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식민지 근대'에 연착륙한 문학연구

* 담론비평(2007. 3. 20)  / '식민지 근대'에 연착륙한 문학연구

 

역사비평 봄호, 최근 문학연구 동향 총정리

 

리뷰팀 review@dambee.net

 

가라타니 고진이 일러주지 않았어도 근대문학의 종말은, 적어도 '근대문학' 전공자들 일부에게는 암묵적 동의를 얻고 있었다. 그것은 "부자되세요"라는 광고가 내뱉기 힘든 것과 똑같이 알고 있어도 내뱉기 어려운 외침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최근 몇년근대=민족= 문학을 비판, 상대화하여 그것을 벗어나려는 글쓰기와 연구가 점증한 것은 우리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확인사살하고 싶어했던 그 욕망의 증거이다.

'역사비평' 2007년 봄호에 윤대석 인하대 박사후연구원이 이런 연구동향을 총정리하는 글을 실었다. 복잡한 연구지형을 몇갈래로 나누어 주요 연구자들을 언급하고 그 의미와 한계를 간단간단히 짚고 있어 매우 유용하게 읽힌다.

먼저 그는 문학연구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을 환기시킨다. 국가가 자본을 통제하는 시기에근대=민족=문학이 그 존재의의를 가졌다면, 국가가 자본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본이 직접  개개인을 제어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민족주의라는 비효율적 사상, 문학이라는 비효율적 글쓰기는 퇴출대상 목록에 올랐다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문학이라는 제도를 지킨다는명목으로, 혹은 다음 세대로 무사히 이월시킨다는 핑계로 이런 과거의 문화적 기호들을 자본으로 변형시키는 문화콘텐츠론, 스토리텔링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훌륭한 어용(혹은 자용) 학문이라는 자조가 오가기도 한다고 요즘의 분위기를 전한다.

그렇다면 이 틈새에 '의미있는 시대착오'로 존재하려는 경향, 아니면 그와는 자못 다르게 '자본에 흡수되려는 변태'로서의 문학연구의 흐름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문학연구가 민족=근대에서 최초로 탈출할 때 올라탄 것은 문화였다. 바로 문화연구로의 전환이다. 90년대 중후반 들어서 포스트콜로니얼연구(식민지라는 타자), 문화연구(대중이라는 타자), 페미니즘연구(여성이라는 타자)가 문학 개념의 자명성을 의심하고, 문학 개념 형성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의지를 계보학적으로 밝히는 공동전선을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선두에 선 것이 문화연구다. 문화연구는 우선 문학 제도사연구에서 시작되었다. 아무리 문화라 해도 문학과의 연관성을 살려두어야 국문학 제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탓이다. 이 연구들은 문학이 시장과 제도 속에서 형성된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을 드러냈다.(사실 이 분야 가장 선구적인 연구는 90년대 초반 김화영 교수가 계간 '세계의문학'에 소개한 '문학이라는 제도'라는 블란서제 담론일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이런 제도사연구는 문화정책, 매체, 출판, 독자, 지식제도 등으로 그 소재를 다양하게 늘려나갔다. 최근에는 식민지기 검열연구를 통해 검열주체와 검열객체 간의 상호성의 측면에서 문학생산의 장을 해명하기도 하고, '소년', '청춘', '조선문단', '학지광' 등의 매체들이 어떻게 문학이라는 독특한 언어질서를 구성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범람했다. 이런 연구들은 동인지나 등단제도 같은 연구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근대문학의 종언'이 운위되는 시점에서 볼 때 오히려 '과거의 적'을 상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현실과 떨어져 학문적 유희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는데, 이들 연구에서 젠더의 관점이나 탈식민의 관점이 거의 없어서 더욱 그랬다고 윤 박사는 정리한다.

그 한편에서 문화연구의 또 다른 지류로 풍속사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천정환, 권보드래, 이경훈, 김동식 등이 대표적인 연구자들인데, 이들은 "텍스트의 미시적 측면에 대한 실증적 재구성, 사회문화사적 주제의 탐색과 텍스트 외부의 적극 참조, 텍스트 사이 경계나 문학 내부의 위계에 대한 무관심" 등을 특징으로 내세우며 문학=근대 너머에 내팽개쳐져 있는 타자성의 정치학을 발굴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구호에 가까웠고 실제 연구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것은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결론인데, 게다가 이들은 하정일 원광대 교수 같은 이에게 "식민지기의 연애나 성풍속, 취미오락 등을 자본주의화과정의 자연스러운 산물로 설명하는 데 그쳐 현재 고급 상업문화의 일부가 되었고, 시장 시스템에 자발적으로 편입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윤 박사는 이런 비판에 대해 오히려 비판적인데 "연구의 필요성"까지 부정하는 비판은 너무 심한 것이고, 또한 이들 풍속사 연구가 "개인을 평균화시키고 균질화시킴으로써 몰개성과 획일화를 불렀다"는 비판은 "대중의 성격이 고원하면서도 심연을 거느리고, 결핍이면서도 언제나 과잉인 측면"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풍속사적 연구에 대해 "서구 형이상학의 존립논리와 같은 방식"(차혜영)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는데, 윤 박사는 이에 대해서도 "최종적 준거지점을 삭제하려는 급진적 타자성에다 대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대중을 혹은 문화를 최종준거로 삼아 근대=문학을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나 혹은 그에 대한 비판논리로서 훌륭하게 제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변호한다.

참 억지스러우면서도 포스트모던하게 느껴지는 논리이긴 하지만, 그 이상 주장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뭐라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는 논평이다.

아무튼 윤 박사는 세번째 흐름으로 넘어간다. 포스트콜로니얼 연구가 그것인데 이들은 근대=문학이 아닌, 한국=근대에 초점을 맞춘다. 이 흐름은 내셔널리즘비판과  파시즘연구를 거쳐 식민지근대의 연구로 이어졌다. 특히 이태준의 '농군'을 해석함에 있어서 김재용-김철 간의 해석논쟁, 홍기돈-김예림 간의 2차논쟁 등이 벌어지는 등 활발하게 성과를 냈지만 곧 심각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들이 근대의 주체가 거기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억압해왔다고 비판하지만, 주체 해체가 초래한 주체의 부재상태는 '누가' 근대극복을 실천할 것인가라는 상식적인 질문 앞에서 할말을 잃는다는 비판이다.

또한 이 분야 연구의 가장 대중적인 개념으로 자리잡은 '대중독재론' 또한 '지배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난다면서 '지배와 동의'라는 메카니즘을 제시했는데, 이것 또한 '지배와 동의'라는 이분법에 매몰돼 그때그때 구체적으로 이뤄지는 저항행위 내에서 미세하게 작동하는 계급 역관계의 양상이나 그것의 시간적 변화양상에 대해 몰각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이런 딜레마에 빠진 포스트콜로니얼연구가 연착륙한 곳이 바로 '식민지 근대'라는 일종의 공간성인데, 식민주체와 객체가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적 관계에 있고, '주체'로 회귀하지 않고 저항/협력할 공간이 발생한다는 관점이다.

권명아 등이 이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데, 이 단계에서 문학연구는 더이상 '저항'과 '탈'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움직임이 아닌, 근대문학 존재생성의 풍부한 육체 그 자체를 음미하려는 경향성을 띠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