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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 갔다 오십니까?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13
성기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3월
평점 :
품절
이 시집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는 냉소적으로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연작을 통해 인생을 ‘문을 열고 들어가 서류 봉투를 받는 것’이며, ‘움직이지 않는 계단을 움직’이며 차례대로 죽어나가는 것, ‘사소한 것으로 일관’하는 것, 이니셜화 된 이들의 무미건조한 행위(어느 예고편)로 규정한다. 깨어보니,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 계단을 움직’이며 어딘가로 가고 있었고, 여기서 ‘내리실 문은 없’다. 삶이란 그런 것. 그 계단을 차례대로 밟아가며 우리는 ‘사소한 것으로 일관’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은 몇 개의 문장으로 환원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무미건조한 행위’ 속에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현대인이라는 이미지는 비만과 버려진 기계라는 이미지로 나아간다. 성기완은 냉장고(<냉장고>)가 되어 ‘나는 너무 거추장스럽고 뚱뚱하다/소화되지 않은 많은 음식들이 뱃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다’라고 말하며, ‘가장 번화한 유흥가의 뒷골목에는 너무 살이 쪄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부랑자가 우물우물 기름진 피자 조각을 씹으며 앉아 젖꼭지를 내놓고 다니는 창녀들을 바라보며 자위 행위를 하고 있다’(<비만과 편견>)라고 한다. ‘어디서나 그들은 우울하고 내성적이며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때로는 변태적(<비만과 편견>)’인 현대인들의 자화상. 이는 다국적 기업과 자본에 의해 점유된 현실이다. (문명의 가을이다 다이어트 식품이 팔리고 小食이 권장되는 옆에선 오늘도 새로 들어온 다국적 치킨점이 생긴다 그들은 소식을 권장하는 지역 정부를 불공정 무역 혐의로 제소한다 <비만과 편견>)
이렇게 ‘소외’되어 기계화되어 버린 인간들을 시화하기 위해 그는 ‘소화되지 않은 많은 음식들’을 뱃속에 간직하고 있는 냉장고(<냉장고>)를 화자로 삼아 그 쓸쓸함을 노래하고, 서서히 부서져 내려가는 ‘눈 속의 폐차’(<눈 속의 폐차>)를 화자로 삼아 ‘천천히 드러눕고 있는’ 죽음을 노래한다.
이렇게 우울한 시대상 속에 ‘쇼핑 갔다 오십니까?’라는 표제작은 ‘쇼핑’이라는 자본주의적 쾌락행위와 소통의 부재를 드러낸다.
쇼핑 갔다 오십니까?
그래, 왜?
아니, 그냥 (<쇼핑 갔다 오십니까?> 전문)
‘아니, 그냥’이라는 짧은 대답. 이 시집의 매력은 이러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현대 자본주의에서 물화된 비만한 고깃덩어리와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대해서 비난하면서도(<비만과 편견>), ‘아니, 그냥’이라고 냉소적으로 고개를 휙 하니 젖혀버리는 그 차가움. 이러한 대비 속에서도 유지되는 냉소. 그리고 간간히 죽어가는 기계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들. (<눈 속의 폐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