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이방인에는 세 층위의 이방인이 있다. 주인공 뫼르소라는 이방인, 뫼르소가 '아랍인'과 무어인'이라고 부르는 이방인, 그리고 이국의 독자인 '나'라는 이방인.

   줄거리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죽이게 되는 것이 1부. 2부는 재판과정과 독방에 갇혀서 독백과 신부와 대화를 하면서 죽음에 대한 단상들이다.

  탈식민주의의 세례를 받은 독자로서는, 뫼르소가 '아랍인'이나 '무어인'이라고 지칭하는 인물들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다. 뫼르소는 다른 프랑스인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은 이름을 부르는데, 유독 '무어인'과 '아랍인'들은 도드라지게 국적이나 인종으로 지칭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소설에서 다른 프랑스인들은 이름을 부르는데, 유독 '아시아인' 몇명이 나를 보고 있었다. 라는 문장을 마주했다고 해보자. 이것이 어떤 느낌이겠는가? 불어로 쓰인 것을 한국어 번역으로 읽고 있는 이방인 독자로서는 이것이 매우 도드라진다. 이방인 독자로서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밤을 새는 것도, 이것이 의례 그렇게 하는 것인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재판정에서 사람들이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전혀 울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시삼는 것도, 이것이 얼만큼의 문화적 일탈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이 두 층위의 이방인과 서술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뫼르소의 이방인성이 만나면서, 더욱 이 텍스트는 혼란스러워진다. 서술자가 강조하는 뫼르소의 이방인성은, 아마도 타인의 시선 내지는 문화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솔직함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이방인성은 한편으로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의 이방인성과도 닿아있다. 사람을 죽여놓고,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꾸미지도 않는 것. 반사회성, 비사회성의 이방인성은, 독자로서 시공간의 거리가 있는 문화권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과연 이것이 얼마만큼의 이방인성인지를 의아하게 한다. 마지막에 타인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아무도 없다는 깨달음을 위해 이 소설은 지금까지의 줄거리를 전개해온 것과도 같은 모양새를 띤다. 


"참으로 오랜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방인의 마지막 대목이다.사람은 모두 홀로 죽는다는 이 아포리아. 그럼에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시지프스의 신화가 여기에 슬쩍 암시된다. 모두와 홀로. 그리고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이라는 역설. 모두와 홀로라는 대립은 정다운 무관심이라는 역설과 연결된다. 그리고 이 둘의 긴장은 급작스럽게 '행복'이라는 감정으로 해소되고 만다. 그리고 이는 다시,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행복감과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증오라는 대립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결말은 급작스럽고, 모순적이라, 소설적이라기 보다는 시적이다. 혹은 종교, 특히 불교적이거나 역경의 태극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의미없는 삶의 의미있음, 내지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불치병이 모든 생명에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다. 모든 것은 사소하지만, 그 사소함이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이 필멸자의 행복감이 구경꾼들의 증오의 함성을 맞이하기를 희망하는 것은, 그 구경꾼들이 죽음을 잊기 위해 혹은 그 사소한 '사회'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점찍은 자신을 바라보는 무지한 시선을 느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그러한 증오가 결국은 본질적으로 죽음이라는 것 자체를 향해 있다는 것을 통해, 오히려 그 군중들과 연대해서 자신의 죽음을 증오하기 위해서일까. 혹은, 모두 홀로 죽지만, 정말 홀로 죽지는 않게, 즉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다만 자신보다 조금 늦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동료들이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 주위에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를 읽으며 떠올랐던 것은 윤동주"서시"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라는 대목이다. 한명의 사형수를 둘러싼 증오의 함성과 전혀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 그리고 그것의 위대함. 그러나 한편으로, 윤동주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자신과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 별처럼, 가슴 깊이는 자신도 죽어가는 것임을 깨달았어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기독교적인 신의 자리에서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 윤동주 시의 순교자 이미지들은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완전한 소멸로서의 죽음을 거부한다. 순교를 한다는 것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뚜렷한 증거이며 따라서 영원한 천국의 약속이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에, 윤동주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며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정다운 무관심의 세계에서 모두 홀로 죽어가며, 덜 외롭도록 증오의 함성이라도 기대하는 이방인.

하느님의 따뜻한 눈 아래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는 시인.

안타깝게도 나는 전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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