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노동과 자본 맑스 엥겔스 에센스 2
칼 맑스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임금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명확히 한 간결한 책자이다. 실제로 맑스는 이 글은 노동자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신 라인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다.

'경제학은 상품 가격으로부터 출발하였으니, 이는 상품 가격을 규제하는 법칙으로서의 상품 가치, 즉 모든 가격 변동들이 설명되어야 하는 출발점이자 결국 모두 다시 귀착되어야 하는 것인 상품 가치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라깡적인 개념을 들고오자면 결국 노동가치라는 것은 '누빔점'일 뿐이지 않은가. 실제 경제현상에서 가격은 기호들의 의미망처럼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서로의 관계 하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맑스의 대답은 '아니다, 노동력의 교환가치는 그 사용가치를 중심으로 진동을 한다.'일 것이다. 크게 진동할 수는 있지만 중간에 고정된 점은 이론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

고전경제학자는 '노동'과 '노동력'의 구별을 못했다고 하면서 맑스는 분명히 '노동자들이 실제로 자본가에게 화폐를 대가로 판매하는 것은 자신들의 노동력이다'라고 해서 고전경제학자들이 노정한 노동 가치의 이중성을 푼다.

또 알게모르게 빠질 수 있는 화폐의 물신성을 경계한다.
'모자라는 공급이나 지나치게 증가한 수요 때문에 어떤 상품의 가격이 현저하게 상승한다면, 필연적으로 어떤 다른 상품의 가격은 그에 비례하여 하락한다. 왜냐하면 어떤 상품의 가격이란, 교환에서 그 상품을 대가로 제삼의 상품들이 주어지는 비율을 화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격의) 변동들만이, 즉 자세히 살펴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황폐화를 수반하며 지진과도 같이 부르주아 사회를 그 근저로부터 흔들리게 만드는 이 변동들만이, 그 경과 속에서 생산 비용에 의해 가격을 결정한다. 이러한 무질서의 전체 운동이 부르주아 사회의 질서이다. 산업의 이러한 무정부 상태의 경과 속에서, 이러한 순환 운동 속에서, 경쟁은 말하자면 한 극단을 다른 극단으로 조정한다.'
사실 그러한데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따스한 천사의 배려라기 보다는 무자비한 악마의 유희이다. 이에 휩쓸리며 자본가들과 그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조심스러운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불덩이 위에 놓여진 작두를 타듯해야 하는 것이다.

'생산 비용에 의한 가격의 결정이란 어떤 상품의 제작에 요구되는 노동 시간에 의한 가격의 결정과 같은 것인데, 왜냐하면 생산 비용은 1. 원료와 도구의 마모로, 즉 그 제작에 어떤 총계의 노동일이 든, 따라서 어떤 총계의 노동 시간을 표현하는 그러한 산업 생산물로 구성되며, 2.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시간이 척도인 직접적 노동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의 무수히 많은 생산물들의 엄청난 거품들의 가격들도 과연 엄밀히 적용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알튀세가 말했듯이 맑스의 글은 엄정한 순수이론적인 저작으로 ‘추상적인’ 대상들을 바탕으로 한 저작이다.

'단순 노동력의 생산 비용은 노동자의 생존 비용과 번식 비용에 달한다. 이러한 생존 비용과 번식 비용의 가격이 임금을 형성한다. 이렇게 결정된 임금을 임금의 최소치라고 한다. 임금의 이러한 최소치는, 생산 비용에 의한 상품의 가격 결정 일반과 마찬가지로, 개별적 개인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에 해당되는 것이다. 개별 노동자들, 수백만의 노동자들은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얻지 못한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전체의 임금은 그 변동 내부에서 이러한 최소치로 조정된다.'

'개인들이 생산하는 곳인 사회적 관계들, 즉 사회적 생산 관계들은 물질적 생산 수단들의, 생산력들의 변경 및 발전과 더불어 바뀌고 전화한다. 그 전체성 속에 있는 생산 관계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들, 사회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며, 게다가 일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는 어떤 사회, 특유하고 구별되는 성격을 지닌 어떤 사회를 형성한다.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부르주아 사회는 생산 관계들의 그러한 총체들이며, 이 생산 관계들 각각은 동시에 인류 역사에서의 특수한 발전 단계를 가리킨다.
자본 또한 하나의 사회적 생산 관계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관계이다.'

