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살인 - 죽여야 사는 변호사
카르스텐 두세 지음, 박제헌 옮김 / 세계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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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재미있었다. 완전히 취향 저격을 당해 이 작가 책은 다 읽고 싶은 마음이다. 다음과 같은 독자들께 자신 있게 추천한다. 앞뒤가 딱 맞으면서 빠르고 허를 찌르는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분, 사회 풍자와 지적인 블랙유머를 즐기는 분, 명상에 과연 실제적인 쓸모가 있는지 의심하는 분, 결혼 생활에 위기를 맞은 분, 꼰대 상사와 진상 고객에게 시달리는 분, 수류탄을 좋아하는 분.”장강명 소설가

 

이 소설을 추천하는 소설가의 글에서 '꼰대 상사와 진상 고객에게 시달리는 분' 이라는 구절에 내 나름의 설명을 좀 더 붙이고 싶다.

악성 민원인을 상대해야 하는 공무원, 기업의 고객센터의 전화상담원, 대면 업무를 하고 있는 은행원, 대학의 시간강사, 객실 승무원,

이 외에 미처 내가 추가하지 못한 어떤 직업이라도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완전히 누르는 것이 업무상 가장 중요한 태도이자 미덕에 해당되는 분들.

 

이 책을 읽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책을 읽는 순간은 통쾌하더라도, 덮으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처럼 자신의 의뢰인이나 고객을 죽여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잠깐 점프해서 붕 떴을 때의 기분. 바로 직후에 땅에 착지하더라도 순간이나마 두둥실 뜨는 기분. 그 기분을 확실하게 선물해주는 책이다.

 

 

p 28

드라간은 내가 감당할 첫 업무 과제가 되었다. 그의 기업 포트폴리오를 현대화시키고, 그 활동을 검찰의 감시방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드라간의 주요 수입원은 여전히 마약, 무기, 매춘업이었지만 그 사업을 수많은 운송 회사와 프랜차이즈 업체로 위장했다. 내가 드라간에게서 지분을 취득한 사업체들이기도 했다. 더불어 EU 보조금을 어떻게 착복하여 불가리아에 있지도 않은 가지 농장에 투자하는지 보여줬다. 마약 거래와 비슷한 수준으로 질 나쁜 온실가스 배출과 관련해서 서류 조작 방식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두 가지 분야 모두 정부 지원금을 받아냈다. 나의 조력에 힘입어 드라간은 몇 년 만에 대중적 이미지를 잔인한 딜러, 포주에서 존경받는 사업가로 바꾸었다.

 

 

이 구절을 보면 드라간이라는 고객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이다. 마치 대부의 말론 브란도나 알 파치노 같은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인데, 거기에서 인간성과 지성을 전부 빼 버린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대부에게도 변호사는 있었지만 로버트 듀발과 이 책의 주인공의 업무 환경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의 사명감은 버린 지 오래, 일에 치이다 보니 가정은 흔들리기 직전. 인생의 위기 앞에 명상 수업을 듣게 되는데, 이게 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다음은 이 책의 목차이다.

 

명상

자유

호흡

시간의 섬

디지털 다이어트

상대방의 내면세계

평가 없이 받아들이기

긴장을 완화하는 3화음

싱글태스킹

행복

깨어나기

의도적으로 초점 맞추기

친절

공포

객관

조바심

불안

파렴치

시간의 압박

음미하며 식사하기

패닉

불쾌

행동주의

소통

용서

내면의 저항

브레인스토밍

주고받기

증명하기

위임

고마움

질투

거짓

속으로 미소 짓기

고통

최소화

죽음

 

목차만 훑어 보면 이 소설의 목차이기 이전에, 명상 교습서의 목차라고 봐도 될 것이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살인이 어떻게 명상의 기법과 연결되는지 보면 기발하다. 처음에는 목차 몇 개 정도 그러고 말겠거니 했는데, 절묘하게도 책을 다 읽으면 실제의 예시가 수록된 명상 교습서를 읽은 느낌이니 묘하다.

 

 

p 258

누군가 모든 아이가 훌륭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내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이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그 밖에 다행히 호감이 가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완전히 골칫거리인 아이들이 있다. 이런 아이들은 불쾌하고 호감 가지 않는 부모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골칫거리 아이는 외양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그들은 공격적이고 지루하고 퉁명스러우며 사람을 몹시 피곤하게 만든다. 공원 놀이터에서도 이런 아이들은 울음소리고 아주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나와 젊은 커플 한 쌍 그리고 혼자 온 남자 외에는 모두 여자들만 놀이터에 있었다. 젊은 커플은 ', 우리 정도면 행복한 커플이지' 하는 게 두드러지게 보이는 자들이었다. 멋진 옷을 차려입고, 건장하고 성공한 듯 보였다. 분명히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보살핌 속에 유복하게 자랐을 것이다. 그 부모는 이제 자신의 시간 중 70퍼센트를 손주 돌보는 데 쓸 것이다.

