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그가 한국을 여행한다면? 

수많은 리뷰들을 찬찬히 보면서, 역시 사람들 눈은 비슷하다는 생각과, 좋은 글은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마음을 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말장난, 화장실 농담, 성적 조크, 이것이 다였더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할 수 있을까? 특히 나를 비롯한 여성들이라면 말이다. 한바탕 웃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 공허함에 빠지게 되는 단순한 언어유희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면에 차고 넘치는 저자의 날카로운 사회 풍자와 역사에 대한 지식이 어우러져 한 편의 꽉 찬 저널리스트의 글을 읽은 느낌이다.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라는 부제는 원래 있는 건지 출판사에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붙인 건지 모르지만 한 문장으로 이 책을 참 잘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유럽에 대한 일반 사람들이 품고 있는 선망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 그 이면을 까발리는 데에만 집중했다면 읽는 이에게 불쾌감을 안겼을 테지만, 이 여행기 곳곳에서 사회에 대한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기에 책을 다 읽고 난 사람이라면 ‘의외로 훈훈’함을 느끼게 된다. 문장 하나하나가 정말 주옥(?)같기에 몇 개만 옮겨 적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든 궁금증 하나. 만약 빌 브라이슨이 한국을 여행한다면 어떤 글을 쓸까? 그의 여행 지역 목록에 한국이 꼭 포함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여행기가 그의 저서들 중 가장 신랄하면서도 따뜻했으면 좋겠다.




p.54

 런던에 있을 때 유럽 여행을 한 다음 책을 쓸 거라고 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시나 보군요.”

 “아니, 영어밖에 모르는데요.”

 내가 모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그것이 외국 여행의 묘미다. 나는 여행지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다.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것보다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이 어디 있을까. 여행자는 갑자기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간신히 눈치로 알 수 있을 뿐이며,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가 없다. 존재 자체가 연이은 추측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p.135

 네덜란드 인들은 영국인들과 매우 비슷하다. 모두 좀 칠칠맞지 못하다. 그러나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 차를 주차하는 법이나 쓰레기통을 배치하는 방법, 제일 가까운 나무나 난간 등에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던져놓는 모습까지 상당히 유사하다.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보는 강박적인 정리정돈은 찾아볼 수가 없다.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주택가에 주차된 차들도 자와 측량 기계를 이용해서 세워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차를 운하 주변에 아무렇게나 버려두는데, 물에 굴러 떨어지기 직전인 차들도 종종 눈에 띈다.

 이들은 영어 발음도 영국인처럼 해서 나는 당황하곤 한다. 「더 타임스」에서 일할 때 네덜란드 출신의 동료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에게 반 고흐를 ‘반 고’로 발음하는지, ‘반 고흐’로 발음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소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아니, 빈센트 반….”까지 발음하더니 갑자기 나방이라도 목에 걸린 듯이 가래 뱉어내는 소리를 낸다.

 <중략>

 나는 다른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도 이런 주문을 해보았다.(파티에서 만난 네덜란드 사람과 달리 할 말이 없을 때 심심풀이로 하기 좋은 장난이다.) 결과는 늘 똑같다. 모두 가래 뱉는 소리를 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얘기할 때는 가래 뱉는 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네덜란드 사람들의 발음이 영국인과 비슷하다고 했지만, 사실 어떤 지역의 영어와도 다르고 기묘하다.




p.159

 다이어트를 시작한 첫 주에 2kg 가량 체중이 줄어 매우 기뻤던 적이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속도로 가다가는 1년만 지나면 내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실된 몸무게를 다이어트 2주째에 다시 회복하게 되자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 다이어트라는 것도 실은 내가 고안한 '피자-아이스크림 다이어트'라는 특별 다이어트였다.) 그리고 전 세계에 기아가 찾아온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누워 기아로 죽어갈 때 나는 축적해 둔 지방 덕에, 어쩌면 테니스라도 치면서 여전히 건재할 것이라는 점에 큰 위안을 받는다.




p.321

 "그게 바로 오스트리아의 문제야."

