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론을 전체적인 삶의 방식에 존재하는 요소들의 관계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하고 싶다. 문화의 분석은 이러한 관계들의 복합체인 사회 조직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특정한 작품이나 제도에 대한 분석은 그 조직의 본질적인 종류, 즉 작품이나 제도들이 전체 조직의 일부로서 구현하고 있는 관계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서 키워드는 패턴이다. 모든 유용한 문화분석은 특징적인 종류의 패턴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일반적인 문화 분석이 염두에 두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 별개로 고찰되던 활동들 사이에 예기치 않았던 동질성이나 상응관계를 드러내주거나, 때로는 예기치 않았던 단절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논의는, 다소 에세이 같다. 어떠한 키워드, 예를 들면 '권력'이나, '계급투쟁'같은 개념들이 없고, '패턴'이라니.. 그렇다면 이제 의문은 그 '패턴'의 작위성이다. 연구자의 '선택'에의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윌리엄스는 또, '또다른 공통 요소, 그러니까 성격도 패턴도 아닌,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이 체험된 실제적 경험에 대한 감각까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실제적 경험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사시 ㄹ우리는 어떤 시대의 예술에서 그러한 접촉을 가장 많이 의식하고 있다. 그 예술을 그 시대의 외면적인 성격과 대비해보고 개별적인 변종들을 감안하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가 쉽게 자리를 정할 수 없는 중요한 공통의 요소가 있다. (...) 그것을 묘사할 때 내가 제시하는 용어는 감정의 구조이다. 그것은 '구조'라는 말이 암시하는 바대로 견고하고 분명하지만, 우리 활동 가운데서 가장 섬세하고 파악하기 힘든 부분에서 작동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감정의 구조는 한 시대의 문화이다. 그것은 전반적인 사회 조직 내의 모든 요소들이 특수하게 살아 있는 결과이다. 그리고 한 시대의 예술이 (...)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이다. 왜냐하면 다름아닌 바로 여기서 이러한 특성은 표현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종종 의식하진 못하지만, 실제적인 생활 감각, 즉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심층적인 공동체는 그것의 보유자보다 오래 살아남은 기록된 커뮤니케이션 가운데 독보적인 사례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그러하다. 그 감정의 구조를 (...) 공동체의 개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실제의 공동체에서 그것은 매우 심층적이고도 광범위하게 소유되고 있는데, 그것은 의사소통이 의존하는 기반이 바로 감정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설득되기 어렵다. 이는 분명 변증법적으로 쓰였을 터인데, 왜 글은 이리도 '전제'-'확인'식으로 쓰여지는 것일까. 사실 영문학이나, 1840년대 영국에 대해서 아는 것은 '풍문' 뿐이라서 더욱 이런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모든 독자는 모든 논자에 비해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 그럼 조금더, 친절하게 혹은 조금더 선포가 아닌 '설득'적으로 쓰여져야 하지 않을까. 각주가 하나도 없는 에세이다. 하지만 점점 기대는 되는데, 진짜 분석은 어떠할까, 어떤 시야를 보여줄까 하는 것이다. 그래도, 레이몬드 윌리엄스잖아, 라고.
"한 사회에 속한 어떤 개인도 그 사회에 대한 사실들 중 선택된 부분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말했듯이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음 세대의 어떤 사람도 결코 복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소설들이 씌어진, 그리고 우리가 선택을 통해서 그에 접근해보고 있는 삶에 대한 감각이다." (96)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며 사회 성격을 경험 속에서 현실감 있게 전개시킨다. 그러나 예술은 새로운 지각과 반응들을 통해서 사회가 그 자체로서는 깨달을 수 없는 요소들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예술과 예술을 낳은 사회를 비교해보면 예술과 나머지 생활 전반 사이의 심오하고도 중심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현실적인 관계들을 발견할 수 있다. (...) 또한 예술에는 특징적인 형식과 장치들을 통해 그 사회의 막다른 골목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의 증거 -종종 이런 식으로는 처음으로 의식 속에 인정되는-가 있다." (122)
흠.. 같은 해 세상에 던져진 푸코의 박사논문과 비교해봐도 흥미로울 듯 하다.
푸코가 바라본 역사, 푸코는 말하고 싶은 주제 "어떻게 광기는 이성에 의해 괄호쳐지고 규정되고 또 감금되었는가?"를 통해 '역사'라는 것을 바라보는데, 또 이를 통해 '심리학'이라는 것을 탈신비화하는데, 윌리엄스의 질문은 아직까지 잘 보이지 않는다. '문화사 연구를 위한 시론' 정도의 문제의식 정도인데, 각 영역들을 아우르는 '전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의한다. 사실 이는 푸코와는 정반대의 방향성으로, '문화연구'의 확립을 위해, '문화'라는 것의 신비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