홀로 있는 남자는 약간 울적해 보이고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불편해하는 걸 보아 아마도 어린이 놀이터에 와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혼남일 수도 있다. 양육권을 빼앗긴 채 자신의 아이와 놀아주는 모습을 억지로 얼마간 연출해야 하는 아빠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제하고 나니 두 가지 유형의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엄마들과 보모들이다.

엄마들은 과도하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행복한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반면에 보모들은 자신의 행복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무신경하게 세 살 이하의 아이들을 대형 유모차에 태워 많게는 다섯 명까지 돌보고 있었다.

보모 한 명이 돌볼 수 있는 아이는 최대 다섯 명이다. 만약 다섯 명의 아이 중 골칫거리가 하나라도 있으면 다른 네 명의 아이는 사실상 방치된다. 다른 아이를 물고 때리거나 할퀴는 거을 막기 위해 온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저 울며 떼쓰는 걸 말리느라 다른 아이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이렇게 놀이터를 관찰하며 생각에 잠기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에밀리와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기보다 주변의 엄마, 보모 그리고 아이들로 인해 불쾌해하고 있었다.

놀이터에 온 지 3분 만에 내 기분은 ', 정말 좋다!' 에서 '다들 멍청이군!' 으로 돌변했다. 외부 환경은 어떤 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말이다.

명상 책에는 불쾌감에 대한 구절도 있었다.

 

불쾌감은 장기간 지속된 실망의 표현이다. 실망의 원인은 외부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내 안에 얼마나 머무를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과거의 실망감이 당신의 삶의 질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하려면 다음 질문을 던져보라.

 

1. 실망감이 어떻게 생겨났나?

2. 그 실망의 근원으로 인해 현재까지 불쾌함을 느낄 만큼 신경을 쏟을 가치가 있는가?

3. 행복이 어떤 구체적인 것에 달려 있지 않다고 확신하면 어떤 느낌일까?

 

나는 어린이 놀이터에 앉아 무엇에 그리도 불쾌해하고 실망한 걸까? 답은 간단했다. 나는 그곳에 있는 모든 여성과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한낮에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놀러 나온 것 자체가 내겐 살면서 처음이었다.

나는 지난 2년 반 동안 내 아이를 돌보는 일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 기간에 피곤할 정도로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일하느라 평일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미뤄두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나 자신에게 엄청나게 실망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화가 났다. 2년 반의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놀이터에 있는 엄마나 아이들 중에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나에게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런 불쾌감에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현재 내 인생은 완전히 변했다. 내 행복은 바로 이 순간 만들어가는 거다.

자리에서 일어나 에밀리에게 다가가 아이를 안았다가 공중에 띄웠다. 나의 행복이 다시 양손에 잡혔다.

불행해 보이는 아빠와 젊은 커플과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고 싶었다. 그 순간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샤였다. 발터의 경호원이 날 미행하던 자를 방금 무장해제시켰다고 알려왔다. 그자는 나를 집에서부터 따라붙어 카타리나의 거주지를 거쳐 놀이터까지 미행했다. 경호 인력은 젊은 커플로 위장하고 재빨리 그자를 저지했다. 그때 남자는 한 손에 라테 마키아토를 들고 통화를 하려고 나무 뒤에 숨은 참이었다. 게다가 그는 다른 손에 권총을 들고 주머니엔 프랑스제 수류탄 두 개를 소지한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결박된 채로 트렁크 속에 갇혔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행운의 젊은 커플과 우울한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조용히 내가 인사 담당자가 아니라 변호사가 된 것을 기뻐했다. 나는 명백히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어쩌면 보모 셋을 살인 청부업자 취급하며 겁을 집어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젊은 커플이 부모의 등골이나 빼먹는 사람이 아닌 나의 수호천사였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깨달음, 통찰을 이렇게나 절묘하게 표현하다니!

 

 

p 357

나는 어제 숲속에서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동안 뮐러를 어떻게 이용할 지 생각했다. 그래야 토니를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할 수 있다. 나는 뮐러를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우리 편으로 만들어 활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명상을 매개로 해서 부패한 경찰이 내 말을 듣도록 만들까? 이 경우 그 자의 처지가 되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경찰은 공무원이다. 기본적으로 공무원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합리적인 인간은 비합리적인 자보다 조종하기 어렵다. 먼저 뮐러의 합리성을 무너뜨려야 한다.

