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루저녀 논란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루저녀를 매장시킨 네티즌들의 행위와, 그것이 어떠한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가 하는 지점이었다. 이는 얼마전 고 최진실씨를 비롯한, 연예인들의 자살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왜 '우리'는 '루저녀'를, 그리고 연예인들에게 '댓글'이나 게시글을 달고, 이 '루저녀'나 연예인들은 이에 반응하고 괴로워하는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벤담의 일망감시체제를 설명하며, 이것이 '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킴으로서, 이 건축의 체제 자체가 권력의 작동방식을 만들어낸다고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일망감시체제란, 수인들은 각자의 감방 안에 나뉘어서 서로는 볼 수 없지만, 가운데 탑에서 감시자는 모든 감시자들을 볼 수 있고, 교묘한 건축적 장치로 수인들이 감시자(들)이 자신을 감시하는지 아닌지 여부도 알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공인'들의 경우, 이러한 '일망감시체제'적인 권력 배분이 발생한다. '공인'들은 보여지지고, 우리는 그러한 '공인'들을 본다. 루저녀가 논란이 되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까발림의 대상이 되게 된 근본적인 '권력'은 이러한 시선의 '봄-보임'의 분리에 있다.  

인터넷 시대에 '공인'들이란 그러한 권력의 배분을 깨닫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익명'이 아니며, 끊임없이 시선에 노출되어 있고, 그런 측면에서 그들을 보는 '우리'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연예인들이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돈과 명예 등을 획득하는 계약을 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특히 인터넷과 같이 공개되고 쉽게 자신의 의견을 남들에게 표할 수 있는 매체가 전면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첫째, 이러한 '인터넷'이라는 매체로 인해, 소위 '다중'이 어떠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배치가 드러나고 있다면 이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것. 둘째는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를 경유해서, 다시금 맑스 또는 맑스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첫째 상념과 연결되는 것은, 최근의 미네르바, 그리고 이제 30년전이 되는 광주이다. 아직 지금의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검열이 존재하지만, 그 검열이 부재의 흔적을 남긴다. 따라서, 인터넷이 있었다면, 30년전 광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고 최진실이나 루저녀 사건 또는 조두순 사건 같은 현상도 나타난다. '다중'에 의한, 인터넷을 매개로 한, 처벌, 소문의 전달 등. 

푸코의 접근과 대비해보면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접근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권력을 확보하고 있고, 이 권력이 왜 부당한가가 된다. 반면에 푸코에서 핵심은, 이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는가이다. 전통적인 '누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중의 부각이나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아도르노 식 비판이 물론 존재할 수 있지만)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질문은 '어떻게'로 돌려본다면, 다른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촛불과 루저녀. 두 가지가 존재한다. 인터넷 안과 그 밖이라는 경계도 문제적이다. 

두번째,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던지고 있는 흥미로운 가정은, 모든 사람이 눈이 멀고 한 사람만 볼 수 있다면 어떠한 세상인가 이다. 많은 독자들,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장님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노릇을 한다'와 같은 속담을 떠올렸을 것이지만, 오히려 주인공은, 눈먼자들이 자신이 눈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며 두려워 한다. 따라서 그녀는 눈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비밀로 한다. 

나는 남들을 모두 볼 수 있지만, 남들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 물론 여자는 이를 이용해, 불의를 응징하지도 하지만, 만약 '모두' 또는 '다수'와 '소수'라는 이분법이, 볼 수 없는 자와 볼 수 있는 자라는 분류와 결합하게 되면, 볼 수 있는 자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러한 알레고리는, 현재 '88만원 세대' 논의와 맞물려서 흥미로운 지점들을 생각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모두 '88만원'이며, 이것을 극복할 가능성이 '없다'면? '거의 희박하다'가 아니다. 지금 '당신'한테 없다면? 우리가 '부르주아'가 될 가능성이 '없다'면? 그러면, '볼 수 있는 자들'은 '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의 극복가능성이 있다고 믿게 만들며, 언젠가 볼 수 없는 자들이 볼 수 있는자들이 될 지도 모른다고, 또는 볼 수 없는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윤리적'으로 닥치고 살라는 생각들 때문에 지금과 같은 다수와 소수의 이분법이 공고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소수의 '볼 수 있는 자들'은, 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한다. 

맑스(주의)적으로 말한다면, 여기가 끝일지 모르나(혁명이후, pt독재 이후는 '유토피아'적 환상으로 점철되어져 있거나 '영구혁명'), 사라마구와 푸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자들을 볼 수 없는 자들이 잡아서 노예로 부린다고 해서, 사회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시 볼 수 없는 자들 중에서, 강한 자들이 나머지를 부리는 사회가 왔던 것을 우리는 목도하지 않았는가. 문제는 어떠한 식으로 권력이 배분되고 행사되어야 하는가이다.  

벤담의 '일망감시체제'에서, 중간에 있는 높은 탑에는 누가 들어가도 상관없이 잘 작동한다. 문제는 배치다. 

* 앞으로 공부하고 싶은 것은, 매체론이 될 것 같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매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