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247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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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의 전작,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는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이 시집은 그 시집 이후에 첫번째 시집인데 (그 동안에는 산문집 <저녁의 무늬>를 낸바 있다) 시풍이 정말 많이 바뀌어서 놀랐다. 시집의 시들은 매우 정제되어 있는 시선으로 작은 곤충과 주위 풍경을 세세히 바라본다.

<빛의 소묘>를 보자.

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
물 위에
가볍게 뜬
소금쟁이가
만드는 파문 같은

누가
하늘과 거의 뒤섞인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
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누가 고통의 미묘한
발자국 속에서
울다 가는가

 

시인은 조금씩 내리는 비 속에 발자국에 담긴 작은 물에 만드는 파문을 보고 있다. 이를 보고 '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시선은 '하늘과 거의 뒤섞인 강물'로 향한다. 그 곳에는 '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으로 있다. 이러한 은유는 신선하고도 와 닿는다. 시인의 시선은 매우 고요하면서도 세밀하다.

다음은 표제작인 <춤>을 보자. 이는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 연습을 한다.'라는 설명 밑에 시가 쓰여 있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리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이 시도 정제된 언어와 참신한 은유로 이루어져 있다. 송골매의 비행이라는 다이나믹한 장면도, 시 속에 포착되었을 때는, 앞서 시인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매우 고요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박형준의 특장일 수 있다. 시 한편 한편을 읽었을 때는, 마치 정지된 장면을 시인의 정제된 은유로 은은하게 빛나게 하고 있는 모습과 같아, 감탄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시들이 한 시집에 계속 실려 있으니 조금 답답한 느낌도 생긴다. 시의 파격이랄까, 운동성이 없는 것이다. 물론 이는 박형준이 추구하는 시세계의 문제이지, 시의 완성도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집이라는 것도 하나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고요하다가도 동적이고, 세밀하다가도 거대한 시선으로 사로잡는 맛이라는 것이 있어야 시집을 읽는 독자로서는 더 재미있다.

또한 박형준은 모든 사물과 동물들을 인간의 시선으로 포착하여 의미화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일종의 강박처럼 되풀이 될 때 독자는 지칠 수 있다. <밤 산보>라는 다음 시를 보자.

고독은 습관적으로 비둘기를 사냥한다
억센 발톱을 밀어내며
상처를 잊기 위해 전율하며,
야외공연장의 난간에서 파란 불꽃을 쏘아낸다

밤공기 속에 몸을 묻고
팽팽한 근육에 화살을 매겨
단숨에 공중을 꿰뚫는
저 단단한 불꽃

한 때는 주인의 발밑에 웅크리고
졸음을 파고드는 손길에
나른한 목덜미를 맡겼으리라
근육은 오직 사랑을 받기 위해
둥글게 꼬리를 말아쥐는 데만 사용됐으리라

누가 꼬리를 잘랐을까
손톱 같다, 초원의 사자처럼
밤공기를 밟으며 나아갈 때마다
치켜진 꼬리에서 적의가 흘러내린다
눈가에 칼날이 긋고 간 흔적이 뚜렷하다

어둠으로 깊어진 눈동자에 들어 있는
저 초승달
전율하는 꽃이 거기 있었다는 듯
한순간에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낚아챈다

토요일에 연인들은 플라타너스 그늘
흔들리는 야외공연장에 팝콘을 던진다
입에 물린 상처를 내려놓고
야외공연장의 난간에서 고독은
다시 냄새를 맡는다

물론, 이 시는 이 시 자체로 보았을 때 수작이다. 그리고 여기서 '고독'이란 '고양이'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시인의 시선이, '고양이'라는 객체를 완전히 지배해서 의미화하고 있는 것, 독자나 고양이 자체의 발언권은 전혀 없는 폐쇄성이 답답하다. 이러한 답답함은 시인의 문체에서도 나타나는데 '~다' '~리라'로 단언하는 패턴이 바로 그것이다.

박형준의 이번 시집은, 시를 하나하나씩 꼼꼼히 읽으면 수작 이상인 시들이 많다. 대부분의 시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시집 자체의 조화는 조금 너무 고요하고 세밀하며, 모든 사물들이 완전히 시인의 지배하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고 있는 듯해서 불편하다. 시집을 한 번에 다 읽기 보다는, 조금씩 읽고 덮어두었다가 다시 읽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시인의 언어에 감탄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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