명상은 물론 애초에 그 반대의 개념을 갖고 있다. 명상으로 비이성적인 감정을 극복해야 한다. 명상의 미학은, 그것이 가장 격렬하고 폭발적인 감정의 분출도 완화시킬 수 있는 평화로운 길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다행히 이 길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감정은 폭탄처럼 제거가 가능하다. 명상 실천과 폭탄 제거의 근본적 차이는 폭탄을 제거하는 사람이 작업 중에 사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명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시도한 명상이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 내일은 성공한다.

폭탄을 해체하는 사람이 오늘 운이 없으면, 그에게 내일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폭탄을 해체하는 사람이 폭탄의 구조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곧 그가 해체시킨 폭탄을 다시 작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명상에도 적용된다. 명상으로 마음의 평화를 형성할 수 있는 것처럼 이성적인 사람을 비합리적이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상대를 일부러 감정적인 상태로 몰아넣어 이성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뮐러에게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실혼 관계에 있는 동거녀, 바사가 있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으며 뮐러보다 열 살 아래였다. 폴란드 출신으로, 연금 청구권이 있는 공무원의 특권을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바샤의 매력적인 외모는 뮐러에게 신분의 상징만은 아니었다.

 

 

추천하는 글에 있던 사회 풍자와 지적인 블랙 유머, 바로 이런 것이다.

 

 

p 365

죽을 고비에 있는 사람에게나 보인다는 일생의 기록이 뮐러의 눈앞에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이 순간 그의 내면의 눈은 남은 삶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보고 있었다. 그건 공포영화였다. 뮐러는 급격한 감정 변화를 겪는 중이었다. (젠장, 애인이 날 배신했어...... 야호, 여자 친구는 날 배신하지 않았군...... 빌어먹을, 여자 친구가 날 배신하진 않았어도 날 떠나버리겠는걸...... 잠깐...... 내가 백수가 된다고?) 그는 샤샤의 제안에 어떤 저항도 내비치지 않았다.

뮐러는 마지막으로 경찰 측 정보를 토니에게 넘길 것이다. 완전히 허위 정보겠지만. 그리고 토니의 소식을 다시는 듣지 않을 것이며 호텔 침대에 누워 있던 커플도 다시 만날 일은 없다. 또한 호텔 스위트룸에 침입한 영상도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다.

그는 바샤와 결혼하여 은퇴할 때까지 행복한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이나 은퇴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상상만으로 꽤 아름다운 그림이 아닌가. 그리고 협박만으로는 이 일에 협력할 만한 동기가 충분치 않다. 거짓도 좀 섞여줘야 효과가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내용을 소개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자제하고... 현지에서는 명상 살인 3권까지 나왔다고 하고 우리 나라에는 2권까지 번역되었다. 평을 살펴보면 2편이 1편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 같다. 그래도 1편은 2편을 읽을 이유가 되기에 충분한 것 같다. 3편은 2편을 읽고 나서 결정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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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외국어 - 모든 나라에는 철수와 영희가 있다 아무튼 시리즈 12
조지영 지음 / 위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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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너무 되어서 마음이 아플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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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레드메인즈 동서 미스터리 북스 32
이든 필포츠 지음, 오정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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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레드메인즈의 표지는 온통 빨간색인데, 빨간 머리가 아니라 붉은 천 일부가 날카롭게 찢어져 있고, 그 틈 사이로 사람의 코만 살짝 보이는데 천도 코도 다소 붉은 빛이다.

 

이 표지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목하고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한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코만 살짝 보이고 정체를 꽁꼼 숨긴 누군가가, 마치 바람이 불어서 커튼만 살짝 들춰지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구인지 아직은 전혀 모르겠는 사람이 몸을 감춘 상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엿들으며 실수 한 번 저지르지 않고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느낌.

 

 

이 책을 읽어가면서 누가 범인인지는 사실 금방 눈치를 챘다. 아마 나중에 등장한 피터 건즈도 빠른 시일 내에 알았을 것이다.

