의 저자인 일본의 근대문학 연구자 마에다 아이의 연구논문들이 지난 2004년에 <텍스트와 도시: 일본의 근대성에 대한 에세이(Text and the City: Essays on Japanese Modernity>(듀크대출판부)로 영역되었다고 하는바 이 책에 대한 소개이다. 리뷰의 내용이 흥미로워서 옮겨놓는 것인데 이왕이면 번역/소개되었으면 싶다. 근대성(모더니티)과 관련하여 이정표가 될 만한 도시를 넷만 꼽자면 파리, 페테부르크, 뉴욕, 그리고 도쿄 정도가 아닐까 싶고(물론 더 많은 도시들이 거기에 덧붙여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시들에 관한 연구서들은 좀더 많이 소개되면 좋지 않을까 한다(발터 벤야민, 데이비드 하비, 마샬 버먼 등의 책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서울, 부산, 인천 등에 관한 연구서들도 좀 나와주고. 마에다 아이의 책이 자극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동국대 대학원신문(141호) 마에다 아이의『텍스트와 도시』

'근대독자의 성립'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마에다 아이(前田愛)는 '도시 공간 속의 문학', '히구치 이치요의 세계', '마에다 아이 저작집' 등을 통해 일본 문학과 문화에 관한 주목할 만한 비평과 연구를 남겼다. 안타깝게도 지난 1987년 55세의 나이에 요절한 그는 메이지 시대 출판문화와 근대 문학의 성립을 살핀 메이지 근대 문학 연구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일본 근대 문화에 대한 탁월하고 개성적인 관점의 비평을 수행한 문화비평가로서도 유명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임스 후지에 의해 편집, 해설되고 해리 하루투니언의 서문이 실린 '텍스트와 도시(Text and the City)'는 메이지 시기 일본 문학 뿐 아니라 근대성과 도시의 관련성에 주목하는 문학, 문화 연구자들에게는 유용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근대성에 관한 소론’이라는 부제를 단 '텍스트와 도시'는 마에다 아이의 여러 저작 중 '도시 공간 속의 문학'을 중심으로 도시 공간에 대한 연구물들을 모은 앤솔러지 형식의 저서이다.

이 책은 크게 4개의 장, 11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감옥의 유토피아’, ‘개화의 파노라마’, ‘폐원의 정령’으로 이루어진 1장은 〈빛의 도시, 암흑의 도시〉라는 테마 아래 도시의 명암을 다루고 있으며 ‘아이들의 시간’, ‘극장으로서의 아사쿠사’, ‘다이쇼 후기 통속소설의 전개’로 구성된 2장은 〈놀이, 공간, 그리고 대중문화〉라는 테마 아래 요시와라와 아사쿠사의 어두운 활력을 다룬다. ‘음독에서 묵독으로’, ‘근대 문학과 출판의 세계’로 이루어진 3장 〈텍스트, 공간, 시각성〉은 근대 독자의 성립과 출판에 관한 문제를, ‘파리의 류호쿠’, ‘베를린 1888’, ‘야마노테의 오지’를 담은 4장은 〈도시공간의 경계를 가로지르기〉라는 테마 아래 도쿄를 비롯하여 파리와 베를린 등의 도시를 해석한다.

경계를 설정하고 고립된 구역을 상정하는 중세 유럽의 도시상은 “격리와 징벌의 장치로서의 감옥”과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약속하는 유토피아의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흥미로운 발상으로 시작되는 마에다 아이의 논의는 ‘개화의 파노라마’에서 도쿄라는 도시가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가를 4개의 텍스트를 통해 주의 깊게 탐색한다.

그는 우선 메이지 시기 유명한 작품인 고바야시 키요치카의 ‘도쿄명소도’(1876)에 묘사된 국립제일은행의 모습을 통해 키요치카의 문명개화에 대한 감정을 읽어낸다. 에도의 구도시에서 태어난 키요치카로서는 메이지 초기의 문명개화라는 격변은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담아내고 있는 것은 과거의 공간, ‘물의 도시’ 에도에 대한 풍부한 기억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에 비해 비슷한 시기의 베스트셀러였던 핫토리 부쇼의 '도쿄신번창기'(1874)는 ‘물의 도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육지의 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물의 도시’ 에도가 점차 해체되며 ‘육지의 도시’ 도쿄가 구축되는 변화를 알려준다.

