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주위 사람들 중 상당수는 김애란의 이 소설집에 대해서 시큰둥한 태도였다. 그래서 나도 '박민규 아류'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따분한 논문쓰기에 유쾌한 소설집 한 권이 도움 될 것 같아서 비자림님 이벤트로 선물 받았다.

막상 받아서 읽을수록,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최고의 소설'은 아닐지라도, 이 정도면 꽤나 좋은 소설이다. 시적인 문장과 상상력은 시를 전공하는 나에게 더욱 매력적이었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아무것도 없던 시절. 아무것도 없지만 낮과 밤이 있어서 가로등이 필요했던 때. 가로등은 지구와 함께 돌다 깜빡, 꺼지고 다시 한바퀴 돌다 깜빡, 켜졌다. 나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지구보다 더 큰 둘레를 그리며 돌고 있는 가로등의 운동을 상상했다. 지구의 원주와 가로등이 손끝으로 그려내는 원의 너비. 그리고 그 두 원의 너비 차가 만드는 사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61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을 상상하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지구보다 더 큰 둘레를 그리며 돌고 있는 가로등의 운동'과 '지구의 원주와 가로등이 손끝으로 그려내는 원의 너비' 사이에 살아고 있는 사람들이라니! 그리고 다음과 같이 신선하면서도 고개가 끄덕이는 문장들.

당신이 떠난 후, 나는 몹시 우울한 나머지 한밤중 길에서 외계인을 만난대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135면)

이렇게 아름다운 상상력 뿐만 아니라 거대하지는 않지만 예리함이 빛나는 통찰들.

나는 동창들의 미니홈피에 방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서로가 오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혹은 서로가 슬며시 왔다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더 열심히 자기 삶을 전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윤택한 사진 아래로는 온갖 사교적인 답글이 달리고,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온라인상에서 우리는 날마다 동창회를 열고 있었다. (127면)

그리고 단편 <종이 물고기>에서 포스트잇을 사면에 붙인 방에 바람이 불때 이것을 물고기에 비유하는 아름다움이나, 근대화되고 규격화된 삶이라는 어찌보면 다소 식상한 주제를 긴장을 놓지 않게 풀어나간 대학생 때의 등단작 <노크하지 않는 집> 또 수작이다.

80년생 소설가. 기대된다. 박민규처럼 자기반복 하지 않기 위해서는 엄청 힘들겠지만. (애매한 문장인데, 박민규가 자기 반복한다는 소리다.)

ps. 지금 제주도에서 휴가(?)를 만끽하고 있을 비자림님 감사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