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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론비평(2007. 4. 13)  / 우리 철학의 서론으로서의 서로 주체성

 

[연세대 대학원신문 152호]기획서평 김상봉, 『서로주체성의 이념』(길, 2007)

 

김선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 swk@ssu.ac.kr

 

서로주체성의 개요


   
▲ 길 펴냄 
주례사 비평을 삼가고 비판적 대면을 바라는 원고청탁서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이 책에 대해, 이 책 스스로가 자임하듯 “우리 철학”의 서론을 열어가는 사유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적극적으로 해 주어도 좋을 듯하다. 좋은 책이 그러하듯 읽어가는 과정에 생각을 자극하는 많은 내용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서 책 읽는 시간만큼의 사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을 이 책과 더불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경험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강단철학의 문제와 한국의 기성 철학의 한계 지적이 근본적인 수위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반성은 한국의 철학계와 철학교수들에 대한 총체적 반성이고, 총체적 불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의 여정은 처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더디고, 또 수시로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는 자기조회를 부단히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반복적이다. 그러기에 정치한 서구의 이론에 훈련된 철학자들은, 마치 명연주의 음반에 귀를 버린 음악애호가가 실제 무대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대해 절하하는 평가를 하게 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이 책에 대해 보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책에 도움이 되는 것은 찬사가 아니라 비판일 것이고, 김상봉 교수도 바로 이를 바랄 것이라 생각되어, 세 가지 점에서만 필자의 관점을 피력해 보겠다. 많은 내용 가운데 오직 세 가지만을 적시하는 것은 필자의 관점에 따른 것이니, 다른 부분에 대한 유익한 비판과 평가는 다른 기회에, 또 다른 분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겠다.

관념론적으로 설명된 서로주체성의 문제

이 책의 전체 걸쳐 활용되는 은유가 있는데, 그것은 비추임이라는 은유이다. 이는 철학적 반성을 말하는 것이고, 이 점을 표현하는 매체가 거울이고, 물이고, 우물이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윤동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김상봉 교수는 서로주체성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거울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독일 관념론이었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독자가 이 책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는 언어가 관념론적 언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 자체를 형성하고 있는 벽돌과 같은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우리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관념론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관념론에 본래적으로 내재된 문제를 자신의 개념 속으로 고스란히 가져와버리지 않았는가하는 의문을 금할 수 없다.


관념론의 근본적 문제란 주객분열의 문제이다. 그것은 인식의 주체를 설정하고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는 의식철학적 구도를 형성함으로써 분열된 주객의 통합을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관념론은 문제는 만들었어도 해결은 결코 할 수 없는 사유의 패러다임인 것이다.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가 후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후설이 상호주체성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려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철저하게 의식철학적 패러다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 김상봉 교수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서양철학의 시도는 언어에 대한 이해였는데, 김상봉 교수에게는 언어에 대한 충실한 검토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관념론적인 복잡한 설명으로 복잡하게 된 생각을 담은 전반부와, 언어의 힘을 보이는 시를 활용한 서로주체성에 대한 진정한 해명을 담은 후반부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변신론적 역사관의 활용

서로주체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만남에 대한 강조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김상봉 교수는 만남에 대한 선험적 이해를 요구한다. 이는 만남이 세계를 구성하는데 있어 구성적 지위를 가지기 때문에 요구된다. ‘요구’된다는 말은 그것이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 '나르시스의 꿈', 한길사 펴냄
그런데 서양의 홀로주체성과는 다른 주체성을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자기상실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로주체성의 탄생과 경험을 위해서는 자기상실의 경험이 필수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그러한 것을 과연 요구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론적으로 필요할 때 동원되는 장치가 역사이고,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변신론적 장치이다. 그리고 이 변신론적 장치는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그러한 경험의 필연성을 교묘하게 정당화한다. 이 책의 곳곳에서 활용되는 역사철학은 반성되지 않은 변신론적 기재로 활용되고 있지 않은지 의심되어야 했다.


이런 장치가 필요 없으려면 이 책에서 거울로 사용하고 있는 관념론적 패러다임을 보다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만남이 더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 만남은 ‘선험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설명방식이 아니라, ‘살가운 만남이 몸으로 요구되어야 한다’가 원래의 의도를 더 잘 해결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만남(Bebegnung)에 대한 김상봉 교수의 지적, 즉 서양의 철학에서 만남에 대한 강조가 없는 것, 심지어 만남의 사상가인 부버에게서 나타나는 만남의 제한성의 지적은 너무나 적절하다. 사랑, 인정, 책임, 환대라는 말이 홀로주체성의 표현이라는 지적은 참으로 적확하다. 여기에 나는 자비의 원리, 똘레랑스, 노블리스 오블리쥬도 포함시킬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만남, 서로주체성의 핵심은 무엇일까? 한용운의 “복종”은 시이지 철학이 아니다. 우리는 김상봉 교수에게 더 철저한 철학적 분석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젠 서론이 아니라 본론을

겸손하게, “저는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맞아요, 당신은 부족해요”라고 응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대화법이다. 김상봉 교수는 겸손히, 이 책이 서론이라고 했다. 이 말에 대해, 맞아요, 이 책은 서론에 불과해요, 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김교수께 본론을 부탁하고 싶다. 구체성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그리고 사족처럼 덧붙이고 싶은 것은, 후설과 레비나스에 대한 평가다. 후설이 상호주체성을 말하고 레비나스가 타인의 얼굴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정확히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후설에 대한 평가에는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후설과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경험을 나름대로 담은 레비나스의 경우는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자기상실을 경험한 유대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시온주의와 같은 공격성으로 표출하기도 했다. 그것이 오늘의 중동사태를 낳았다. 하지만 유대인들 가운데도 시온주의와는 다른 길로 걸어간 사상가들의 생각은 김상봉 교수의 서로주체성과 잇댈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물론 이는 나르시스적 주체성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 자기상실의 경험이므로, 우리의 경험과는 다른 부분이 많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더. 우리의 경험은 남미와 아프리카의, 상실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과의 연대성을 불러일으키는 만남이 가능할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이미 이에 대한 인식을 통해 만남을 갖고 있으므로 이 만남의 이야기를 곧 들려줄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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