'자본은 생활 수단들, 노동 도구들, 원료들로만, 물질적 생산물들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교환 가치들로도 구성된다. 자본을 구성하는 모든 생산물들은 상품들이다. 따라서 자본은 물질적 생산물들의 하나의 총계일 뿐만 아니라, 상품들이, 교환 가치들의, 사회적 크기들의 하나의 총계이다.'
'그러나 각각의 자본이 상품들의, 다시 말해 교환 가치들의 하나의 총계라 하더라도, 상품들의, 교환 가치들의 각각의 총계가 자본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상품들의, 교환 가치들의 하나의 총계가 자본으로 되는가?
그것이 자립적인 사회적 권력으로서, 즉 사회의 일부의 권력으로서 자신을 유지하고 또 직접적인 산 노동력과의 교환을 통해서 증식되는 것에 의해서이다. 노동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계급의 존립이 자본에게 필요한 전제이다.
직접적으로 산 노동에 대한 퇴적된, 과거의, 대상화된 노동의 지배가 퇴적된 노동을 비로소 자본으로 만든다.
자본의 요체는 퇴적된 노동이 산 노동에 새로운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요체는 산 노동이 퇴적된 노동에게 그 퇴적된 노동의 교환 가치를 유지하고 증대시키는 수단으로서 봉사한다는 데 있다.'
'노동자는 자신이 써서 없애는 것을 보상할 뿐만 아니라 퇴적된 노동이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그 퇴적된 노동에게 준다.'
즉 자본가에게 판매한 노동자 노동력의 교환가치는 '자본을 위해서는 재생산적으로 소비된 것이고,' '노동자를 위해서는 비생산적으로 소비된 것이다.'

'자본은 노동력과 교환되면서만, 임금 노동에게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만 증대될 수 있다. 임금 노동자의 노동력은 자본을 증대시킴으로써만, 자신을 노예로 삼는 권력을 강화함으로써만 자본과 교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의 증대는 프롤레타리아트,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의 증대이다.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자의 이해 관계가 똑같다 함은 다음과 같은 것을, 즉 자본과 임금 노동은 하나이자 똑같은 관계의 두 측면이라는 것을 이를 뿐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약하는데, 이는 마치 고리 대금업자와 도락가가 서로 제약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임금 노동자가 임금 노동자인 한, 그의 운수는 자본에 달려 있다. 이것이 그토록 찬양되고 있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의 공통성이다.'

'눈에 띄는 임금 증가는 생산적 자본의 급속한 성장을 전제한다. 생산적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부, 사치, 사회적 욕구, 사회적 향유 등의 마찬가지로 급속한 성장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비록 노동자의 향유가 상승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가 도달할 수 없는 자본가의 증대된 향유와 비교하면, 사회의 발전 상태 일반과 비교하면 하락한 것이다. 우리의 욕구와 향유는 사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기준으로 그것들을 잰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충족 대상들을 기준으로 재지 않는다. 욕구와 향유는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이다.'
맑스의 명확한 통찰이 빛난다.

'만일 자본이 급속히 팽창한다면 임금이 상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빨리 자본의 이윤은 상승한다. 노동자의 물질적 처지는 개선되었으나, 자신의 사회적 처지를 비용으로 지불하고 그렇게 된 것이다. 그를 자본가로부터 분리하는 사회적 틈은 넓어졌다.'
그렇다.

'자본가가 그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라고는 똑같은 노동 시간에 더 많이 제공해야 하는 의무, 한마디로 자신의 자본의 증식의 더 악화된 조건들말고는 없을 것이다.'
엥겔스가 재치있게 표현했듯이 크게 보아서 자본가 대 노동자의 대결 구도이지만 그 부대 안에서 또 전투가 이루어진다. 자본가들 끼리, 노동자들 끼리. 그 전투는 상품의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따라 잠시적인 휴전이 있을 수는 있으나, 끊임없는 경쟁일 뿐이다. 물론 자본가 계층의 꽤 긴 서로간의 비밀스러운 협정은 있을 수 있다. 또 계급 의식에 눈 뜬 노동자들의 단결도 있다.

