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태우스 > 별 걸 다하죠?

 

 

 

파산의 날이 가까워 온다. 할 일이 많은데 밤새워 일하는 모습을 보인 건 극히 드무니, 당연한 귀결이다. 하루가 가는 게 요즘처럼 무서워 본 적이 있을까 싶다.

이 와중에 활동의 폭은 점점 넓어진다. 전전날엔 천안서 3시간 반을 달려 일산까지 술을 마시러 가더니, 어젠 드라마 기획까지 관여한다.


아는 분으로부터 ‘종합병원2’(가칭)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건 2주쯤 전. 저녁 먹으면서 같이 얘기나 하잔다. 마음은 “조금 힘들겠는데요”였지만 내 주둥아리는 “그, 그럴께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냥 가면 좀 뭐하니,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노트에다 대략의 구성안을 짜봤다. 막상 가보니 나 혼자 온 건 아니었고, 94년판의 원작자와 개그 콘테스트에 나갔던 후배를 비롯, 유머에 일가견이 있는 7명의 의사가 참여하는 대형 모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작가 두명은 모 대학병원에서 3주째 숙식을 하면서 열심히 취재 중이란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내가 안해도 되겠구나.


그때부터 소위 ‘브레인스토밍’이 시작되었다. 나란 놈은 다른 분야엔 경쟁심이 없지만 유머에는 지기 싫어한다. 해서 난 드라마에 도움을 주기보단, 어떻게 하면 이 자리에서 웃겨보나 그런 데 주력을 했다.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 거의 30초에 한번씩 웃음이 터졌다. 그럼에도 그때 나온 이야기들은 “어, 그거 괜찮은데요?”라는 말을 들으며 작가의 수첩에 적혔다. 아무도 술을 마시지 않았고, 커피와 더불어 밤 10시 반이 넘도록 이야기를 했다. 2주 간격으로 서너번 더 모일 거라고 하니 이렇게만 된다면 뭔가가 될 것 같다. 특히 어제 오지 못했던 ‘희대의 천재’가 합류할 다음번 모임은 얼마나 생산적일지 기대가 된다 (근데 일은 언제 하지?)


12년 전 방영된 종합병원은 최초의 전문직 드라마였고, 사랑 타령으로 일관해도 너그러이 봐 줬다. 하지만 ER을 비롯, 진정한 의학 드라마에 길들여진 시청자들의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탄탄한 시나리오가 필요할 듯하다. 내가 과연 거기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까?(참고로 난 12년 전 드라마를 한회도 보지 않았다. 이것도 불리한 점이다).


* 참고로 내가 짰다가 내지도 못한-수준이 너무 낮은 것 같아서-기획안은 다음과 같다.


인턴부터 시작함.

A. 여자. 터프하게 생김. 늘 1등--> 이런 캐릭터 어떠냐고 말했더니, 주인공이 미녀가 아니면 시청률이 안나온다고 거부됨.

B. 남자. 입학 전에 군대를 다녀와 나이가 좀 많다. 목적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안가림.

C. 남자. 공부만 하는데 성적은 안나오는...

D. 여자. 애교 많고 미녀

E. 남자. 놀기만 하고 공부 안함.


결국 어느 과에 가냐면..

A. 일반외과. 과장이 “당신같이 힘센 여자가 필요하다”며 권유. 처음에 시큰둥하던 남자동료, 선배들이 다 놀랄 정도로 일을 잘함.

B. 내과를 하려고 학생 때부터 내과 과장의 시다바리를 함. C에게 “교수 되려면 환자 보지 말고 공부하고 실험만 하라”고 충고.

C. 일반외과.

D. 내과: 안과 원했지만 과장이 남자만 뽑는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내과로 감.

E. 성형외과 원했지만 성적에서 밀려 일반외과로...


연애 기상도.

B와 D는 학생 때부터 사귄 커플, 그러나 내과 과장이 “애인 있냐?”고 묻자 없다고 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여자를 참. 그리고 과장 딸과 결혼.

E-->A: A의 터프한 매력 때문에 좋아하게 됨.

C: B에게 차이고 슬퍼할 때 D를 위로해 주나, D의 사랑은 얻지 못함.


* 이렇게 쓰다보니 정말 유치하단 생각이 든다. 게다가 시청자들은 유치한 걸 유난히 좋아하지 않는가? 그러니 드라마 작가들을 너무 욕할 일은 아니다.


** 메인 작가는 현재 다른 드라마를 하느라 겁나게 바쁘단다.


*** 내가 쓴 시나리오에 나오는 설정은 대부분 학생 때부터 본 실제의 캐릭터가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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