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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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상상력


결국, '문학'이라는 것을 여타의 글과 특징짓는, 변별짓는 하나의 자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상력일 터이다. 이 시집의 상상력은, 관념을 이미지화하는 것으로, 전혀 비유가 될 것 같지 않은 것을 결합시킴에도 거부감이 안들게 하는 매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시인의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표제작인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이다.

 


봄, 놀라서 뒷걸음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아, 이 이상 ‘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문학개론 시간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배우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문학적 의미’ 중, ‘시’라는 것은 이렇게 단어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즉 새로운 사전을 만드는 작업.


다음과 같은 대목도 충격적이다.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리를/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에게 이쁜 날개를/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운 손가락을 (<그림 일기> 중에서)


상상해보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거미의 다리를 가진 강물, 날개를 단 돌맹이, 손가락을 가진 하늘) 진은영의 시는 동화스러운 발랄함으로 가득 차 있어, 이러한 이미지의 순수한 광채를 부여한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견습생 마법사


대마법사 하느님이 잠깐

외출하시면서

나에게 맡기신 창세기

수리수리 사과나무 서툰 주문에,

자꾸만 복숭아, 복숭아나무


내가 만든 사과 한 알을 따기 위해

이브는 복숭아가 익어가는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다, 잠이 든다

에덴 동산의 시간에 출현한 무릉도원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윌리엄 텔은 아들에게 독화살을 날리는

비인간적인 일에서 해방된다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마치고

왕비는 여전히 질투심에 불탔지만 한 알의 사과를 구하지 못했네


복숭아나무 아래 떨어지는 분홍 꽃잎, 꽃잎

뉴턴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만유인력 법칙도 상대성 원리도 우주선도 사라진다

맑은 밤, 들에 나가면 목성의 주황색 얼음띠가

예쁜 팔찌처럼 선명하네


그래도 세잔은 한 알의 복숭아로 빛의 마술을 부렸겠지

프로스트는 복숭아를 딴 후에 한 편의 시를 완성했을거야


트로이 전쟁에 쓰려고 준비해둔 한 알까지

사과의 역사책을 얼른 덮고,

빈 사과 궤짝을 타고 나는 도망가야겠다

하느님이 돌아오시면 화내며 세상을 멸망시키실까

그래도 나는 오늘,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를 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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