사이토 게신의 에도 관광 책자인 '에도명소도회'는 에도라는 도시를 사당, 신전, 그리고 역사적 자리와 같은 상징적인 장소들로 구성한다. '에도명소도회'에서 에도는 성스러운 것이 전면에 등장하는 “신화의 공간”으로 해독되는 것이다. 반면 테라카도 세이칸의 '에도번창기'는 스모, 요시와라, 극장과 같은 비일상적인 것들에 주목함으로써 일상의 세계와 비일상의 세계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마에다의 이러한 공간 성찰은 비단 도쿄에 한정되지 않는다. ‘베를린 1888’에서 그는 모리 오가이의 '무희'를 통해 베를린의 도시 공간을 탐사한다. '무희'의 주인공 도요타로에게서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베를린에 도착한 동양의 한 젊은이가 유럽 문명의 정화를 조국에 전달하겠다는 강렬한 사명감이다. 더불어 그는 이 대도시가 지닌 장관에 압도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매력적인 외부의 경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거듭 다짐을 하게 만드는 것이 운데르 덴 린덴의 대로라면 엘리스의 다락방이 있는 크로스텔가는 베를린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이 크로스텔 거리는 옛 베를린의 암울한 이미지를 상징하며 운데르 덴 린덴에 대치하는 장소가 된다. 이것은 메이지 후기의 개인이 자각하게 된 내면의 어둠, 즉 개인의 고독에 관한 공간의 아날로지이다.

'텍스트와 도시'의 특징적인 점은 오가이의 '무희' 소세키의 '문'과 같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 뿐 아니라 키요치카의 판화 ‘동경명소도’를 비롯, 메이지 시기 사절단의 공식기록물이던 '미구회람실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텍스트들을 해석의 자리에 동참시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텍스트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메이지 시기 전후의 ‘오래된’ 텍스트들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구성한다.

마에다의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대립항의 계열로 이루어진 도시의 속성이다. ‘개화의 파노라마’에서 이루어지는 물의 도시/육지의 도시, 신성의 공간/놀이의 공간으로서의 도쿄 읽기, ‘폐원의 정령’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세계/어머니의 세계, ‘베를린 1888’에 나타난 운데르 덴 린덴/크로스텔 거리라는 구분들은 이를 잘 나타낸다. 그가 설정하고 있는 이러한 대립항은 결과적으로 성과 속의 연관, 정과 부의 교호, 근대와 반근대의 친연성에 대한 반증이다. 이러한 대립항은 메이지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격변과 조우한 개인들의 착잡한 내면의 풍경을 다양하게 읽어내려는 마에다의 개성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론인 것이다.

마에다 아이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도시가 지닌 빛과 암흑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면서 근대의 새로운 풍경에 당면한 다양한 개인의 활력과 좌절을 함께 포착해내고 있다. 출간된 지 20여년이 된 그의 저서가 지난 2004년 해리 하루투니언, 미요시 마사오와 같은 미국 내 대표적인 일본 연구가들에 의해 영문판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텍스트와 도시'가 지닌 다양한 장점이 미국 내 동아시아 문화연구에 있어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일 것이다.(김문정 동국대 강사)

07.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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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ephistopheles > 삐져서 이벤트 합니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116682

삐질 일이 생겼습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책을 한권 접하고 감동했습니다.
인지도가 낮은건지 아님 글빨이 바닥을 치는 제 리뷰가 문제인지 도통 관심대상이
되질 않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추태까지 선보였는데도 불구하고..흑흑...

Mephisto
어머 이렇게 아름다운 책에 관한 리뷰에 댓글이 하나도 없다니..속상하네 거참~~ - 2007-05-15 14:23 수정  삭제

그래서 삐진 기념으로 이벤트 합니다.
단순하게 숫자잡기 이벤트로 합니다.

52525를 잡으시는 2번째 분과 5번째 분께 무조건 원인이 된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난 죽으면 죽었지 저 책은 싫어..! 하신다면 진짜로 삐질 껍니다. 흥!

뱀꼬리1 : 3번째 이벤트 당첨자도 존재합니다..
뱀꼬리2 : 저는 저 책의 저자와 출판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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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끄러움은 아직 무덤에 가지 못한다
  [김명인 칼럼]5.18광주학살/항쟁 27주년을 맞으며
  2007-05-15 오전 8:41:11
  며칠 뒤면 5.18 광주학살/항쟁 27주년이 돌아온다. 내 기억 속의 광주는 아직도 늘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한 세대 이전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80년대 후반생들이 대부분인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5.18은 너무 오래 전 일이라 3.1절이나 4.19 등과 구별이 잘 안 되는 교과서 속의 아스라한 옛일로 받아들여진다. 하긴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77년은 6.25가 27주년을 맞았던 해인데 그때 내게도 6.25는 조금 과장하자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로 받아들여졌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정보의 과잉 속에 살고 있는 요즘 세대들이 그저 5.18이 대강 무엇이었다 정도만 알고 있어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나마 6.25는 우리가 자라던 내내 '상기하자 6.25!'라는 반복되는 냉전적 훈육과 주입을 통해 늘 강박적으로 호명되던 기호였지만 '상기하자 5.18!'식의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는 요즘 세대들에게 5.18도 모르냐고 퉁박을 주는 것조차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거대한 기념공원과 연례적인 국가의례와 보상과 교과서 수록 등으로 이미 국가적으로 전유된 공식기념일이 됨으로써 5.18은 그 본연의 선연한 핏빛 아우라조차 안전하게 박제처리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얼마 전 5.18민중항쟁 서울시 기념사업회라는 단체가 주최한 5.18 민중항쟁 기념 서울시 청소년 백일장 및 사생대회 운문부 장원을 차지한 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작품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이미 많은 네티즌들이 그 작품을 각자의 블로그에 퍼 담았고 게시판마다 화제가 된 듯했다. <그날>이라는 제목의 그 작품 전문을 일단 인용해 본다.
  
