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리즈먼: 이단의 역사
그레이엄 핸콕.로버트 보발 지음, 오성환 옮김 / 까치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단의 역사라고 번역서의 부제는 흥미를 끌게끔 하고 있지만, 실제 원제는 ‘Talisman: Sacred Cities, Secret Faith'이다. 즉 ’탤리즈먼: 성스러운 도시들과 신비한 신앙‘ 정도. 그리고 책의 내용도 후자에 걸맞다. ’이단의 역사‘라고 한다면 이단의 각 종파들의 역사를 따지는 책이되어야 하겠지만, 이 책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성스러운 도시들과 신비한 신앙‘의 이야기이다. 핵심은 파리, 워싱턴 DC와 같은 도시들이 신비스러운 신앙 하에 수백년에 걸쳐서 계획된 ’탤리즈먼(일종의 ‘의미’를 가진 물체)‘이라는 것. 쉽게 말하면 자신의 종교적 상징과 의미를 도시의 건축조형 속에 집어넣었다는 것.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이야기이고, 달리 보면 ‘그래서 어쩌자고?’라는 의문이 든다. 파리와 워싱턴 DC의 항공사진은 흥미롭지만, 그레이엄 핸콕의 전 베스트셀러인 <<신의 지문>>에서도 성서를 살펴보면 비밀 메시지가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던 것과 유사하게 ‘황당하게’ 들릴 뿐이다. 이 책이 독자에게 신뢰를 주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독자가 잘 알지 못하고 잘 알기도 힘든 근거들을 토대로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자들이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또한 저자들의 약력 또한 저서의 신뢰성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이는 또 서술의 측면에서 이 책이 일종의 ‘음모론’의 연장으로 끌고 나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의 책의 전개는 어떠한 우연의 일치에 대해서 정말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배후의 신비적 조직이 있는 것일까 라는 식으로 나아간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서둘러 기독교를 폐지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지 혁명세력이 기독교를 대중의 충성심을 가로채는 경쟁자로 간주하고, 군주제와 교회의 오랜 관계를 증오하고 분노한 것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다른 더 심오한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17면)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피코는 I. M. 페이의 피라미드를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좀더 음모론적으로 생각할 경우 1827년의 그림이, 150년 이상에 걸쳐 계속 시행된 파리의 어떤 비밀 계획, 혹은 청사진을 암시하는가? 혹은 이 그림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집트적인 풍경이 파리의 건축물로 재현된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인가?


이와 같은 의문을 근거로 역사의 배후에 있는 ‘음모’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는 저자들의 노력은 분명 엄청난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다지 재미가 없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단선적’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구조로 인해서 결정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어떠한 한 구조나 단체에 의해서 설명, 또는 ‘환원’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서술은 너무 단선적이고 재미도 없다. 그리고 이는 단지 표면적인 흐름만을 서술할 뿐인 것이다. 음모론은 순간은 재미있지만, 모든 것을 ‘음모’만으로 설명하려고 들면 너무나도 역사를 단순화시키게 된다. 이 책은 그러하다. 서술이 후반으로 갈수록, 고등학교 ‘국사책’을 읽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자들은 ‘음모’에 의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고, 음모가 성공하거나 실패한 역사로 서구 근세사를 서술해나간다.


예를 들어 필자들이 이단 심문의 배후로 ‘카타리나파’와 영지주의를 연결시키는 것보다는 마빈 해리스가 중세 ‘마녀사냥’을 설명하는 방식이 훨씬 ‘중층적’이며 흥미롭다. 그는 중세의 마녀사냥과 전투적 메시아니즘이 중세 시대의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 구조와 연결시켜서 설명한다. 즉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중세의 불평등한 정치-경제적 구조에 억압받는 자들이 희망과 사회체제 전복을 희망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이에 대항해 마법광란은 “가난한 자와 무산자들의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서로간의 사회적 거리감을 조장시키며, 서로 의심하게 하고…” 등등으로 지배층들이 당시의 “제도적 구조를 방어하는 필수적인 수단의 하나였다”는 것이다.(<<문화의 수수께끼>>)


역사는 구성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역사는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들의 조각으로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해석’이고, 어떠한 ‘해석’이 보다 설명력있게 ‘역사’라는 것을 중층적으로 재구조화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새로운 시각으로 중세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프리메이슨’ 또는 ‘영지주의’라는 조류로서 해석하려 하지만, 이는 무척이나 단층적이고 지루하다.


그래도 그나마 저자 중 그레이엄 핸콕이 책임 지필을 담당한 1부가 로버트 보발이 담당한 2부보다 훨씬 흥미롭다. 2부의 사건전개는 늘어지며, 역사적 사실을 늘어놓는데 그친다.


ps. 번역은 그다지 나무랄 곳이 없이 쉬운 한국어로 잘 읽힌다. 컬러 사진을 한군데로 몰아넣은 것은 아마도 편집상의 문제일테이지만, 책을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켰다. 책의 설명에 해당하는 부분에 사진을 넣었다면, 보다 설득력이 있고 구체적이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259면에 아래에서 8번째 줄에 ‘호메로스의 서서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의 오타이다. 631면의 주 69번은 주 70번에 잘못 달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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