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제임슨을 읽는 어려움

책은 남들 못지 않게 사놓고 정작 재미를 못보고 있는 대표적인 두 저자가 내겐 프레드릭 제임슨과 아도르노이다(제임슨이 아도르노 연구서를 쓴 건 당연하면서도 짓궂다!). 그 중에서도 최악이라 할 만한 건 제임슨인데, 일단 여러 권의 저작들이 소개되었으면서도 정작 대표적인 주저들은 번역/소개되지가 않았고(이럴 때 쓰는 말이 '닭 쫓던 개 제임슨 쳐다보기'이다), 그나마 번역된 책들 읽기 어려우며(어떤 것들은 이제 구하기도 어렵다), 그걸 좀 덜어주겠다고 나온 해설서들 마찬가지로 난삽하기 짝이 없어서이다. 이때 '난삽함'이 비단 어려운 내용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역의 난잡함을 좀 에둘러 말했을 뿐이다.

 

 

 

 

이번에 '크리티컬 씽거즈' 시리즈로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앨피, 2007)과 함께 출간된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이 이 시리즈의 성격에 걸맞게 '가장 쉬운 제임슨 입문서'의 구실을 해주려나 은근히 기대를 가졌건만 어젯밤에 첫장인 '왜 제임슨인가?'를 읽고서 기대를 접었다(정말 묻고 싶다. 왜 제임슨인가?).

사실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도 기대에 부응하는 번역은 아니었다(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알라딘은 이 책명을 '자크데리다의 유령들'로 붙여놓아서 '데리다'로는 도서검색이 안된다. 업무량이 그토록 과다한가?). 원서와 비교해보면 앨피출판사의 국역본 시리즈는 편집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정작 '콘텐츠'가 뒤를 받쳐주지 못하는 형국이어서 안타깝다. 책은 껍데기가 아니잖은가. 공연한 험담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가령, "여러 차례 그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에게서 얻어낸 통찰, 즉 결정이 순간은 광기라는 진술을 상기한다."(42쪽)는 구절을 읽으면 당신은 무엇이 상기되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이거 송충이 씹는 맛 아닌가? 어쩌자고 덴마크의 '고독한 단독자'의 국적을 네덜란드로 바꿔놓는단 말인가?(나도 '어려운 오역'을 좀 지적하고 싶다.) 물론 우리가 축구 사랑의 인연으로 네덜란드에 더 친밀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역자와 편집자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를 아무생각 없이 접수할 수 있었단 말인가?(많이 쓰는 이름인 '키에르케고르'를 '키르케고로'로 표기하면서 '네덜란드 발음은 이게 더 가깝지'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듯 시작이 께름칙해놓으니까 이래저래 주의해서 읽을 도리밖에. 그래도 <자크 데리다>의 경우 1장에서 몇몇 의문스런 번역을 제외하면 2장부터는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내가 먼저 다뤄보기로 한 건 그 때문이다. 멀쩡하게 씌어진 역자 서문을 지나 '왜 제임슨인가?'의 몇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괜찮다. 제임슨의 두 화두인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두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과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 대해서 유익한 해설을 읽을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감마저 갖게 한다. 한데, 이러한 기대는 제임슨의 이력을 읽어나가는 대목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 제임슨은 하버대학에서 강사와 조교수로 재직했고, 이어 1967년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971-76년까지 불문학 및 비교문학 전공 교수로 일했으며, 1976-83년까지는 예일대학에서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때까지 듀크대학의 비교문학과 명예교수직도 겸했다."(29쪽)

사실 제임슨의 이력이 어떻다는 것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역자에 대한 신뢰이다. 우리말로도 말이 안되는 게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때까지... 겸했다."? '그때까지'는 언제를 말하는가?(1983년 이후는?) 1983년까지 예일대학과 듀크대학의 교수직을 겸했다고?(유렵대학의 명망있는 교수들이 미국대학에도 초빙교수로 양다리를 걸치는 경우들은 드물지 않지만, 같은 미국내에서도 그렇게 'two job'을 갖는다?) 

