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인 최인훈 전집 2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까지, 후배들을 만나면, 작품도 읽어야 하지만, 이론을, 세계관을 세워라 라는 충고(?)를 하고는 했다. 요즘 애들(?)은 너무 '이론서'를 안 읽는다는 생각 때문.

물론 이는 모두 문학을 공부하는 친구들에 해당되는 이야기. 나머지 대다수는 고시나 취직공부를 하고 있으니, 문학 공부하는 후배들에게만, 계속 나는 그런 충고를 하고는 했다.

석사논문을 쓰고나서도 많이 아쉬웠던 점이, 이론이었다. 석사논문 제출한지 1년이 지난 지금동안, '작품'을 본격적으로 읽어본 적이 없다. (즉 세미나의 형태로, 공부의 형태로..) 되는대로 '취미'로만 읽어왔기 때문에 현시대의 작품들, 국외의 작품들을 위주로 읽으며, 국문과 6년 생활에 대한 '해방감'마저 느꼈을 정도.

그런데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특히 지금 나와 대학원 '속'에 있는 석사과정, 박사과정 친구들과 비교해보았을때, 역시 작품을 폭넓게 읽어보는 것이 문학 공부에 필수적인 일이고 일차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나름의 지형도를 그릴 수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뭐, 그런 의미에서 최인훈이라는 작가는, <광장>으로 한국문학계에 대형'사고'를 친 조숙한 천재형이며, 그 후로도 최인훈'류' 소설들은 찾아보기 힘든, 한국문학사의 사건이다. 그의 희곡 또한 특이하고..

이 회색인은 역시나 재미있다. 조숙한 천재 (27~28에 발표된)의 관념소설. 다양한 담론들을 등장시키고 충돌시키면서, 자기조롱, 풍자가 숨겨져 있다. 나는 이 자기조롱이나 풍자에 대해서 탐구해보고 싶고,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소격효과라랄까, 최인훈 소설이 희곡으로 나아가는 과정 등이 탐구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지식인, 헤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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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6-09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도 최인훈 연구한 사람들이 있어서, 조금 살펴보니, 연구가 꽤 축적이 많이 되있다..
 

변정필 기자 bipana@jinbo.net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인가? 중국의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누구일까?

사실, 이 문제는 답하기 쉽지 않다. 특히, 자본이 고용을 무기로 공장이전 협박을 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중국 노동자의 존재’는 고용을 앗아가는 위협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서 중국의 노동자들을 연대의 대상보다는 경쟁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팽배해 보인다.

지난 몇 년간 중국의 노동문제에 집중해왔던 마틴 하트 랜스버그 경제학 교수는 민중언론 참세상과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중국 자본 축적과정을 살펴본 결과, 중국 경제성장은 초국적 자본의 동북아 생산 시스템 및 자본축적의 변화로 인한 것이며, 그 결과 중국을 정점으로 동아시아 각 국의 경제가 더욱 미국 의존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엄청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늘어난 것은 비정규직 일자리일 뿐이며, 제조업 정규직의 일자리 증가는 지난 15년간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다.

더욱 중요하게 마틴 하트 랜스버그 교수가 주목하는 점은 중국 경제가 수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초국적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이 과정에서 노동에 대한 통제력을 중국정부가 상실했다는 점이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그 동안 중국 문제에 대해서 집중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문제는 무엇인가?

내가 중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세 가지 이다.

하나는 중국이 너무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세계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히 커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진보 세력사이에서 중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등장하면서 혼란해 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시장사회주의인가, 새로운 모델인가, 중국이 베네수엘라나 쿠바를 돕고 있고, 미국은 중국을 공격하고 있는데 우리는 중국을 지지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미국에 있는 노동자들이 중국의 노동자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가져간다는 것이다. 아마 한국의 노동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이런 것들이 내가 중국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들이다.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어떤 결과를 얻었는가?

