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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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이 한국시에 대해서 쓴 글은 성겨서 읽다가 그만둘까 했는데, 5장과 6장 같은 대목이 나에게는 빛났다.

 

이 책은 일본독자를 위해서 일본어로 처음 출간되었고(2014.5) 한국에서 번역 출간 (2015.5)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대중'독자를 위한 한국시 해설이라고 치면, 어떤 의도로 이런 글을 썼는지는 알겠다. 이것이 한국독자들에게는 비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알라딘의 독자평들을 보면 칭찬일색이다. '역시 시의 힘은 세다' 등등의 평들이 지배적이라, '시'에 대해서 어떤 수준의 글이 읽히는가를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반면에 일본 아마존의 일본어판 책에는 아무런 독자평이 달려있지 않다.

 

이는 서경식 선생의 글이 한국보다는 일본에 훨씬 더 뼈아픈 글이라서이지 않을까? 후쿠시마 사고도 일본의 인류에 대한 가해라고 하는 (놀라운) 주장과 피해자 노릇을 그만하라고 일갈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원폭과 관련되는 기억이기도 하다. 반면에 서경식 선생이 한국에서 이렇게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야만적 폭력적 가해자 일본과 지성적 피해자 (재일)조선인이라는 도식을 한국 독자들의 마음에 심어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서경식 선생의 의도와는 먼데, 서경식 선생이 한국에서 '소비'되는 방식이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서경식 선생의 글은 분명히 독재 정권과 한국인은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일본 정권와 일본인을 구분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절망적인 독재정권 하에도 그의 형들을 지지했던 따뜻한 한국인들과 훌륭한 시들에 탄복하지만, 이에 대비되어 일본의 좌파나 리버럴들은 재일조선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이는 서경식 선생의 경험에서 참일 수 있다. 그의 두 형을 가두어둔 것은 한국의 독재정권이었지만, 그의 울분은 오히려 어린시절부터 그를 차별과 배제하게 한 일본(인)에게로 표출된다. 서경식 선생이 진정 경험한 것은 일본이였기 때문이다. 서경식을 형성한 것이 일본이고, 그의 모어는 일어이기 때문에, 그는 더 깊은 애증을 일본에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일본에서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모국'인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의 일부분은 이것이 '모국'이라고 끊임없이 이성적으로는 주장하지만, 그의 육체는 도저히 이 낯설고 후진 국가를 받아들일 수 없음이 그의 시들에서 잘 나타난다.

 

그 후 두 형들의 투옥을 겪으면서, 그래도 일본의 '선진성', 최소한의 민주주의, 그래도 재일조선인들이 대학교수를 하면서 지낼 수 있게 했던 일본 지성계의 진보성 등을 한국의 야만성과 대비하여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경식은 일본에 대한 날선 비판에 집중한다. 한국의 폭력적인 야만보다 일본을 비판한다. 결국 그가 말을 거는 핵심 독자는 일본인이기 때문 아닐까? 물론 그는 한국인에게도 말을 걸기는 하지만, 재일조선인의 아픔, 식민지의 폭력성 등은 주로 일본(인)을 타겟으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경식의 글은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는다. 이것이 "일본은 없다"가 한국인들에게 만족감을 주었던 방식의 대체품으로 느껴진다고 하면 심한 말이겠지만,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소비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나에게 빛났던 대목은 재일조선인 1.5세인 필자의 어머니 삶에 대한 고백과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서경식 선생의 고백이었다.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 늘 국민의 '타자'로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면서, '국가', '국민' 으로의 호명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는 존재. 정규교육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아 글을 못 읽은 어머니가 자식들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글자를 배워나가게 되는 과정.

 

서경식 선생이 강조하지만, 이는 특수한 예가 아니라 1920년대 태생의 일본과 한국에서 태어난 조선여성으로서는 일반적 예일지 모른다. 내 진외증조부, 그러니까 할머니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 중에 관동대지진 때문에 귀국했고 이듬해에 할머니가 태어났다. 할머니는  집에서 여자아이는 학교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셨다. 나중에는 한글을 읽으셨는데, 어떻게 읽으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서경식 선생의 어머님은 반대로 1920년대 말에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그 분도 일어를 전혀 못 읽으셨다.

이들이 일본의 전쟁이 지던말던 '어짜피 우리와 상관없으니까'라고 발화했다는 것과 이에 대한 서경식 선생의 해석은 흥미롭다. 국가를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를 내면화하는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면화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대상일 뿐이다. 이는 3.1운동 관련 새로운 연구들이 보여주고 있는 '무지렁이'들이 만세운동에 '동원'되었던 방식들과도 상통하는 바이다.

 

이런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담으려는 시도가 소중하고 또 고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할머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참 없구나 하고 슬펐던 기억이 난다. 말할 수 없는 자들에 대한 증언. 그리고 그 증언 자체가 폭력일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인정하면서도, 적을 수 밖에 없는 심정.

 

나는 일상적인 타자로서 평생 살아가면서 모국에 돌아가도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경계인의 처지를 감히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 길거리에 나서면 동양인을 보고 '치노~ 치노'라고 놀려대던 곳에서 자라고, 수업 시간에 옆자리에 앉으면 꺼지라고 했던 백인들 틈 사이에서 느꼈던 '아웃사이더'로서의 심정은 생생하다. 그리고 이것이 내 '소수자'성, 또는 소수자와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밑바탕에 있는 근본적 경험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끊임없는, '국민', '민족', '국적', '국어'라는 말이 폭력적이라는 증언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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