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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장학금을 목표로 학기 중의 과제와 발표에서부터 한 알 한 알 콩 줍듯이 학점을 관리해 왔는데, 어처구니없게 틀린 시험문제들이 나를 괴롭혔다. 공부란 한번 교과과정에 밀리기 시작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밀리지만, 머리에 쥐가 나더라도 고비를 넘어 밀고 가기 시작하면, 눈덩이를 굴리듯 쌓아가는 재미가 있다. 심지어 시험조차 적극적으로 자기를 측정하는 즐거운 시스템이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와 대학 이년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제야 공부가 제대로 몸에 붙는 느낌이었다. 공부를 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은 외로움과 자유의지, 그리고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하는 결핍이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그 힘을 잘 이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사람이란 관계 속에서 가장 사람답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누구나, 일년에 한 달쯤은 완전히 혼자 지내보는 것도 좋을 거야. 여행을 가라는 게 아니야. 자신의 일상을 그대로 하면서 가능한 지인을 만나지 않고 묵묵히 홀로 생활을 해 보는 거야. 자신의 원형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이곳과 자신을 만끽하면서.
엄마는 자신만의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얼마간 일러스트 작업도 하고,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고, 넉넉하진 않지만 꼭 쓰고 싶은 데에는 돈을 쓰고, 언제든 외출하고, 어디든 가며, 누구든 만났다. 무엇보다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사유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사치스러운 삶이 아닐까? 여자로 성장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웠고, 사랑도 한 뒤에 이제 한 인간으로서 독립적으로 자신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랑은 늘 있어. 너를 바라보는 이 순간에, 햇빛 속을 걸을 때나 비 오는 날 우산을 펼칠 때, 한밤중에 창문밖에 걸린 반달을 볼 때도,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할 때도, 차 한 잔을 마시거나, 홀로 먹을 밥을 끓일 때에도, 아침 일곱 시와 오후 두시와 밤 열한시에, 사랑은 늘 거기 있어.
미래를 생각하면, 때론 부풀어 오르는 과육 속에 박힌 애벌레처럼 시고 달콤한 세속적 소망에 사로잡히고 또 때론 내 소망의 철저한 세속성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난 시골이나 산으로 숨지도 않고 내 방에 틀어박히지도 않을 것이며, 공연히 세상 끝까지 가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난 이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다. 스와힐리어도 배우고 에스파냐어도 배우고 싶지만, 굳이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에 가고 싶지는 않다. 물론 갈 일이 생긴다면, 뒷걸음치지는 않을 것이다. 열두 개의 별자리를 골고루 친구로 사귀고 싶고 남자와 여자를 사랑하고 아이도 낳아 키우고 싶다. 커다란 개를 키우며 도시의 강변빌라에서 살고 싶고 커다란 감나무가 있는 시골집에 공작새를 풀어놓고 살아보고도 싶다. 싸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삶에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백가지 적과 늘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 나는 예수와 부처에 대한 경외와 연민을 느끼고 타인에 대한 자비심에 동감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여기 살아 있음을 기뻐하고 싶다.
엄마가 전에 말했잖아. 사랑은 어쩌면 달나라에 가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달나라에서 살 수는 없지만, 그곳에 찍은 발자국은 영원하다는 의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