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재灰 > '아도르노'가 멀지 않은 까닭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에 대한 노성숙의 서평 한 대목은 헤겔 변증법과 아도르노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 이러한 헤겔 변증법(자체 긍정성These, 이를 부정하는 반정립 Antithese, 마지막 '단계'로서 그 둘의 모순 대립을 고차원적으로 매개하는 종합Synthese으로의 '이행'을 강조)과 가장 다른 점은, 두 번째 단계에서의 부정성이 세 번째의 긍정성에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아도르느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성에로 대치되는 데에서 '동일성 사고'의 전형이 드러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동일성 사고 안에서 주체성의 원칙만을 절대시하는, 그리하여 객체가 갖고 있는 다양한 경험적 내용들을 배제한 채 단지 순수하게 형식적으로만 치닫는 기만성이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변증법은 필연적으로 주체와 객체(타자), 나와 남, 부분과 전체, 개별과 보편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짜임 관계"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한 가지 답안이다. 벤야민의 '성좌', 이진경의 '외부', 들뢰즈의 '리좀', 조동일의 '화이부동', 지젝의 헤겔옹호론이 떠오른다.

"짜임 관계"에 들어선 이후에 대한 한 대목: "객체는 더 이상 주체의 지배 아래 놓인 동일성의 폐쇄적인 체계안에 속박되지 않고 해방되며, 주체는 객체의 비동일적인, "질적인 계기"(103쪽)들을 수용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주체는 이중적인 의미를 확인하게 되는데, 내적으로는 그 스스로도 역시 하나의 객체임을 인정하는 한편, 외적으로는 주체 자신이 항상 타자인 객체들과의 연관성 속에서야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객체(타자, 비동일자)의 우선성으로 이행함으로써 변증법은 유물론적으로 된다.(274쪽)"
'변증법이 유물론적으로 된다'는 아도르노의 명제에 대한 한 대목: "아도르노가 '객체의 우선성'을 통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바는 주체(동일자)에 대항하는 객체의 유물론적 경험인데, 이는 곧 동일성에 대항하는 비동일자의 저항의 경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아도르노에게서 객체란 "비동일자의 긍정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도르노는 주체성의 기만을 깨뜨리는 비동일성의 철학, 즉 주-객의 위계질서에 의한 '동일성의 인식'을 해체함으로써 주-객의 새로운 '짜임 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비동일자에 대한 '철학적 경험'에 이르게 된다."; '주체성의 기만을 깨트리는 비동일성의 철학'이라는 노성숙의 서평 표제가 타당하다.
<부정변증법>의 '방법'에 대한 역자 김유동의 서평 한 대목: "그의 방법에서 오해되어서는 안될 중요한 점은 그가 부정적 총체성이나마 총체성의 범주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개념이 만든 족쇄는 개념이 풀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충실히 지킴으로써 합리성의 속박 너머에 있는 비합리성의 세계에 충분히 열려져 있으면서도 비합리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 "주체나 주체의 현실적 속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우주 속으로 달아나버리는 교의들은 쉽게 세계의 경직된 상황 및 그 속의 성공기회들과 결합될 수 있다"는 아도르노의 지적은 속박의 틀이 완벽해짐에 따라 유목민적인 탈주의 논리가 새로운 지배조류로 부상하고 있는 지금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경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속된 탈주들, 난립하는 차이들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 김유동은, 아도르노의 '잘못된 세계의 존재론'이 "질(質)과 사용가치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말살되어버린 채 순수한 양(量)으로서의 교환가치의 지배가 더욱더 철저해지는 카지노자본주의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론"일 수 있음을 제임슨과 함께 긍정했다. 그런 긍정은 그러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일종의 '감옥'으로 되며, 현대의 지식인은 그 감옥에서의 '탈주'라는 책무를 부과받는다: "20세기 초의 위대한 모더니스트들과 동시대인이면서 아우슈비츠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아도르노는 현대세계라는 체계 바깥에서 이 체계를 관조하고 비판하는 개인적 주체의 경험적 특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러한 자리가 오늘날의 지식인에게 마련될 것 같지는 않다. 그 때문에 현실이라는 족쇄를 재현하는 아도르노 사상은 그 자체가 또다른 의미의 족쇄로 다가오는데, 그 올가미를 감당하면서 어떻게 삶을, 실천이나 탈주의 놀이로 풀어갈 것이가는 오늘날의 지식인의 숙제일 것이다." 아도르노가 '참된 중도(中道)'였는지는 논외로 하고, 그가 좌우의 포격으로 68혁명의 와중에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사태는 우리 사회 '중도의 괴멸'이라는 한 단면을 환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족쇄이자, 탈주의 디딤돌인 아도르노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