중국과의 거래로 미국 의존도가 낮아진다는 건 오산
"동아시아 경제는 미국에 더 의존적이 돼"

나의 결론은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을 자본주의 국가로 보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더 중요하게는 중국의 경제 다국적 기업 투자가들에 의해서 변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일환이다.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은 더욱 국제화되고 있고, 수출과 수입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수출입의 증가는 주로 부속품 거래의 증가로 인한 것이다. 이 부속품들은 다국적 기업의 생산 영역 안에서 다국적 기업에 의해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점점 더 많은 부품들을 거래하고 있지만, 중국만이 수출 완제품을 엄청나게 생산하고 있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은 서로 간에 그리고 중국과의 무역거래를 점점 더 늘려가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전체 동아시아 지역이 중국으로 정점으로 함께 묶이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일부 한국의 학자들도 ‘이제 한국이 미국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중국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에 많이 수출하게 되면 한국 경제가 더 안정적이고 독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대부분 중국에 팔려나가는 것들은 부속품들이고, 이것들은 완제품으로 만들어져 미국으로 수출되기 때문이다. 통계를 보면, 지역 전체적으로 지역 내로 수출되는 완제품이 예전에는 70퍼센트였지만, 현재는 30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70퍼센트가 지역 밖으로 수출된다는 이야기다. 즉, 이 지역이 미국 시장과 더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미국 시장이 성장하지 않게 되면 이 지역 또한 더 불안정해질 것이다.

두 번째 흥미로운 점은 동아시아 생산이 부속품과 부품에 집중되고, 중국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다른 국가들이 초국적 기업을 계속 유치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노동조건에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15년간 일자리증가 겨우 170만개
늘어난 일자리는 대부분 ‘비정규직'

한국 기업들이 나는 중국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위협한다. 비슷한 일이 일본과 말레이시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경제성장이 급격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중국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ILO와 IMF가 노동시장 연구조사를 했는데, 중국에서 지난 15년간 정규직 일자리 증가는 170만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건 중국 제조업 노동자들의 절대다수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도시 일자리 증가 대부분이 비정규직 일자리다. 즉, 중국 국영 기업의 일자리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이건 6천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3천만 개의 일자리가 민간 기업에서 발생했고, 중소 규모의 기업들에서 3천만 개가 증가했다. 증가한 8천만 개의 비정규직 일자리를 빼면 일자리 증가가 0이라고 보고 있다. 동일한 문제, 즉 제조업 일자리의 감소가 필리핀, 한국, 인도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중국 연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자본 축적이 진행되고 있는 중국에서 조차 일자리 증가가 없으며,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노동시장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구적 자본주의 축적 시스템이 초국적 미국 기업, 초국적 일본 기업 , 초국적 한국 기업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노동자들에게는 똑 같이 고통을 주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중국대 미국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 자본운동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한 국가의 문제, 또는 한 국가의 경쟁력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편이 아니고, 자유무역, 사유화, 비정규직 모든 문제가 엮여 있다는 사실을 노동자들이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중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꽤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중국 노동운동에 어떤 변화들이 있는가?

"중국정부는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노조지도부도 등장

 
그렇다. 중국에서는 이미 많은 곳에서 노동조합 건설 등 노동자들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경제는 이미 수출지향적인 모델이다. 정부가 다국적 기업들이 떠나지 않도록 하면서, 오히려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중국에서 흥미로운 것은 중국 정부 노동자들이 지방에서 이주해온 이주노동자들의 관계도 좋지 않다는 것이다.서로 일자리를 놓고 갈등이 있다.

중화전국총공회(ACFTU) 밖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 노조들은 민주적으로 지도부를 선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중화전국총공회에 그리 익숙한 상황은 아니다. 이런 노조들이 민주적으로 지도부를 선출해 노총에 가입을 하려고 하면서 많은 혼란이 있다.

