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구판절판


일본을 떠나기 전에 "영국에 가는데 묵는 호텔이 미국 대사관 부근"이라고 했더니 "자폭공격의 표적이 되니까 테러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가까이 가지 말라"고 정색을 하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불운을 한탄하지 않을 자신은 없고, 공격한 자를 증오하지 않을 자신도 없지만, 그 운명을 끔찍하게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차지하는 위치는 충분히 그와 같은 죽음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폭공격이라는 행위가 어떤 필연성을 지니고 존재하는 한, 내가 거기에 말려든다는 건 이치에 맞는 일이다.
하나는 일본이라는 '선진국'에 살기 때문에 내가 누리는 기득권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이 바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또 하나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행위에 종사하면서 이 세계를 바꾸는 길을 개척하는 데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무력감 때문이다.-46-47쪽

내셔널리즘이라는 근대적 상상력은 '국민'을 하나의 유기적인 신체로 상상한다. 프로이센의 농민 아무개, 작센Sachsen의 장인 아무개, 바이에른Bayern의 공증인 아무개를 일괄해 '독일인'으로 상상한다. 그러기에 라인 강변의 누구누구가 '프랑스인'에게서 상처를 입으면, 프로이센에서도 작센에서도, '우리'가 상처받았다고 분개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자'를 상상하고, 그들과의 차이를 강조해, 그것을 배제하면서, '우리'라는 일체감을 굳혀간다. 추도의 의례는 그 소름끼치는 국민적 상상력과 깊이 연결돼 있다. 타자와의 싸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바친 자들의 묘. 그것은 이미 개별적인 사자의 묘가 아니라, '우리'라는 관념, '국민'이라는 관념의 묘인 것이다.-59쪽

인간은 또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귀족과 노예, 지주와 소작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구도로 인류사회학을 이해하고,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해방을 지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기에서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노예여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왜 검은 피부로 태어났는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왜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났는가? '생의 우연성'과 연관되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근대 이후의 합리주의적 사상은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운명의 불연속성을 연속성으로, 우연을 의미 있는 것으로, 세속적으로 변환시키는 일이 필요하게 된다. 그 '변환 장치'야말로 내셔널리즘이라고 앤더슨은 말하고 있다.
개인들은 운명의 우연성과 유한성으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다. 종교 사상도 이미 의지할 게 못 된다면, 인간은 무엇에 의지해 죽음이라는 궁극의 숙명성을 견뎌내야 하는가. 거기서 영원불사의 존재로서의 '국민'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60-61쪽

1936년, 조선반도에서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인 시오바라 겐자부로가 조선 사람들을 향해 "천황 폐하를 위해 신명을 바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자기 희생이 아니라, 소아小我를 버리고 크나큰 존엄에 살아 국민으로서 참 생명을 발양하기 위함'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은 참으로 사는 것이니, 참으로 살고 싶으면 죽으라는 것이다. '나'는 유한하지만, '국가'나 '국민'은 무한하다. 따라서 '국가'나 '국민'을 위해 죽으면, 그 '나'는 불사의 존재가 된다. 근대의 내셔널리즘이 만들어낸 '국민'이라는 관념, 국토나 혈연의 연속성, 언어의 문화의 고유성과 같은 환상에 의해 구성되는 이 만만치 않은 관념은, 인간이 갖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사의 욕망에 의해 지탱된다. 자신의 재산 혈통 문화를 영구히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내셔널리즘의 토대가 된다. 이 관념에 맞서 이기기 위해서는 결국 죽음이라는 숙명과 삶의 우연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61-62쪽

사람은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죽는 것이다, 혼자서 살고 혼자서 죽는다, 죽은 뒤는 무無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내셔널리즘에서 오는 현기증을 극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달려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너무도 힘겨운 일이다.
분명히 마르크스주의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상이 형성된 배경에서 유대-기독교적인 종말론의 영향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는 바다. 계급투쟁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를 거쳐 계급의 소멸에 이르면 그 시점에서 인류의 진정한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는 구상은, 일종의 종말론적 유토피아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불사에의 바람을 이러한 구상에 기대어 해소하고자 한 이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 정권 붕괴 이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산당이 민족주의 정당이나 원리주의 집단으로 변모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의 죽음과 불사를 둘러싼 상상을 해소해줄 대상을,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꾸었을 뿐이다.-62쪽

바그너의 작품은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등의 감정을 일단 젖혀두고, 말하자면 몰주체 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얻는 최상의 방법이다. 또 그런 태도만큼 파시즘에 바람직한 것도 없으리라.
'예술과 정치는 별개다'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대와 사상을 깊이 담지 못한 범용한 예술이라면 오히려 어떤 정치체제하에서도 편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그너의 예술이 빼어난 것은, 그것이 이 두 가지를 완벽할 정도로 융합해놓았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서 고민도 시작된다.-71쪽

나는 이전에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진정으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였던 한국의 민중신학이 지금은 김지하와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공유해 "일종의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시즘"에 전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재일조선인과 같은 '디아스포라 조선인'을 시야의 밖에 두는 대신 '디아스포라'와 과제를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자기중심주의의 함정을 피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고 썼다. (.....)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피억압 민족에 의한 해방과 자립을 위한 운동들이 언제 어디에서나 불가피하게 자기중심주의나 국수주의로 전락할 운명을 지닌다고 결론짓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한 냉소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생각은, 식민지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피억압 민족의 저항을 눈엣 가시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환영받을 것이다.-76쪽

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무비판적으로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는 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적 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닌 '저항'을 무력화하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77쪽

개인적으로 주요한과 이광수. 사실 그들의 사상을 좇다보면 묶일 수 없는 존재이지만 빈번히 묶이는 이 두 '민족주의자'들이 파시즘으로 회귀한 것. 김지하 시인이나 신비주의적 국수주의로 퇴행하는 이들. '파시즘'의 매력에 대해서 더 공부해 봐야한다. 이 문제는 풀면서, 1920~40년대와 1980~2000년대를 공부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