  그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제.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얘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제.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 있데. 어린 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 보고야, 라디오도 안 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시적 화자의 '그날'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능숙한 전라도 사투리의 막힘없는 흐름 속에서 (물론 '놈'보다는 '아그'라는 아랫사람에 대한 전라도식 애칭을 사용했으면 더 완벽했겠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훌륭한 산문시다. 서울 강남에서 여고 3학년에 다니는 18세의 여학생이 어떻게 해서 이런 구체적 서사성을 획득한 시를 써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여학생의 부모나 부모세대의 친지가 들려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시위를 하다가 계엄군에 쫓겨 다급하게 지나가던 시적 화자의 자전거 뒤에 올라탄 고등학생과 그를 잡아가기 위해 둘 사이의 관계를 묻는 계엄군, 겁이 나서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말해버린 화자, 결국 그 학생 '어린 놈'은 끌려가고 아직도 그날 그 부끄러운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화자…. 상황의 급박한 속도감과 전라도 사투리의 느린 전달감이 절묘한 엇박자를 이루는 가운데 "갑시다 갑시다"라는 절박한 청유가 지금까지도 긴 여운을 남긴다.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 불리는 그 학살과 항쟁의 기억은 수많은 학술대회와 추도사와 공식 기록 속에서 이제 한국민주주의의 권화로, 민중항쟁의 기념비로 남게 되었지만, 사실 그 순간을 함께 살았던 구체적인 인간들에게는 그날 생사의 기로에 선 희생자들이 내뻗은 "갑시다"라는 간절한 연대의 손짓을 받아들이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 어떤 기념비도 호사한 무덤도 교과서도 결코 덮지 못한다.
  
  더구나 그 시절 한때 그 기억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특권화하고 그것을 한갓 '저항의 추억'으로 화석화하는, 배에 기름 낀 운동베테랑들의 그 어떤 회고담도 그 부끄러움을 장송할 수는 없다. 설사 학살원흉이 밝혀져 그날의 구호처럼 그 원흉을 '찢어 죽일' 수 있게 되더라도 그 부끄러움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광주학살/항쟁을 27년이 지나도록 현재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부끄러움은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렇게 절망적 상황에서 고립된 채로 고통받거나 죽어가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실천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존재들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 80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인권사각지대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고투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 온갖 투기적 개발에 의해 생존의 경계 밖으로 떠밀려 나가는 사람들….
  
  사실은 다수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타자화되고 주변화되어 소수성을 강제당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에게 그때 광주에서 처절하게 고립되어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 남았어야 했던 광주시민들은 지금도 생생한 메타포가 아닐 수 없다. 그날이 남긴 부끄러움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지속되고 있는 이 저강도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한 광주학살/항쟁의 기억은 그저 '추억'으로 남아 연례적 기념행사 속에서 서서히 묻혀갈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우리가 몰고 가고 있는 자동차 뒷좌석에 황급히 뛰어들어 '갑시다, 같이 갑시다'하고 울면서 절박하게 외치고 있는데 우리는 당신 누구냐고 빨리 내 차에서 내리라고, 나는 당신 아는 바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한 어린 여학생의 시 한 편을 읽으며 나는 진땀을 흘리면서 자꾸 내 등 뒤를 돌아본다.
   
 
  김명인/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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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5-1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말입니다..가끔 포탈 사이트에 올라오는 개념 무탑재 댓글들을 보면
기분이 착잡해집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은 빨갱이들의 좌익선동이였다고
떠드는 내용이 불특정 다수에 의해 자꾸 거론되는 내용인데...세상이 어찌
돌아가나 모르겠어요..

책읽기는즐거움 2007-05-1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phisto/// 엥..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불특정 다수가 있나요?
(아닌줄 알면서도)장난으로 올리는 댓글이 아닌 진심이 담긴 댓글이라면 이건 정말 충격인데요,,,,,
평소에 네이버기사 댓글보면서도 '이건 대체로 장난이야'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대부분의 댓글을 보던 저로서는 진심으로 그러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해준 Mephisto 님의 댓글 이네요....ㅋ

Mephistopheles 2007-05-15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voiceofpeople.org/new/news_view.html?serial=63945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기인 2007-05-15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기사 감사드립니다..
저 시가 계속 마음에 울리네요..

바라 2007-05-19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이제서야 보다니..; 퍼가서 볼게요. 감사합니다(요새 많이 바쁘신가봐요?)

기인 2007-05-19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하는게 너무 많아지고, 더 게을러져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