중요한 것은 중국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비판적 상을 제시하고 중국에 있는 사람들이 공동의 전망을 밝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가? 사유화, 중국 국가, 사회주의는 뭔지 등에 대해서 중국 노동자들이 전망을 가질 수 있도록 관계를 맺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 비교를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최근 남미에서 대안으로 추진되고 있는 ALBA(미주대륙 볼리바르 대안)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ALBA는 자유무역이 아닌 협력
“동아시아 지역도 교훈 얻을 수 있을 것”

 
ALBA는 매우 흥미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있다. ALBA는 상호보완적 협약이지 자유무역이 아니다. 각각의 국가는 국가적 필요에 따라서 각각의 강점을 유지해주면서 공동의 힘을 모으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에너지 기술이 있고, 쿠바는 의료가 있고,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생각은 매우 훌륭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메커니즘이다.

최근 남미은행 논의가 있다. 세계은행의 외채를 갚고, 세계은행의 돈을 빌리고 사유화를 하고 예산 삭감할 필요 없이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 지지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건설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지역마다 특수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남미에서 일어나는 실험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대단히 좋다고 생각한다.

 
남미와 동남아시아의 상황이 다르지 않는가?

"한국 민중운동에는 국가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 힘 있어"
"한국의 역사적 경험, 민중의 역사로 재 주장해야"

 
한국은 매우 빨리 성장했다. 한국 경제가 성장한 것은 자유로운 시장경제 때문이 아니라 국가의 통제 때문이었다.

군사 독재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박정희식’ 또는 ‘신자유주의’가 아닌 민중들이 경제활동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민중의 이익을 위한 국가 경제 통제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운동은 이런 역사를 엘리트들이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역사로 재 주장해 내면서, 민중의 이익을 위해 국내 투자를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내 노동운동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최근 미국 내 거대노총인 AFL-CIO에서 ‘변화를 위한 혁신(Change to Win)’이 갈라져 나오는 등 변화가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변화를 위한 혁신 쪽이 더 급진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미국 노동자들은 수세적”
이주, 자유무역 문제에 대해 미국 노동자들도 혼란

 
미국의 노동자들은 매우 수세적이다.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러나 미국의 노동운동의 변화는 그리 극적이진 않다. 다만 노동조합이 조직화에 예전보다 훨씬 더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이주민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5월 1일 노동절을 통해 이주민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로 선택했다. AF-CIO도 각 지역지부에 노동자 센터를 만들고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다. 미국의 노동운동이 이주노동자들과 에너지를 나누고, 이주 노동자들을 시민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쟁을 함께 하기 시작한 점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변화를 위한 혁신’에 참가하고 있는 서비스 노조(SEIU)는 최근 매우 안타깝게도 게스트 워크 프로그램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이 정책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 이주민들을 조직하고자 하는 것은 긍정적 신호지만, 안타까운 점도 있다.

이주 노동뿐만 아니라 무역 이슈에 대해서도 미국 노동자들은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많은 미국 노동자들은 중국 노동자들을 위협적인 존재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실험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서서히 멕시코 노동자들이 경쟁자가 아닌 연대의 대상으로 인식을 바꾸어 가고 있다. 멕시코 노동조합이 와서 멕시코 이주민들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미국 노조들은 멕시코 노동조합의 재정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하고 있다. 양국간 노동자들의 연대도 강화되고 있다.

 
최근 한미FTA 투쟁이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미FTA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한미FTA 뿐만 아니라 일본과 EU를 반대하는 목소리 나와야"
“노동자들이 국가주의에 물드는 것은 위험”

 
나는 한미FTA를 반대한다. 그러나 한국의 운동을 보면 대부분 FTA반대 투쟁들이 단지 미국에 대한 비판으로 집중되어 있다. 일본, EU 등과의 자유무역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FTA를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 기업이 중국으로 가는 것, 사유화, 비정규직화 등과 함께 자유무역은 자본주의 축적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자본 운동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한미FTA 비판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내 자본이던 외국 자본이던 자본은 이 협정으로 이익을 얻을 것이고, 미국의 노동자들과 한국의 노동자들은 모두 잃게 된다. 노동자들이 국가주의에 물드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두 국가 노동자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마틴 하트 랜스버그는 미국 루이스 앤 클락 대학 경제학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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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고병려, 바울, 고위공, 하인리히 뵐...

