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사나운 일진, 사나운 바람구두
사나운 일진, 사나운 바람구두
내일모레 휴가 시작이라 마음이 벌써부터 물러진 걸까? 아침 출근하는데 조금 늦었다싶어 서두르다 보니 마음이 급해진다. 차들이 길게 줄을 선 아침 출근길, 앞차 흰색 세피아가 그 앞 차와 15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시속 20km로 운전한다. 차간 폭이 넓다보니 중간중간에 차들이 두서없이 끼어든다. 짜증이 화악 치밀어 올랐다. 경고등을 두어 차례 깜박깜박했지만 요지부동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차선 변경을 해서 다시 앞 차를 추월했다. 바로 내 앞에서 사거리 신호등이 초록색에서 주황색 경고등으로 바꼈다. 내 앞에 있던 세피아가 역시 아까처럼 나와 널직한 거리를 두고 내 뒤에 와서 섰다. 그 차가 남들 정도의 차간폭만 유지했어도 신호에 걸리지 않고 넘어섰을 사거리다. 사이드 브레이크 올리고 내려서 세피아 운전자에게 달려가 싫은소리라도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룸미러로 뒷차 운전자를 바라본다. 물끄러미...
초로(初老)의 사내가 뒷차에 앉아있다. 갑자기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담배 한 개비를 꺼내물고 마음을 달렌다. 인천의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인천 장수동 초입에서 자동차 전용도로를 통해야만 한다. 이곳은 외곽순환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인천제2경인고속도로가 합류하는 곳이라 늘 병목현상이 빚어지고 교통사고도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차선을 바꿔 인천 방향으로 올라서는데 갑자기 무쏘 스포츠가 라이트도 켜지 않고 급하게 끼어든다. 사고를 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 했다. 그리고 인천 방향으로 진입하기 위해 4차선에서 3차선으로 변경하려고 신호를 켜고 옮기는데 이번에도 무쏘스포츠가 내 앞에서 함께 차선 변경을 시도했다. 이번엔 브레이크 대신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약간 위험하긴 했지만 큰 무리없이 추월해서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운전을 배우고 첫 차는 수동 기어 방식이었다. 매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고, 다행히도 내가 어딘가를 들이박아 사고를 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운전 자체가 별로란 생각과 환경을 생각하면 나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야지 생각했기 때문에 거리로 나서는 일이 마음 편하지 않았다. 차가 있어도 되도록 차를 두고 다니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었다. 그러다 2년쯤 전이던가 첫차를 폐차할 정도의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신호대기를 위해 정차해 있었는데 뒤에서 달려온 차가 내 차를 들이받았다. 그런 뒤에 자동기어가 달린 차를 주변 친척 분에게 얻어서 타고 다닌다. 수동기어 만큼의 빠른 조작감은 없었지만 내가 운전을 그리 즐기는 사람이 아닌지라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편하니까 이전보다 자주 차를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나름대로 드라이브를 즐길 정도가 되었던가 보다.
처음 차를 구입하게 되었을 때, 주변에서 차가 생기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은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오늘 문득 나를 돌아보니 내 대답은 "아니다." 물론 차가 생겨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보다 편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로인해 할 수 없게 된 일이 내게는 더욱 많다. 무엇보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그런 경험들을 매일매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 부대낌이 사람을 정말 피곤하게 만든다. 예전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근할 때 불편함은 그런 거였다. 지하철에서 내린 뒤 다시 오지 않는 환승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 나의 시간을 내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느낌이 답답했다. 하지만 직접 운전을 한다고 해도 그 시간이 내 것이 되어주지는 않더라는 거다. 도리어 아침 지하철 출근 시간 열차 내에서 귀에 리시버를 꽂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던 즐거움 같은 것은 절대로 누릴 수 없다. 게다가 나는 오늘 내 앞차 운전자와 내 옆차 운전자를 곁눈질 하며 그들의 느린 속도와 예의없는 폭주를 저주하고, 그들을 추월한 뒤 오는 순간의 스릴과 만족감 그런 뒤 다시 그들이 나를 추월하면 어쩌지 하는 약간의 두려움 속에서 나도 모르게 속도를 높인다.
나는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어서 세상에 왔지. 빠르게 살고 싶어서 세상에 온 것이 아닌데도, 문명의 패러독스는 실제로는 단축시켜주는 시간도, 자신의 시간을 자신이 콘트롤해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아니면서 모두에게 문명의 이기와 혜택을 누리라고 한다. 결국 다국적 정유회사와 자동차 회사, 그리고 좀더 많은 것들을 소비하도록 부추기는 매트릭스 속에 갇힌 것임을 잘 알겠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머리로는 그것을 알겠는데, 몸이 그것을 거부한다. 아니 몸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나의 이 깨우침이 그만큼 얄팍하다는 증거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