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자의 이름은 창비시선 269
최영숙 지음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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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감동적인 시집을 읽었다. 좋은 시, 기발한 시, 재미있는 시는 요즘도 꽤나 나왔고 나오고 있고 읽었다. '감동적'인 시는 오랜만이다. 2~3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한. 현대시를 전공하는 나로서도. 평범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삶에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언어는 참신한.

무엇보다 그 감동은 시인=화자의 연결점에 있고, 시인의 '유고시집'이라는 데에 있고, 시인이 불치병에 앓으면서 죽음을 앞에 두고 시를 꾸준히 써왔다는 데에 있다. 심장이 선천적으로 약한데다가, 루프스 병이라는 '자가면역질환'으로 면역체계 붕괴로 병마와 싸워가며 결국 진단 2년 후, 확장성 심근증으로 타계한 시인.

그녀의 유고 시집에는 타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세상과의 이별을 앞두고, 자신의 소멸을 앞두고 고요하고 투명해진 시선이 존재한다. 다음시를 보자.

비망록 2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누가 남겨놓았을까
정거장 옆 낡은 공중전화에는
통화는 할 수 있으나 반환되지 않는 돈
60원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어디로도 반환되지 않을 것이다
이 봄

긴 병 끝에 겨울은 가고
들판을 밀고 가는 황사바람을 따라
부음은 왔다 어느 하루
민들레 노란 꽃이
상장(喪章)처럼 피던 날 너는
어지러이 마지막 숨을 돌리고
나는 남아 이렇게 안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떠도는 홀씨 환한 손바닥으로
받아보려는 것이다

저 우연한 단돈 60원이
생의 비밀이라면
이미 써버린 지난 세월 속에서
무엇과 소통하고 무엇이 남아
앞으로 남은 시간을 견디게 할 것인가
산다는 것이 통화는 할 수 있으나
반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환되지 않는 것조차 남기고 간다는 것을

너는 알았을 것이다
나만 몰랐을 것이다 호주머니 속의 두 손처럼
세월이 가고 다시 이 자리에 섰을 때
무엇이 달라져 있을 것인가
나 또한 바람 속에 흩어져 있을 것이고
흩어진 자리에 민들레꽃 한두 송이
너를 기억할 것이다 안녕, 사랑아
 
 불치병을 앓고 있는 시인. 공중전화에 남겨진 돈 60원에서 인생을 본다. 누구와 '통화'할 수 있을 뿐 반환되지는 않으며, 반환되지 않는 것조차 남기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마침 그 날은 친구의 부음을 받은 날. 겨울동안 앓았던 시인은, 이제 봄이 되었는데, 노란 민들레가 피었는데 부음을 받아들고 민들레가 상장(喪章)처럼 피었다고 한다. 산다는 것은 통화라는 것. 그리고 매순간 동전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죽음도 그렇다는 것을. 시인은 '세월이 가고 다시 이 자리에 섰을 때' 달라진 것은 '나 또한 바람 속에 흩어져'있고 민들레꽃 한두 송이만이 '너를 기억할 것'이라고 한다. '안녕, 사랑아'.

시인은 대구지하철 참사를 이야기하면서 '신이 없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을 리 없다'(<응급실의 밤>)이라고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응급실에서 시인은 숨쉬기 힘든 고통 속에서, 자신의 고통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유사한 고통을 느꼈을 대구 지하철 참사를 떠올린다.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징후에 '20년 넘게 끌고 다닌 일기와 편지'(<일기를 태우다>)를 태우면서도 신파에 빠지지 않고 '손을 대보니 재에 따스한 기운이 남아 있다/앞산은 겨울인 듯 보이지만 봄이 온 것을 나무들은 안다'라고 조용히 읖조리며 '설명이 안되는 이 병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치명적인 너무나 치명적인>)

우리는 누구나 죽어가고 있다. 언제 죽을지는 모르고, 아마 '훗날'이라고 예정하고 있을 뿐. 누구나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은 없다. 사형수라 해도, 불치병 말기라고 해도, 정확히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고 이 날을 확정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도 시인처럼 내부에서 붕괴되게끔 필연적으로 설정된 타이머를 모두들 안고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자신의 자가면역질환으로 생을 정리하며, 자신의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주위에 고통에 눈을 돌린다. 그러기에 시를 써서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운 생명의 씨앗(<비망록 2>)과 동시에 말벌의 시체처럼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죽음 (<말벌의 시간>)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리라. 필멸자인 우리들은 '산다는 것이 통화는 할 수 있으나/반환되지 않는다는 것을,/반환되지 않는 것조차 남기고 간다는 것을'(<비망록 2>)의 깨달음을 음미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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