 여행하는 내내 몇 번 입을 연 적이 없는 과묵한 토마스가 갑자기 열정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인데, 망할 오스트리아 놈들로 가득하거든."




p.383

 나는 흐르는 물을 보면서 변기에 앉아 여행이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생각했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 아닌가.




p.385

 나는 분명 여행의 끝에 와 있었다. 저 반대편이 아시아가 아닌가. 유럽에서 가장 멀리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고생만 하고 있는 내 아내는 한 해 걸러 아기를 가졌는데 지금도 임신 중이었다. 아내는 전화 통화에서 아이들 중 어린 두 녀석은 성인 남자만 보면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잔디는 허리까지 자랐고, 목장 울타리는 일부가 쓰러져가고 있었으며, 양들은 물가의 풀밭에, 소들은 옥수수 밭에 아무렇게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나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고, 내 집의 친숙함이 그리웠다. 매일 먹고 자는 일을 걱정하는 것도 지겨웠고, 기차와 버스도, 낯선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끊임없이 당황하고 길을 잃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없는 동행이 지겨웠다. 요즘 버스나 기차에 갇혀서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대는 내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가고픈 충동을 얼마나 많이 느꼈던가? 

 동시에, 나는 계속 여행을 하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다. 여행에는 계속 나아가고 싶게 만드는, 멈추고 싶지 않게 하는 타성이 있다. 해협 바로 저편에 아시아가 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저기가 아시아 대륙이라고 생각하자 경이로웠다. 몇 분이면 아시아 땅을 밟을 수 있다. 돈도 아직 남았다. 그리고 내가 가보지 못한 대륙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 대신에 콜라를 한 잔 더 주문하고, 오가는 페리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아시아에 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행이란 어차피 집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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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일 선현경의 신혼여행기 2
선현경, 이우일 지음 / 황금나침반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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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렇게 살 수도 있을까

 

결혼은 언제 할까?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게 내가 받은 프러포즈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프러포즈는 늘 근사하던데, 역시 내 삶은 좀 코미디 같은 데가 있는 모양이다. 언제나 중요한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다. 아무튼 우린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시 남편은 취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몹쓸 병에 걸려 있었다. 그는 술에도 취해 있었고, 사회에도 취해 있었다. 그럭저럭 돈 벌고, 그럭저럭 쓰며, 그럭저럭 사는 데 취해 있었던 것이다.

잠시도 아니고 몇 달이 될지도 모르는 기간을 비우고 나면 분명 일감이 떨어질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의 빈자리는 금방 메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겠다고 했다. 당장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문제라며, 이렇게 취해서 사는 인생을 청산해 보겠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다녀와서 당장 어떻게 먹고살 건지에 대해서는 조금은 걱정되는 게 사실이었다. 돌아와서 둘 다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면 어떻게 밥을 먹고 사느냔 말이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 무슨 부귀와 영화를 누리겠다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며 아등바등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좀 길긴 하지만 미래를 위해 일단 떠나보기로 했다. ‘뭐 인생이 장난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인생은 장난이다. 재미있게 살려면 물불 안 가리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게 인생이다. 난, 아니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책갈피에 적혀 있는 선현경의 이 말이 책 전체를 대표한다. 남들은 보기에 장난이지만 본인들은 삶 자체에 충실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죽어라 공부하고 일하는 일들 모두가 인생의 ‘재미’를 위해서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부부야말로 가장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을 인생에, 혹은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이제 식상할 정도인 표현이 되어버렸다. 입학을 앞둔 예비 대학생들의 이른바 ‘머스트 두 리스트’이자 ‘위시 리스트’에는 재학 중 배낭여행이 빠지지 않는다. 한비야의 오지 여행, 김남희의 여자 도보 걷기 여행, 이 외에도 도쿄 카페 여행, 유럽 치즈 여행, 미국 캠핑카 여행, 각종 여행, 여행, 여행이 끊이지 않는다. 이제 여행서도 지역별, 주제별로 세분화되었고, 여행자들의 여행 목적도 다양하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신혼여행을, 평생에 단 한번(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한번이어야 할)인 이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 있는 간 큰 부부가 있을까?