날도 덥고 해서, 내 방을 물리치고 집사람 방에 내려와 노는데 (내 방은 옥탑방, 집사람 방은 구석방) 며칠 전부터 책상 앞에 딱 앉아서 오른쪽을 흘끗 보면 계속 내 눈에 들어와 꽂히는 책이 하나 있는 거다. 제목은 <바울서간>인데, 사실은 그 저자의 이름이 더욱 인상적인 거다. "고병려"라고... 글쎄, 지금 와서 봐도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다 싶다.(문득 오늘 무슨 인터넷 만화에서 본 "연보흠" 기자가 생각나네.) 이 사람... 예전에 집사람 책장에 그 책이 있는 걸 봤어도, 그냥저냥 이런저런 신학자 아니면 목사 아니면 뭐 비스무리한 양반이겠지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그 책이 "뎀비는" 바람에 수고롭게도 책장에서 꺼내 뒤적뒤적해 봤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은 이른바 신약성서의 "바울서간"(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의 번역, 그러니까 사역(私譯)인 거다. 예전에 집사람이 좋아라 하며 헌책방에서 집어들던 무교회 쪽 사람인가 싶어 맨 앞장 저자 약력을 보니 의외로 당시(1987년) "서울대학교 희랍어 강사"라고 나오는 거다.

오호. 얼마 전에 피천득 선생 에세이집에도 희랍어를 통달했던 친구 모 교수의 죽음을 애통해 하던 이야기가 나와 흥미롭더니, 이 양반은 또 누구신가 싶어 인터넷을 뒤적뒤적해 보았더니, 이런, 2006년 4월 23일에 별세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한 가지 얻게 된 또 다른 정보는 그의 아들이 바로 독문학자 "고위공" 선생이라는 것. 어째 집안 내력인지 이름들이 결코 평범하진 않은데(병려, 위공), 하긴 내가 "고위공"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것도 그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주 예전, 그러니까 울 엄마가 <주부생활> 열혈 독자일 때에 하루는 "별책부록"으로 날아온 책 가운데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번역자가 바로 "고위공"이었다. 알고 보니 학원사, 아니, 주부생활사에서 나오던 주우 세계문학 가운데 한 권을 재가공(뭐냐면... 안 팔리는 책을 절단기로 이래저래 "짤라"서 표지갈이 한 책)해서 내놓은 물건 같았다. 생각해 보면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읽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누런 이로 소시지를 베어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표제작보다도 그 뒤에 실린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느냐?>가 무척 인상적이었다.(지금도 그 제목은 외운다니까. Wo warst du, Adam.) 하긴 뒤의 작품이 좀 더 비극인 이유도 없지 않고...

하인리히 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십중팔구는 "귄터 그라스가 받아 마땅한 상을 얍삽하게 뺏은" 인물로 인식되는지 모르겠는데, 글쎄, 그거야 뭐, 나중에 그라스도 일종의 체면치레는 했으니 더 이상은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겠지. 무슨 뜻이냐면 귄터 그라스가 문학성은 더 뛰어난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인의 반성이랄까, 그런 분위기를 좀 더 잘 드러낸 것은 하인리히 뵐이기 때문에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 쪽에서도 그라스 대신 뵐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소문이 없지 않았던 거다.(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이 보통 "한 수 위"로 여겨졌던 다니자키 준이치로 대신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돌아갔을 때의 충격과도 비슷했다고나 할까. 물론 다니자키는 그보다 몇 년 전에 사망했지만, 후보로는 종종 거론되었다고 들은 바 있다.) 그래서인지 하인리히 뵐의 소설은 어딘가 우울한, 그러니까 잿빛의 소설이라고 인식되었는데, 의외로 단편이나 방송극은 재미있었다.(가령 "나의 슬픈 얼굴"이라든가, "어린 왕의 수기" 같은 풍자적인 단편,그리고 <결산>이라는 방송극집에 나온 그의 몇몇 작품이 지금도 기억난다.) 독문학계의 "불독"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조차도 그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기억했다. 폴란드 출신의 라이히-라니츠키 부부가 독일로 망명한 직후, 그를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 중 하나였던 하인리히 뵐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 그의 부인을 즐겁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사로잡힌 영혼>이란 자서전에서 하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라이히-라니츠키의 독설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그래도 수년만에 다시 만났을 때 먼저 그를 끌어안고 "이제 다시 친구가 된 거지?" 하고 유쾌하게 물어본 사람 역시 하인리히 뵐이었다고 한다.(뭐야, 불독 영감. 쪼잔하게시리.)

