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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종말의 바보를 읽으며, 다시금 우문(?)을 던져본다. 왜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 것일까. 소설을 쓰는 이유는 어찌보면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그리고 쓰는 것이 재미있어서. 쓰고 싶어서. 말이 하고 싶어서 등.
그러나,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있어서? 딱히 순전히 그렇다고 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별반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소설을 읽는다. 지어낸 허구. 사람의 일생과는 달리 어디서 빚어낸 인공스러움.
소설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쓰는 사람 때문에? 읽는 사람 때문에? 쓰고 싶은 사람이 있고, 읽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아니면 작가-독자라는 관계가 자본주의 제도 상에서 이윤창출이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급자와 수요자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왜 굳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을까? 이는 이 책이 소행성으로 지구가 멸명하기 3년이 남은 시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도 사람들은 비디오를 보고, 아기를 낳을 것인지 고민하고, 보다 강해지기 위해 수련을 한다. 즉, 살아간다. 영화감독들은 영화도 만든다는 내용도 나온다.
모든 '창작가'들이 창작을 지속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은 꾸준히 무엇인가를 쓰고 또 읽는다. 만들고 또 본다. 왜 일까?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정확한 데드라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그런 데드라인이 즉 죽음이 완전하게 공시되어 있다면? 그러한 가정적 상황을 이 소설은 던진다. 어쩌면 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 이것이 '소설'의 존재이유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
가정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 허구를 통해 진실을 투시하는 것.
이렇게 거창한 이유를 대는 것은, 아마도 내가 문학 전공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냥 쓰고 읽는 것. 즐거움. 이런 것을 아직 순수하게 긍정하지 못하는 이상한 심보 때문일지도 모른다.
계속 '의미'라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일지도. 무언가 나를 넘어서는 더 큰 것. 사회, 공동체, 자유, 평등, 진리, 역사 등 어떤 추상에 매달려 있기 때문일지도. 나도 나의 데드라인을 모르기 때문일지도. 아직 우리는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져 3년후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혹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소멸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