내가 읽은 이 책은 10년 만에 복간되었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대해 귀를 쫑긋하게 된 지 이제 얼마 안 되는 내가 무려 고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 때, 신혼집 얻을 돈으로 303일 동안 유럽 전역을 누빈 남녀가 있었다는 것이다. 10년 만에 복간되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일은 아무나 못 벌린다는 것이다. 오직 이 부부만 할 수 있었기에 10년 전 여행기가 다시 나왔겠지. 몇 달만 지나도 새로운 정보가 업그레이드 되어 구식 취급 받는 것이 여행서 아닌가.

이 책으로는 최첨단 여행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여행서의 특징인 총천연의 이국적인 사진도 단 한 장 없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책을 집어든 다른 독자들도 이런 것들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신혼 부부 중 ‘아내’의 시각으로 본 ‘남편’과 ‘결혼’, 그리고 ‘세상’이다.

여행사에서 아무 문제없다고 장담하던 항공권이 말썽이 되어 신혼 첫날밤을 공항에서 지내게 된 웃지 못 할 사연, 여기서도 선현경은 인생이란 때로는 타인의 실수까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넉넉함이 자신 못지 않게 괴짜스러운(?) 남편과 별탈 없이 303일 동안 여행을 해 오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 두 부부는 크게 싸우는 일이 없다. 태평함과 유머스러움을 놓고 보면 참 천생연분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는, 과연 이렇게 나와 딱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부러움이 함께 든다.

학생 시절 혼자 온 유럽의 한 여행지에서, 선현경은 ‘무슨 바람이 들었던지’ 지금의 남편에게 헤어지자는 엽서를 보냈다고 한다. 대학생 배낭여행을 다녀온 한 사람으로서 나도 그 ‘바람’에 공감하는 면이 있었다. 바로 그 장소를 그 사람과 함께 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만약 나도 결혼한 후 처녀 시절에 갔던 그 장소를 지나친다면 그 당시 떠올렸던 사람을 떠올리게 될까. 어떤 기분일까.

선현경의 다른 책들, 특히 ‘가족 관찰기’를 읽어보고 싶다. 완전한 유부녀가 된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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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일 선현경의 신혼여행기 1
선현경, 이우일 지음 / 황금나침반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이렇게 살 수도 있을까

 

결혼은 언제 할까?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게 내가 받은 프러포즈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프러포즈는 늘 근사하던데, 역시 내 삶은 좀 코미디 같은 데가 있는 모양이다. 언제나 중요한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다. 아무튼 우린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시 남편은 취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몹쓸 병에 걸려 있었다. 그는 술에도 취해 있었고, 사회에도 취해 있었다. 그럭저럭 돈 벌고, 그럭저럭 쓰며, 그럭저럭 사는 데 취해 있었던 것이다.

잠시도 아니고 몇 달이 될지도 모르는 기간을 비우고 나면 분명 일감이 떨어질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의 빈자리는 금방 메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겠다고 했다. 당장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문제라며, 이렇게 취해서 사는 인생을 청산해 보겠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다녀와서 당장 어떻게 먹고살 건지에 대해서는 조금은 걱정되는 게 사실이었다. 돌아와서 둘 다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면 어떻게 밥을 먹고 사느냔 말이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 무슨 부귀와 영화를 누리겠다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며 아등바등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좀 길긴 하지만 미래를 위해 일단 떠나보기로 했다. ‘뭐 인생이 장난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인생은 장난이다. 재미있게 살려면 물불 안 가리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게 인생이다. 난, 아니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책갈피에 적혀 있는 선현경의 이 말이 책 전체를 대표한다. 남들은 보기에 장난이지만 본인들은 삶 자체에 충실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죽어라 공부하고 일하는 일들 모두가 인생의 ‘재미’를 위해서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부부야말로 가장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을 인생에, 혹은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이제 식상할 정도인 표현이 되어버렸다. 입학을 앞둔 예비 대학생들의 이른바 ‘머스트 두 리스트’이자 ‘위시 리스트’에는 재학 중 배낭여행이 빠지지 않는다. 한비야의 오지 여행, 김남희의 여자 도보 걷기 여행, 이 외에도 도쿄 카페 여행, 유럽 치즈 여행, 미국 캠핑카 여행, 각종 여행, 여행, 여행이 끊이지 않는다. 이제 여행서도 지역별, 주제별로 세분화되었고, 여행자들의 여행 목적도 다양하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신혼여행을, 평생에 단 한번(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한번이어야 할)인 이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 있는 간 큰 부부가 있을까?