상식에 맞지 않는 내용은 대부분 오역이라고 보면 된다. 원문은 "SInce then he has been Distinguished Professor of Comparative Literature at Duke University."(3쪽)이다. "그 이후로 그는 듀크대학의 비교문학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서 '명예교수'는 정년퇴임 이후 봉직기간 등 해당대학에서 규정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교수에게 수여하는 명예직이다. 그리고 미국대학에서 'Distinguished Professor'는 내가 알기론 해당분야의 탁월한 업적을 이룬 교수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대우도 물론 좀 다를 거라고 예상되고). 그게 몇년 전부터 국내에 도입된 '석좌교수'직과 성격이 비슷할 거라고 본다(물론 영어에서 석좌교수를 가리키는 말은 따로 있지만).

원문 어디에도 '겸했다'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since then'을 '그때까지'라고 옮겨놓으니까 수습차원에서 '겸했다'란 말을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 사례이지만 내 독서경험에 비추어 앞으로 역자가 어떻게 번역해놓았을지 얼추 짐작하게 한다. 사실 본문 첫문장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마도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23쪽)에서 '아마도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에 인용부호와 인용출처가 빠져 있는 데에서도 번역의 충실성에 대한 의혹은 슬슬 기어나오기 시작했었다. 그러니 사단이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였을 따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들여다보기 전에 '제임슨을 읽는 어려움' 일반론에 대해서 먼저 정리를 해둔다. 이러한 국역본의 소제목들은 아마도 편집자가 붙인 듯하지만(32-43쪽까지에 해당하는 내용이 원서에는 'The Challenges of Jameson's Work'로 돼 있다) 내용에는 부합한다. "일반적으로 제임슨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앞서 말한 대로 그가 속한 비평적 맥락이 복잡하고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임슨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시적인 문체를 읽어 내려가야 하는 어려움이다."(32쪽)

'복잡하고 광범위한 비평적 맥락'으로 치자면 슬라보예 지젝 같은 경우 한술 더 뜨기 때문에 제임슨만의 두드러진 난점이라고 할 수는 없고 오히려 매력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시적인 문체'. "제임슨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한결같이 이해하기 너무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33쪽)니까 특별히 번역상의 문제만으로 우리가 곤란을 겪거나 분통을 터뜨리는 건 아니겠다. 반면에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  같은 경우에 "나는 종종 서가의 문학이론서 자리에서가 아니라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이 꽂힌 자리에서 그의 책을 뽑아든다."(33쪽)고 하니까 그의 문체(스타일)이 악평만을 얻고 있는 것도 아니고(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글턴의 활달하고 재기넘치는 문체를 더 좋아한다).  

물론 대세는 역시나 꼭 그렇게까지 문장을 꼬이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이다. "제임슨의 스타일을 피곤하고 번잡스러우며 어쭙잖다고 평가절하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더글러스 켈너는 제임슨의 스타일을 형편없다고 얘기했다."(33쪽) 켈너는 국내에 <탈현대의 사회이론>(현대미학사, 1995)부터 <미디어문화>(새물결, 2003)까지 여러 권의 저작이 소개돼 있는 좌파이론가이다(보드리야르와 마르쿠제 연구서가 유명하다).

한데, 형편없다'고 옮긴 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켈너가 쓴 단어는 'infamous'이며 사전적 정의대로, '악명 높은'이라고 해야 더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역본엔 이 말의 출처가 빠져 있지만, ('제임슨의 모든 것'이란 참고문헌 해제에 포함돼 있는 바대로) "제임슨의 다양한 논문을 실은 책" <포스트모더니즘/제임슨/비평>의 편자 서문에 나온다. 그 편자가 바로 켈너인 것. 따라서 "제임슨의 문체는 악명이 높다" 정도이지, "제임슨의 스타일은 형편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그의 난해한 문체가 시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잖은가!).  

왜 그럼 제임슨은 그렇게 쓰는가? 아도르노의 난해한 문체를 옹호하면서 제임슨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한데, "요컨대 독서는 어렵고 불편한 일이어야 한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 "독서가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닐 때,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한다."(35쪽) 그러니까 드러누워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차라리 안 읽는 게 낫다, 라는 게 제임슨의 글쓰기론이자 문체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