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 갔다 오십니까? 문학과지성 시인선 213
성기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3월
품절


새벽이다 부엌은 텅 비어 있다 나는 많은 음식을 껴안고 있다 맨 아래칸에는 푸른색의 풀들이 있다 상추와 쑥갓 파와 양파 그리고 사과 이제는 오랫동안 그냥 놔둬서 부패하기 시작한 포도 송이가 두엇 있다 나의 바구니 같은 팔은 콜라와 주스와 생수통을 안고 있다 방금 잠든 나의 여인은 콜라를 좋아한다 그것들은 병이나 플라스틱 통에 담겨져 있다 다음으로 나의 심장부 바로 밑에는 큰 김치통과 하야 꽃이 핀 고추장통 그리고 자주 종류가 바뀌는 밑반찬들 젓갈들 뭐 그런것들이 순서 없이 들어 있다 오늘 내 뱃속에는 멸치볶음과 반쯤 남은 알찌개(이것은 랩을 뒤집어쓰고 있다) 그리고 역시 반쯤 남은 참치 캔이 들어 있다 갓김치도 있고 먹다 남은 간장 종지도 (역시 랩을 쓰고) 들어 있다 나의 심장부는 내 몸통에서 가장 차가운 곳이다 나의 머리는 나의 심장부이다 거기에는 사철 성에가 끼어 있다 사실은 이것은 매섭다 꽝꽝 언 얼음들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칸 속에 채워져 있다 그곳에서 나는 냉혈한 미소를 사철 얼린 표정으로 짓고 있다 다른 모든 곳에서 내게 쳐들어오는 수많은 문 여닫듬 혹은 침범을 그 빙하기의 사각 공간에서 단죄한다....-94쪽

나는 다시 징- 하고 낮게 울어대기 시작한다 시간이 된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몸이 달아오르려 하면 피드백 시스템은 난폭하게 작동하고 내 체온은 내려가기 시작한다 징- 이때 나의 연인은 이따금 잠을 깬다 그러나 그녀의 잠을 깬 것이 나의 울음인지는 잘 모른다 여전히 꿈결 속을 헤매는 황홀한 표정으로 브래지어와 팬티만을 걸친 채 화장실로 향하곤 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몸 속의 냉매가 돌아 체온이 급강하하는 것은 일종의 아찔한 추락이다 중독자처럼 찬란한 그 고통 나는 몸을 떨면서 환각 속에 빠진다 그녀가 오줌을 누고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의 바닷가 파도 소리 나는 어깨동무하고 앉아 그녀의 식은 살갗을 느낀다 모래 바람이 섞여들어 바삭바삭한 그 살결을 나의 살갗에 아주 미세하게 비빈다 조금 있으면 우린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러면 따뜻한 것들이 오가고 지금 이 선선한 여름의 새벽은 차라리 그때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나는 장난기 섞인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을 만져본다 그녀는 피하려 하지 않고 이유 없이 반짝이는 먼 불빛을 본다....-95쪽

그녀가 다시 화장실의 문을 연다 나는 아직도 징- 다시 꿈속으로 쓰러지겠다는 의지밖에는 없는 그 여인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는 아침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이런 때면 나는 느낀다
나는 너무 거추장스럽고 뚱뚱하다
소화되지 않은 많은 음식들이 뱃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다
새벽은 너무 길고 차갑다-95~96쪽

알레고리, 또는 아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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