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비자림 > 부부

  부부

 

         1

가슴이 턱 막힌다

등을 돌려 누운 당신

바람이 불면 좋겠다

나의 손은 당신의 등 가까이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활주로를 찾지 못하여 헤매는 비행기

당신의 꾹 다문 등 언저리에서 서성대며

다가갔다가 되돌아오고 

바람이 불면 좋겠다

우리 인연이 시작될 때의 수줍고 달콤한 미풍

그 바람이 불어 내가 은근슬쩍 당신의 등에 어제처럼 업힐 수 있다면

 

             2

처음 당신 빨래와 내 빨래가 세탁기에서 함께 빙빙 얽히며 돌아가던 날

나는 첫키스의 기억을 보는 듯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져 왔다

섞여라 섞여라 혼자만 목마른 줄 알았던 스무살의 갈망아

물을 머금고 섞여라 섞여라 재회의 기쁨으로 뒤척이며

버석버석 내 안의 온갖 신경이 다 열려 잠못 이루었던 분홍빛 시간들

스며라 스며라 너의 옷으로 나의 옷으로 즐거운 침투의 소용돌이

그의 마른 셔츠를 다리며 환하게 얼굴 펴지던 나

마른 내 블라우스에 코를 들이대며 짐승처럼 웃던 그

 

                3

거실에서 레고놀이를 하는 아이들

시간은 하품을 하며 그네들 머리 위로 흘러가고

아이들은 지나가는 시간에게 혀를 쑥 내밀고는 키득거린다

부쉈다 만들었다 다시 새로워지는 레고 장난감

내일이면 우리의 언쟁도 다 사라지겠지

슬픔이 목젖까지 치민 누군가가 자기도 모르게 상대의 손을 잡겠지

문을 열고 나가면 어디서나 부딪치는 존재의 벽

그 벽들 사이로 

등이 굽은 채 걸어가는

내 남자의 뒷모습

나는 그와의 인연의 첫 장을 다시 떠올린다

늘 내게 먼저 손 내밀던 쓸쓸하고 커다란 눈동자의 애끓었던 청춘

앞치마를 두르며  나는 거짓말처럼 평온해진다

그가 던진 언어의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

나는 내가 던진 언어의 칼이 증오스럽다

나는 꼼꼼하게 설거지를 하고 있다

내 인생이 조금씩 조금씩 씻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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