다시 고병려의 <바울 서간>으로 돌아가자. 성서의 "사역"으로 내가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최민순 신부의 "시편" 번역이다. 이건 손바닥 만한 작은 판형의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는데, 아쉽게도 최 신부는 희랍어를 몰랐기 때문에 (이 양반의 본령은 라틴어였던가, 이탈리아어였던가 그랬지.) 이런저런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서 일종의 "중역"을 시도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뭐, 원래부터 시인인가 그랬고, 이 양반 번역의 <신곡>을 보면 지금 봐도 도대체 뭔 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독특한 우리말 구사가 일품이기 때문에, 나름 중역이라도 "시편"의 뉘앙스에는 오히려 걸맞은 번역자가 아닐까 싶다. 하여간 고병려의 <바울 서간>은 전5권으로 구상된 "약주 신약성서 시리즈" 가운데 4권으로 나오는데, 이 시리즈가 완간된 것은 아닌 모양인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중 <마가복음>, <요한문학>이 더 출간된 듯하지만 5권이 완간되지는 못한 모양이다. 집사람이 갖고 있는 책에는 특이하게도 종종 틀린 부분에 "스티커"를 붙이고 화이트로 지운 부분이 있다. 아마도 그리스어 원본의 직역에 충실하려 한 까닭일까, 기존의 여러 성서에 비하면 약간 뻣뻣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뭔가 새로운 해석이랄까, 이해의 여지를 남겨준다는 점에서는 소중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가령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로마서 13장, 이른바 "세속 권력에 대한 복종" 대목을 보자.

  • 모든 사람은 상부의 직권에 복종하라. 하느님에게서 유래하지 아니한 권위가 없으니, 현존하는 모든 집권자는 하느님에 의하여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고병려 옮김)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바라. (개역개정판)
  •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동개정판)

어디서 읽었더라? 누군가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요즘 신앙이 잘 서지 않는 모양이군" 하고 비아냥 조로 이야길 하는데, 하긴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 예수처럼 살 수만 있다면 신학이나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이름 팔아 먹고 사는 일종의 "사업체", 또는 "관료조직"이 되고 말았으니, 신학이란 것도 이들에게 뭔가 올바른 지침으로서 필요하다고는 본다. 문제는 신학과 신앙, 또는 이론과 실천, 아니면 강단과 현장이 상호침투적이지 못하게 다 제멋대로 따로따로 논다는 것이겠지만. 하긴 기독교 신학만큼이나 그 두 가지가 완전 등을 돌린 분야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강단에서 언급되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만 들어도 그 수많은 "영빨" 두둑한 집사, 권사, 장로들은 야단법석을 떨 텐데... 그렇게 보면 그것 참 문제다. 그런 "영빨" 우선론자들은 그렇다면 과연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알기나 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진리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는 어느 교부의 말, 더 나아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이상야릇한 "궤변"으로 귀결되게 마련인데, 솔직히 사람이 뭔가를 "믿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자신이 이걸 믿으면 뭔가 "이득"이 있을 것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믿고 말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거다. 나 역시 일찍이 기독교란 것을 접하며 "믿음"을 갈구했으나, 그에 앞서 뭔가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결국 기독교란 것도 허상 중의 허상이구나 싶어서 실망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독교, 또는 신학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자뻑"에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뭔가를 "지키기 위해" 또는 "옹호하기 위해" 내놓는 논리란 구차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기독교만큼 그 근거가 되는 문헌 자체가 모순적인 난리뻐거지인 다음에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근거 하나만큼은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에 온갖 무리수를 두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 올바른 비판이나 지적까지도 외면하고 마는 셈이다. 기독교의 문제는 바로 그거다.  물론 세계 모든 종교의 문제가 바로 그것, 박약한 근거를 지키기 위해 내세우는 "권위"이겠지만.

