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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우체국 ㅣ 서정시학 시인선 114
김수복 지음 / 서정시학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시집의 시들은 세 가지 흐름을 지닌다. 첫 번째 흐름은 「봄꽃」, 「나이」, 「하현달」과 같은 단시(短詩)로 압축적으로 자연을 의인화하고 활유적으로 표현한다. 동북아 시에서 전통적인 시적 대상이라 할 수 있는 꽃, 강물, 달, 해와 같은 대상들을 압축적 은유와 유사한 음가들의 반복과 변주로 시화했다.
봄꽃
입이 열리듯이
잎이 웃는다
아, 입을 벌리고
산수유 잎 웃는다
웃을 일도 없는
나는 입도 없다
아, 틀어막혔던 입에서 피는 꽃들
두 번째 흐름은 「경호강」, 「박수근」, 「귀향」 같은 시로 역사 속 거대한 폭력의 순간들을 간명하게 서술한다.
경호강
나는 지리산 방곡리에서
마을 사람들을 겨울 눈밭으로 마을 회의 한다고 집결시켜놓고 총살하는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았다는 화계리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대로 이어받은 조상들의 논바닥 위에서 그 흰 몸 위에 피를 쏟으며 죽어갔다는 양민
학살 기록을 겨울도 숨 넘어 가지 못하는 봄 철쭉꽃 필 무렵 보았다
나는 혈육이 모두 총탄
소리에 맞서 죽어간 그 쏟아진 핏줄 모아서 저문 강물은 그들의 육신이
되어 몸을 뒤척이다가 겨울 눈 내리는 날이면 그 눈발 송이 송이를 고이 받아 안으며 가슴을 들어 올리는 얼음 바닥의 얼굴을 보기도 했었다
나는 열세 살 어느
소년이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겨울 눈밭에서 죽어가는 손짓으로 멀리 멀리 아주 멀리 도망가라고
꺼져가는 손짓을 내젓는 눈빛을 멀리 보며 총탄에 맞은 다리로 삼십 리 길을 끌고 빠져나와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세 번째 흐름은 「별이 돋아날 무렵」, 「돛단배 한 척」, 「노산 여인숙」, 「동백꽃」, 「하늘 우체국」, 「예순 살 즈음에」과 같은 시로, 구체적인 시인의 일상에서의 경험을 자연물로 비유한다.
동백꽃
재개발 아파트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지난겨울 터진 보일러를 새로 놓아드린다 해도
다 허물 텐데
나는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하신다
환절기 조심하시라 해도
차분 데서 잇다가 차분 데로 가는 거는 감기 안 걸린다.
너거는 밥 제때 애들하고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기라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내 몸이 보일러다
뜨건 물도 잘도 데우는 동백꽃이다
라고
이러한 이질적으로 보이는 흐름들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러한 흐름을 풀기 위한 열쇠는 「격류」라는 시에서 보인다.
「격류」
1980년 5월 17일 서울 서소문로 정동 골목 신아일보 붉은 벽돌 사옥 1층 왼쪽 계엄 검열을 받기 위한 대학신문 검열 대장을 들고 올라가다가 좁은 외신 텔렉스 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주 민간인 500명 학살, 군부 중앙청 광장 탱크 서울 진입했다’는 외신 급보를 보고 숨이 막혀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 스무 해 전이었던가
지리산 중산리 남강상류 강변 물살이 너무도 좋아 건너 산비탈 철쭉에 빠져 불어나는 물살의 가슴팍에서 죽을 뻔 했던 적이 있었다
이 시집에서 나타나는 시인의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기억이 호출된다. 1960년 무렵, 즉 시인이 국민학교도 입학하기 전의 자연에 대한 기억이다. 자연은 매혹적이나 죽음을 품고 있다. 이 원초적 기억은 광주학살과 같은 역사적 사건과 마주쳤을 때 다시 호출된다. 역사 속 거대한 폭력의 순간들 앞에서 인간은 말을 잃는다. 우리는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은 가능한가에 대한 논의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세월호로 직접 격었다. 우리는 충분히 애도하고, 기억하고, 어쩔 수없이... 다시 살아야 한다.
시인은 가혹한 학살 앞에서 어떠한 예술적 장치를 덧붙이기를 머뭇거린다. (「경호강」) 단지 그 역사적 순간을 기록하는 것을 통해서 시는 가치를 갖는다. 한편으로는 과거 기록의 의미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시’가 되는 순간 알레고리로 ‘지금-여기’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형태로. 이러한 계열의 시들은 「격류」에서 죽음을 품고 있는 매혹적인 자연의 원초적인 기억과 만나게 되고, 시인은 이러한 자연을 계속 인간화하는 한편(1계열의 시) 인간을 자연화(3계열의 시)하는 것을 통해서 매혹적이면서도 공포스러운 자연이라는 경험을 시로 표현함으로써 이를 스스로 납득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는 「나이」, 「동백꽃」, 「하늘 우체국」과 같은 시에서 어머니와 동백꽃이라는 상징으로도 변주된다.
어머니는 허물어가는 재개발 아파트에 사시며, 스스로 따뜻하기에 보일러도 필요없다고 하신다.(「동백꽃」) 천당에 계시며, 전화를 주신다.(「하늘 우체국」) 즉, 죽어가면서 동시에 살아있다. 어머니는 물론 나의 기원으로, 자연과 같은 존재이다. 아니 자연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다. 동백꽃인 어머니 속에, 죽음과 삶이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어 있다는 것을 시인은 깨닫는다. 이 때문에 화자는 이 시집 마지막 시에서 ‘나이’를 “겨울 안부를 먼 바다 저녁 기슭에 나와 앉아있는 동백꽃에게 잊지 않고 꼭 전해주러 가는 길”이라 쓸 수 있었다.
물론 어머니를 '자연'으로 여긴다는 것은 상투적이다. 그러나 상투성 속에는 폭력과 함께 진실도 들어있다. (마치 자연에 매혹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듯) 결국 우리 모두는 어머니에게서부터 나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