내가 읽은 이 책은 10년 만에 복간되었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대해 귀를 쫑긋하게 된 지 이제 얼마 안 되는 내가 무려 고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 때, 신혼집 얻을 돈으로 303일 동안 유럽 전역을 누빈 남녀가 있었다는 것이다. 10년 만에 복간되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일은 아무나 못 벌린다는 것이다. 오직 이 부부만 할 수 있었기에 10년 전 여행기가 다시 나왔겠지. 몇 달만 지나도 새로운 정보가 업그레이드 되어 구식 취급 받는 것이 여행서 아닌가.

이 책으로는 최첨단 여행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여행서의 특징인 총천연의 이국적인 사진도 단 한 장 없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책을 집어든 다른 독자들도 이런 것들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신혼 부부 중 ‘아내’의 시각으로 본 ‘남편’과 ‘결혼’, 그리고 ‘세상’이다.

여행사에서 아무 문제없다고 장담하던 항공권이 말썽이 되어 신혼 첫날밤을 공항에서 지내게 된 웃지 못 할 사연, 여기서도 선현경은 인생이란 때로는 타인의 실수까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넉넉함이 자신 못지 않게 괴짜스러운(?) 남편과 별탈 없이 303일 동안 여행을 해 오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 두 부부는 크게 싸우는 일이 없다. 태평함과 유머스러움을 놓고 보면 참 천생연분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는, 과연 이렇게 나와 딱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부러움이 함께 든다.

학생 시절 혼자 온 유럽의 한 여행지에서, 선현경은 ‘무슨 바람이 들었던지’ 지금의 남편에게 헤어지자는 엽서를 보냈다고 한다. 대학생 배낭여행을 다녀온 한 사람으로서 나도 그 ‘바람’에 공감하는 면이 있었다. 바로 그 장소를 그 사람과 함께 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만약 나도 결혼한 후 처녀 시절에 갔던 그 장소를 지나친다면 그 당시 떠올렸던 사람을 떠올리게 될까. 어떤 기분일까.

선현경의 다른 책들, 특히 ‘가족 관찰기’를 읽어보고 싶다. 완전한 유부녀가 된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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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그레이프
피터 헤지스 지음, 강수정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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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영어 회화 시간에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끝까지 다 보지도 못했고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을 잡아끌만한 박진감 넘치는 장면도 없었던 이 영화는 한 친구가 아니면 아마 내 기억에서 잊혀졌을 것이다. 

조니 뎁을 무척 좋아하는 그 친구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라면 입이 마르게 칭찬했고, 그 때문인지 영화 보는 내내 긴 머리의 조니 뎁과, 타이타닉을 통해 좋아하게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저능아 연기와, 이름은 모르지만 짧은 머리의 귀여운 캠핑족 아가씨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던 거대한 어머니와, 예쁘고 늘씬했던 여동생은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다른 영화들을 통해 이후에 조니 뎁의 팬이 되고 난 후, 그의 예전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 보던 중에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영화가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원제는 What's Eating Gilbert Grape 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먹고 있는가, 라는 제목은 책 전체와 참 잘 어울린다. 스물 넷, 한참 꿈을 가지고 키워나갈 나이에 가족 때문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는 길버트는 정말 누군가에게 먹힌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조니 뎁도 전형적인 할리우드 배우는 아니지만 극 중 길버트도 일반적인 미국 청년 같지는 않다. 가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훨씬 비슷하다. 

