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60초 속에는 태어나기 직넌의 태아와 사라지기 직전의 태아가 서성거리네
태어나게 해, 태어나게 하지 마, 폭력이든 사랑이든 이건 조바심과 실망의 모래사막에 건설된 오아시스인데 나의 망설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폭력인지
우연한 감염 끝에 존재가 발생하다가 갑자기 뚝 끊겨버리는 적막의 1초
어디론가 가버린 태아들은 태어나지 않은 오후 5시에 흘러나올 검은 비 같은 뉴스를 들으며 구약을 읽을 거야 그 귀에 흘러나올 빗물 같은 레게음악을 들으며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낼거야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 해요, 얼굴없는 타락들로 가득찬 계절이 오고 있어요, 라고
나는 허수경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들은 좋다고 하니 다시 읽어본다. 나는 왜 허수경의 시가 좋지 않을까. 나와 접속되지 않는다. 추상적이고, 공감하기 힘들다. 오랜 독일 체류의 시인이지만, 그 체험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유와 이미지는 참신하다가도, 급작스럽게 상투적인 것으로 빠진다. 나와 20년 정도 차이나는 여성 시인이라서 공감하기 힘든 것일까? 하지만 오히려 김혜순은 허수경 보다도 10년 정도 연배가 위지만, 김혜순의 시는 짜릿하고 날카롭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나는 허수경의 시를 좋아하고 싶다. 더 읽어봐야겠다. 좋아하고 싶다.
이런 시도 그렇다. 마지막 2연을 빼고는 무척 좋다. 태아란 일종의 '감염' 같은 것인지 모른다. 섹스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이상한 비가역적 반응. 폭력에서 또는 사랑에서, 혹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감염. 고독한 화자는, 그 감염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20대, 또는 10대의 화자 같다. 그러나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도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을 갖고 긴 산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구약"을 읽거나 "레게음악"을 듣거나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낸다는 소리에 확 깨고 만다. 나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또는 너무나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조합들로 마무리가 된다... 좋아할듯 좋아할 수 없다..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