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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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
올해 읽은 두번째 책이자, 첫번째 시집.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한편으로는 너무도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늙은 마초 구 운동권 사내가 보인다.

김사인 시인은 늙었다. 늙었다는 것은 나이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과거를 추억한다는 것이고, 세상을 떠난 지인들이 많다는 것이며, 죽음을 근미래로 상정한다는 것이다.

화양연화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많은 시들은 과거형으로 쓰였고, 특히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만시가 많다. 그리고 그 만시들이 눈물나게 좋다. 늙은 것, 죽은 것, 사라진 것들에 대한 따뜻하고 애달픈 시선. 적어도 우리는 모두 늙는다는 점에서는 공평하고, 그래서 이런 시들은 보편적이다. 또 모든 사람의 삶은 일회적이고 다르다는 점에서 단독적이다.


김태정

(..선략)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닌
소설 공부 다니는 구로동 아무개네 젖먹이를 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던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기나 하는지 되레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 솜씨도 음식 쏨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들 곁에서 겁 많은 귀뚜라미처럼 살았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달에 오만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히 내다보며
그 바닥 초본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하략)

이런 시들은 참 좋고, 눈물 나지만, 어떤 시들은 한국 마초 늙은이의 모습이 보여 못내 불편하다. <엉덩이>, <빈집> 등은 강간범이나 스토커를 떠올리게 한다. 은유라고 해도 이는 소름이 끼친다.


엉덩이

영주에는 사과도 있지
사과에는 사과에는 사과만 있으냐,
탱탱한 엉덩이도 섞여 있지
남들 안 볼 때 몰래 한입
깨물고 싶은 엉덩이가 있지.

어쩌자고 벌건 대낮에 엉덩이는 내놓고
낯 뜨겁게시리 뜨겁게시리
울 밖으로 늘어진 그중 참한 놈을 후리기는 해야 한다네
그러므로,
후려 보쌈을 하는 게 사람의 도리! 영주에서는
업어온 처자 달래고 얼러
코고무신도 탈탈 털어 다시 신기고
쉴 참에 오줌도 한번 뉘고
희방사 길 무쇠다리 주막 뒷방쯤에서
국밥이라도 겸상해야 사람의 도리!

고개를 꼬고 앉은 치마 속에도
사과 같은 엉덩이가 숨어 있다는 엉큼한 생각을 하면
정미소 둘째 닯은 허여멀건 소백산쯤
없어도 그만이다 싶기도 하지
남들 안 볼 때 한입 앙,
생각만 해도 세상이 환하지 영주에서는.

<오월유사>, <불길한 저녁>와 같은 역사 해석도 못내 불편하다. 70~80년대를 온 몸으로 견디고 투쟁해온 시인의 세계를 나는 감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진행형인 역사를 후일담식으로 자신 뿐만 아니라 모두의 경험을 통속화하려는 모습은 씁쓸하다. 이게 씁쓸한 이유는 아마도 나도 점점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총알값>, <이대로 좀>도 과도하다고 느껴진다. 타인의 죽음은 어떤 식으로 풍자의 소재로 가져와야 하는가. 타인의 삶, 가난의 낭만화도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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