하여간, 정확히 자기가 뭘 믿는지 알고 싶다면 일단은 그놈의 "권위," 그러니까 성서가 도대체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톨스토이가 말년에 가서 웬 변덕으로 열혈 기독교인이 되어 성서를 읽기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거나, 또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어느 일본서적을 전재한 "희랍어 문법"을 연재하면서까지 "원전 강독"을 시도했던 것 역시 그런 맥락일 것이다. 어쩌면 고병려라는 양반, 성서 희랍어뿐만 아니라 고전 희랍어를 읽을 능력이 있는 양반이 굳이 그런 "사역"을 시도한 것도 그런 맥락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믿음"이란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일까? 기껏해야 그들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란 어느 편집, 가공된 고대 문헌의 "번역"에 불과한 것인데 말이다. 그들은 과연 예수의 수많은 비유 가운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가령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울지 않았느니라" 같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어쩌면 이것은 그 당시의 관용적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니 기독교의 믿음이란 것,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홍어를 밟는 것마냥 발밑이 흔들리는 체험일 수밖에 없다. 그런 박약한 근거 위에 나름대로 "신앙"과 "믿음"을 확고히 세워 불신자에 대한 갖가지 파상공세를 펼치다못해 광신적인 수준으로까지 나아가는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정말 좀비들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왜 의심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인 것인데.

뭐, 돌아가신 양반 붙잡고 이런저런 넋두리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 역시 당시로선 희귀했던 원문 해독능력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던 인물이었는지는 몰라도, 결과만 놓고 보면 아주 성공한 쪽은 아닌 듯하다.(일단 완간이 안 되었으니까.) 그 아들인 "고박사"만 해도 특별히 대중적인 연구 성과는 내놓지 않은 듯, 하인리히 뵐의 소설 번역 하나, 파울 첼란의 시집 두어 권, 그리고 게오르크 트라클 연구서 한 권 정도를 내놓았을 뿐이다.(오호, 트라클. 비트겐슈타인이 부친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희사한 세 명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 마야코프스키와 쌍벽을 이룰 만한 "빠박" 시인으로 기억하는.) 어쩌면 그냥저냥 나름 조용히 묻혀 사는 것 역시 이들 "고박사"들의 전통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우연히, 그리고 뜻밖에 생각나고 알게 된 김에 끄적끄적해 본다. 역시나 이곳에 적어두면 훗날 망각은 피할 수 있을 것이기에.

 

 

***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전기를 뒤적이며 트라클에 대한 대목을 찾아본다. 비트겐슈타인은 트라클을 자신의 후원 대상자로 선정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의 시의 어조는 마음에 든다. 물론 무슨 뜻인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말이다." 오호라...

*** 인터넷에서 "고위공"을 치면 "고위공직자" 관련 내용만 주루룩 뜨는 상황이다. 반면 알라딘에서 "고병려"를 치면 무려 2528건의 상품이 떠 버린다. 이게 웬일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병려"라는 저자의 책은 한 권도 없고, 그 각각의 음절, 그러니까 "고", "병", "려"에 해당되는 온갖 물건들이 "윤구병"부터 "박병철"과 "황병하"까지 망라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사오정 검색이지, 뭐.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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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한국 소설의 위기는 비평가들에게도 있다?

