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패강랭 외 홍신 한국대표단편선 15
이태준 지음 / 홍신문화사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이태준의 자전적 소설에 등장하는 '현'이라는 화자이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조선의 자연은 왜 이다지 슬퍼 보일까'라며 시작하는 이 슬픈 지식인은 술자리에서 관료와 싸우고 기생의 타락에 슬퍼한다. '이 시대 전체에 긴치 않게 여기는, 지싯지싯 붙어 있는 존재'인 '자기'와 '자기 작품을 느끼고 그만 더 울고 싶게 괴로워'지는 존재인 이태준.

30년대 말, 이태준은 오갈데 없고 스스로도 작게 느끼는 작가이다. <해방전후>에서 돌연 전향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이태준의 변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이 등장하는 자서전적 작품들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조남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과 슬픈 조선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분신 현.

'폐허라는 서글픔'을 주는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은 근대 문학에 의미심장한 공간으로 빈번히 등장하는 듯 하다. 기생과 불놀이의 공간. 우울과 축제의 공간. 전통과 근대의 공간. '경성'이 근대와 전근대의 투쟁을 직접적으로 모자이크식으로 점유 투쟁을 벌이고 있는 공간이라면, 평양은 한 발 물러서서 전통의 은은한 축제적 향취와 함께 화려하고 이색적인 공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공간에서 과거 '능라도에 가 어죽 쒀먹던' '영월'을 만나서 다시금 담소하고 추억을 떠올려본다. 실제 기생이라는 존재는 우리 전통문화의 담지자이자 고대 제사 의례와 연관이 깊은 전통의 상징의 존재이다. 김동인이 <눈을 겨우 뜰 때>에서 평양 기생의 자본주의적 타락을 묘사한 것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특히 '어죽놀이'관련한 이야기는 두 텍스트 사이의 상호 텍스트성마저도 생각케 한다. (김동인의 텍스트와 '어죽놀이'에 관해서는 신범순 선생님의 <원초적 시장과 레스토랑의 시학>, <주요한의 '불노리'와 축제 속의 우울> 참조)

흥분한 조선인들은 갑자기 일본어로 서로를 비판하기 시작하고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김 부회 의원'과 현은 과격한 말싸움을 시작한다.

'기생이란 조선에 국보적 존잴세. 끌어안구 궁댕잇짓이나 허구 유행가 나부랭이가 비명을 허구, 그게 기생들이며 그게 놀 줄 아는 사람들인가? 아마 우리 영월인 딴쓸 못할 걸세.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할걸?"이라고 자못 당당하게 현은 말을 하지만, 영월은 딴쓸을 한다.
'어쩝니까? 이런 손님 저런 솟님 다 비윌 맞추자니까요.'
'건 왜?'
'돈을 벌어야죠.'

라는 대목 이어지는 기생일 수록 돈을 더 벌어야 된다는 데에서, 김동인의 소설에서 기생 금패의 타락보다 더 철저히 자본주의 속에 편입된 기생 영월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어 '팔릴 글'을 쓰라는 김의 말에 현은 분개하고 만다. 전통적 문화의 대변인이자 전수자요, '조선의 국보적 존재'인 기생마저 편입한 자본주의에, 현, 작가적 양심은 거부한다. '우린 이래봬두 예술가다! 예술가 이상이다, 이자식...' 이라는 절규는 '현의 두리두리해진 눈엔 눈물이 핑 어리고 만다'라는 슬픔과 절박함의 절규이다.

이태준의 자서전적 위 소설은, 그 절실함과 진정성으로 인해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결국 어쩔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태준 또한 모른다. '이상견빙지'(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란 말)라 하며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라고 한다. 전망 조차 없다.

주요한의 불노리에서 그렇게 화려하지만 죽음의 충동을 불러일으켰던 모순적인 대동강이 이제 기생과의 유희 뒤에 차가운 이미지로 부각되는 이태준의 <패랑강>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여성,기생,술, 흥분, 싸움/불 이라는 상상력 뒤에 바로 이어지는 이상견빙지, 바람, 차가움, 술이 깸, 성냥 없음, 시체, 고요/물 이라는 상상력이 급박하게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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