비록 절반도 보지 못했지만 인상적이었던 영화의 장면, 넘치는 좋은 평들에 불구하고도 별을 짜게 준 것은 답답함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길버트가 집을 불태우고, 베키를 만나 아픔을 극복해나가고, 가족들도 약간의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그런데 그게 뭐 어쨌냐는 것이다. 책 뒤 작가의 후기를 보니 17살 짜리 대학생이 감명 받았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내 나이가 그 즈음이었다면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때도 그 나이였다. 하지만 지금 내 나이는 길버트의 나이와 비슷하다. 단순히 마음가짐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 비록 눈 가리고 아웅식의 희망이더라도 두 세 시간의 독서 끝에 얻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인데, 이 책의 결말만으로는 그것을 꿈꾸기 어렵다. 여전히 어니는 길버트의 희생을 필요로 할 것이고, 다른 그레이프들은 제각기 갈 길 갈 것이다. 베키와는? 아마도 헤어지겠지. 극 중 베키는 열 다섯 소녀에 불과하니 나이가 한살 한살 먹어갈 수록 세상과 타협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세상이 워낙 팍팍하고 내가 고민이 많아서인지 어떻게든지 밝은 빛을 찾고 싶은 게 요즘 내 마음인가 보다. 불확실한 미래가 10대의 나에게는 막연한 동경이었지만 요즘은 빨리 끝내고 싶은 현실이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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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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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쿠삭 주연의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원작 소설이라고 한다. 이것은 책을 다 보고 다른 사람들의 느낌은 어떤지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평이 상당히 좋아서 언젠가는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감명깊게 봤던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작가 닉 혼비가 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소년"에 불과한 남자 주인공의 성장기, 그 과정에서 사람들, 특히 여인들에 의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간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많이 닮아 있다. "어바웃 어 보이"의 주인공은 유명한 작곡가를 아버지로 두어서 그 저작권료로 살아간다는 점이나, "하이 피델리티"의 주인공은 음반 가게를 운영한다는 점 등 두 작품 사이의 세세한 연결고리도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저자 닉 혼비의 분신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른 이에게는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글쎄, 그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은 소설이었다. "어바웃 어 보이"를 이미 접해서인지 다소 어린아이같은 면이 있는 남주인공이 두번째에도 크게 매력적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영화에서의 휴 그랜트는 이기적이어도 자기 밖에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한 면이 있어서 귀여웠는데. 만약 원작 소설이 이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영화가 소설을 효과적으로 풀어내었을 것이다. 아니면 휴 그랜트의 연기력이 그만큼 뛰었났겠지. 아마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도 비슷할 것 같다. 한글 영화 제목을 참 잘 붙였다는 느낌이 드는데, 원제에 비해 더 세련되고도 많은 것을 함축했을 듯한 느낌이 든다. 존 쿠삭의 연기도 좋을 것 같고. 한번 영화를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책 때문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영화 "어바웃 어 보이"를 보고 난 만족감 때문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로 아쉬운데, 원본을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번역에 아쉬움이 느껴진다. ()가 남발되어서 그런지 느낌상 물 흐르듯이 이어지지 않고 중간 중간 끊어지는 느낌이 강했는데 비록 원본에 조금 어긋난다 하더라도 융통성있게 번역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뜩이나 생소한 브릿 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밑의 주석과 비교하면서 읽느라 전체 내용을 쫒아가기도 급급했다. 아마도 그 노래들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끼는데 그쳐야만 했다. 하다못해 소설에서 언급된 장소를 사진으로 실어 놓거나 소개된 가수나 음반들을 뒤에 별도 주석을 달아 좀 더 상세히 언급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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