* 뉴스메이커(2007. 6. 6)

[커버스토리]‘주례사비평’이 한국소설 죽인다

총애하는 작가 띄워주는 수단… 단편장르 집중현상도 한 요인

우리 문학, 또는 우리 소설에 활력이 사라진 이유로는 작가 못지않게 비평가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있다. 인간적으로 친해진 호의적인 안목이 작품에까지 연장되어 이른바 끼리끼리 잘 봐주기의 행태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독자의 반응은 시큰둥한데 평론가들의 비평은 종종 호들갑이다. 중견 평론가 구룡모씨는 “비평가가 시인·작가를 경배하고 그들이 생산한 작품을 무조건 예찬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의 문학적 장이 활력을 잃어가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비평권력’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어려움을 겪는 한국소설의 이미지. (정지윤 기자)


한 조사에서 중앙대 문창과 학생의 37%가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15%가 게임시나리오와 장르문학을 교과목에 포함해주기를 희망했다. 학생들의 대중문화에의 쏠림 현상이 커지고 있어 문단의 대응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구씨는 비평가에게 부여되는 권력은 ‘필요악’이라면서, 문제는 비평권력 자체가 아니라 권력의 바르지 못한 사용이라고 말했다.

“한국 작가들 자의식 너무 강해”

비평은 대상을 교육시키려는 태도가 아니라 작품을 해석하고 그것에 대해 시비를 가려 작품의 진가를 밝히려는 태도다. 그러나 한국의 소설 비평은 비록 전부는 아니라 해도 종종 자기가 총애하는 작가를 띄워주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작가에게 영합하는 이른바 ‘주례사 비평’은 출판사의 매출 전략과 맞물려 한국 소설을 죽이는 촉매제 역할을 해왔다는 지적이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 역시 한국 소설의 위기를 ‘비평의 신뢰성 상실’로 꼽고 있다. 그간의 한국 소설 비평이 작품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담과 주례사로 일관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발언을 신뢰했던 독자들이, 오히려 지금 한국 소설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소설의 단편장르 집중현상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우선 각종 문학상제도가 단편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양대 문학월간지 ‘현대문학’과 ‘문학사상’이 주관하는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이 수상대상을 단편 내지 중편으로 제한하고 있다. 역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황순원문학상’과 ‘이효석문학상’ 역시 대상을 중·단편으로 한정하고 있다.

물론 장편을 대상으로 하는 상도 적지 않다. 문학동네소설상, 한겨레문학상, 세계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삼성문학상 등 장편공모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상은 대체로 출간된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행본 출판’을 목표로 한 신인급 작가에 대한 공모의 성격이 강하다. 문학전문기자 최재봉씨는 그 서글픈 결과를 이렇게 지적한다.

“작가들은 막상 장편소설을 쓰려다가도 잡지에서 단편 청탁이 오면 거절하기 어렵다. 문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잡지 편집위원들의 심경을 거슬렀다가는 그나마의 청탁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한다. 한편으론 중·단편에 주어지는 주요 문학상의 상금과 명예가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한다. ”

한국 문단과 문학상제도가 단편소설에 편중됨으로써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장편소설의 미학적 혁신과 문학성이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소설 독자층의 변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는 현재 한국의 소설 독자층은 대단히 협소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지망생 그룹과 20~30대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이지만, 1970∼80년대의 소설시장의 활황을 가능하게 했던 30대 이상의 남성 독자들과 소설에서 ‘재미’ 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계몽독자 또는 지식인 독자들이 대거 소설시장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소설보다는 역사 전기물과 인물평전류가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씨(71)는 작년 여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호되게 비판하며 한국 대학생들의 독서 성향을 질타했다. 유씨는 ‘현대문학’ 2006년 6월호에 기고한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을 놓고’라는 글에서 대학생들이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노르웨이의 숲’(한국어판 제목은 ‘상실의 시대’)을 가리켜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 지적했다. “무라카미의 소설은 작가가 이미 사회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상실했거나 예술적 포부를 가질 수가 없는 시대의 언어상품”이라는 것이다.