'자본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산업 전쟁''의 전투는 노동자 군대의 징집을 통해서가 아니라 퇴역을 통해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사령관인 자본가들은 누가 가장 많은 산업 병사들을 떠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서로 다툰다.'
'생산적 자본이 성장할수록 분업과 기계 적용은 더욱 더 확장된다. 분업과 기게 적용이 확대될수록, 그만큼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더 확장되며, 그들의 임금은 더욱더 수축한다.'

'맑스의 현실 비판은 소외의 극복에서' '엥겔스의 현실 비판은 경쟁의 지양에서 시작되었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의 상태란 '쇠퇴하는 사회 상태에서는 누진적인 노동자들의 빈곤, 진보하는 상태에서는 복잡한 빈곤, 완성된 상태에서는 정체된 빈곤'이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동안에 새로 생산한 가치 가운데 일부는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돌아가고 나머지는 자본가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노동자의 이해 관계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는 서로 다르고, 나아가 적대적이기까지하다. 노동자의 몫이 커지면 자본가의 몫이 작아지고, 자본가의 몫이 커지면 노동자의 몫이 작아진다.'
단순 명료하다. 그러나 이를 쉽게 받아들일 비맑스주의자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 할터이다. 개별 자본가-노동자 즉 사업주 고용주 관계에서 그 개별 사업체가 다른 사업체의 경쟁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할 때 비로소 노동자는 고용될 수 있고 임금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으니 이는 공생관계라고. 그러나 '개별 자본가-노동자'라는 것은 허구이다. 총체적 자본가-노동자 관계에서 고찰해야지만 전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전체에서 자본가들은 서로 끊임없이 경쟁을 해야지만 이윤이 창출되고, 결론적으로 이 경쟁에서 이기는 유일하고 본질적인 길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 수의 감소이다.

'노동자 계급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 가능한 한 급속한 자본의 성장조차, 그것이 아무리 노동자의 물질적 생활을 개선한다 하더라도, 노동자의 이해 관계와 부르주아의 이해 관계, 자본가의 이해 관계 사이의 대립을 철폐하지는 못한다. 이윤과 임금은 그 이전이나 이후나 반비례 관계에 있다.'

'맑스의 견해의 특징은 가치, 화폐, 상품, 자본 등의 개념을 하나의 '관계'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맑스는 '모든 사회의 생산 관계들은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고 밝혔다.'

'자본이란 가치이다. 그런데 가치라는 것의 실체는 "노동 생산물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 노동이 그것들 속에 체화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결국 자본의 운동인 자기 증식 운동이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노동을 두고 벌어지는 운동이다.
결국 맑스가 설명하려던 "자본"이 "자본 관계"라면, 이는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이다. 맑스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이 자본으로서 운동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자본이 자신의 가치를 증식시키기 위해선느 임금 노동을 구매하여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인 자본 관계를 사물과 사물의 관계로 바라보고, 그 관계를 올바로 파악할 수 없게 되는 점을 두고 맑스는 종교의 세계에 비유하여 "물신 숭배적 성격"이라 했다.'

IMF이후 한국사회가 많이 변했다고 한다. 이를 IMF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IMF를 벗어난지 오래지만, 자본주의는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일자리가 점점 적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엄청난 수출을 하면서 내수가 없다고 계속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한국 경제가 악순환에 빠질 뿐이다. 노동자들은 단결해서, 노동시간을 줄여서 일자리를 늘리는 경제적 투쟁과 동시에 정치적 투쟁을 행해야만 한다. 알튀세도 말했듯이 경제적 투쟁만으로는 그 효과를 제안받는다. 이는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경향인 경제적 착취의 강화로의 경향에 대항하는 방어적인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를 공격적 투쟁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계급투쟁은 정치적 계급투쟁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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