유씨의 이런 단호한 지적은 “지난 10년간 대학 초년생의 문학독서 성향을 조사”해 온 결과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맞닿아 있다. 인구 대비 대학생 수 전 세계 1위(1997년)라는 통계와 젊은이들의 문학적 교양의 결여 사이의 불일치를 겨냥해 그는 “그들(=젊은이들)이 매우 부실한 문학교육의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한다.

계간지 ‘문학수첩’ 2006년 여름호의 특집 ‘대학에서 문학은 살아남을 것인가?’도 유씨의 비판적 시각과 일맥상통한다. 특집에서 다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김원일·조정래 최근 장편 긍정적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학생들의 대중문화에의 쏠림 현상이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의 경우 응답자의 37%인 24명이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교과목에 포함시켜주기를 바랐고, 게임시나리오와 장르문학을 원하는 학생도 15.4%인 10명에 이르렀다. 젊은이들이 자아를 확립하고 사회의 책임감 있는 일원으로 성숙해가는 교양 형성의 장으로서 대학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유종호씨의 지적과 통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지적하는 한국 소설관도 음미해볼 만하다. 한국은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인지 작가의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작은 얘기부터 풀어나갈 줄 몰라 무겁고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작가들이 ‘내가 작가요’ 하고 잘난 척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일본 소설의 ‘미덕’을 이렇게 지적한다.

“가볍고 밝고 유쾌하다. 한 장르에 치우치지 않으며 적당한 생각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삶의 본질이라는 무거운 주제보다 가족과 청춘, 성장기의 진통 등을 그려내는 테크닉이 뛰어나다. 전반적으로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가 모호해서 양쪽 다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

평론가 정호웅씨는 그러나 우리 소설이 길을 잃고 골짜기에 빠져 있다는 ‘소문’에 대해 강력히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 소설의 자기갱신과 창조의 생명력이 여전히 활기차게 살아 약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진작가들이 최근 쏟아낸 장편들의 가능성에 높은 평점을 매긴다. 김원일의 ‘전갈’, 조정래의 ‘인간연습’과 ‘오 하느님’,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한승원의 ‘소설 원효’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작품은 ‘역사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내걸고 추상화된 관념의 규정성을 해체하며 과거 진실의 포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작품 속에는 ‘현실 공간의 가상 공간화’라는 새로운 형식 실험도 모색되고 있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주제와 형식 탐구, 중견작가들이 새롭게 포착해내는 역사의 진실과 삶의 본질 탐구가 아직 한국 소설계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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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후에, 빡빡한 일상의 부담 때문인지, '책 읽기'라는 본격적(?) 독후감을 쓰지 못했다. 그래도 책 읽은 후에 정리는 해야 될 것 같아서 '독후 짧은 메모들'이라는 항목을 만들어, 별 생각없이 나오는데로 써놓기로 한다.

이것이 악용(?)되어 앞으로는 생각없이 독후 짧은 메모만을 하고, 책을 읽고 반성하는 '독후감'이 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꽤나 높다.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던 작품인, 게이치로의 <장송>이나 겐지로의 소설들 또한 이 '독후 짧은 메모들'의 희생양(?)이 되었으니..

 

 

 

 

 

 

 

 

어찌보면,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작품, 공유하고 있는 작품에도 독후감을 쓸 시간이 없다는 자각(?) 때문에 이 코너를 만들었는지도..

우선 메모라도 남겨두자는 심정에 적는다. 앞으로는 글 쓰는데 시간을 적극 확보해야 겠다. 이 결심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글로 남겨두어 스스로를 구속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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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6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6-06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ㅇ님/ 오 좋네요. :) ㅎ 근데 제가 근무 때문에 시간 맞추기가 애매할 것 같은데요;; 주말 저녁에는 항상 세미나와 과외고 -_-;; 시간 정하셔서 제가 되는 시간이면 좋죠 ㅎ

2007-06-09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