 

책을 점점 읽어가면서 이렇게 눈에 보이는데(얼마나 눈에 보이냐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주요 인물의 대화를 생략하는 부분이 있다. 이 책 기준으로 315쪽에 나온다. <건즈가 다시 코담배를 집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수사의 과정으로 말해서 당연히 이 사악한 범죄의 클라이맥스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 다 말해 버리면 오히려 그 올바른 의의를 보여 줄 수 없게 된다. 다만 얼른 듣기에 상식 밖으로 여겨지는 그의 설명이 브랜던의 머리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수사하고 범인 잡는 게 직업인 사람이 이렇게까지, 이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예전에 읽었더라면 현실성이 없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최근 일반인이 합숙하며 짝을 찾는 예능을 몇 편 보면서 이런 일이 실제로도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멀쩡한 사람들이 왜 저 상황에서 감정 조절을 못하고 저런 어이없는 말을 하고 저런 잘못된 판단을 하고 저런 황당한 실수를 하지? 이게 전지적 시점에서 지켜보는 시청자의 생각이지만, 실제 그 상황에서는 충분히 자연스럽고도 가능한 일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큰 주제도 그렇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피터 건즈, 그리고 마크 브랜던의 또 다른 이야기가 너무 궁금한데, 작가는 추가적인 이야기는 쓰지 않은 것 같다. 은퇴한 전설적인 명탐정의 화려한 과거도, 새로운 길을 가게 되는 유능한 형사의 빛나는 미래도, 더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소설 자체로 놓고 봤을 떄 아쉬운 점은 시점이 정돈되지 않은 점이었다. 사실상 마크 브랜던의 속마음을 그대로 노출하는 1인칭 시점이었다가, 갑자기 후반부에서 한동안 브랜던이 사라지고 사실상 피터 건즈의 1인칭 시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은 실제 작가의 서술이 그랬던 건지 번역 떄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추어 작가처럼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작가가 누구의 입장에 있는 것인지 이렇게 우왕좌왕하다니.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노출할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전지적 작가의 시점은 택할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일관성 있게 어느 한 사람의 입장에서 가야 하지 않았나 싶다.

 

 

 

작가 이든 필포츠는 놀랍게도 크리스티랑 관련이 있다. 습작 시절 크리스티의 옆집에 유명한 소설가가 살았는데, 크리스티의 어머니가 딸의 작품을 그에게 보여주며 그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작가가 바로 이든 필포츠, 빨강머리 레드메인즈의 작가이다. 크리스티는 훗날 엔드하우스의 비극이라는 소설을 그에게 헌정했다고 하는데, 아마 늘 고마움을 기억했던 것 같다.

 

 

p. 241

 

"'악한 인간들'을 상대로 평생을 보내는 우리들이니, 저는 이따금 이런 내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통조림을 판다거나, 속옷 장사를 한다든가 하면서 살고 싶을 때도 있구요. 군인이나 선원이라도 좋았을 것입니다. 평생의 과업이 같은 인간의 악을 대상으로 하다니, 이런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직업이 활이나 화살처럼 과거의 유물이 되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연상의 사나이는 웃었다.

 

"괴테가 어디선가 이런 말을 했었소. '백만 년을 살아 봐야 고생거리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또 그것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엷어지지도 않는다'고 말이오. 몽테뉴의 말에도-몽테뉴는 읽어 둬야 하오, 인류가 낳은 가장 현명한 인물이니까 말이오-이 사람도 말하고 있소. '인간의 지혜가 그 자신이 규정한 이상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가령 도달했다 하더라도 다시 또 그것을 넘은 이상을 가리킬 테니까.' 결국 인류가 존속하는 한, 악인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도 되오. 그래서 그들을 잡으러 다닐 사람을 훈련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 거요. 범죄는 이 세상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지 계속될 것이고, 범죄자가 영리해지면 영리해질수록 우리도 더 영리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저는 인간을 좀더 나은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마크의 말에 나이든 친구는 감탄해 보였다.

 

"훌륭한 생각이오. 당신 나이로서는."

 

 

p. 369

 

"그리고 이것만은 꼭 말해 두고 싶소만, 나는 당신을 나무랄 생각은 조금도 없소. 때로는 그 그리운 벗의 짙은 우정을 생각하긴 하오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내가 책망하는 것은 나 자신이오. 마지막에 가서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만 것은 나이지, 당신의 실책이 아니었소. 그 일을 맡긴 내가 바보였던 거요. 그건 아무 변명도 소용없소. 그 때의 당신은 그 일을 맡을 만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거든. 마땅히 그걸 생각했어야 했던 거요. 당신이 실수하고 또 마이클 펜딘이 실수한 것은, 우리들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오. 악인은 그 악행에 상처가 나고, 선인은 그 순백한 경력에 먹칠을 하게 되고. 생각이 깊은 두뇌라도 별안간 고갈하는 수가 있는 법이오. 그 이유는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선과 악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완벽한 것은 거부되고 있기 떄문인데, 그 점 성자나 죄인이나 다 똑같다고 볼 수 밖에 없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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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직원의 태평천하 - 퇴근을 꿈꾸는 직장인을 위하여
윤선영 지음 / 시드페이퍼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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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프다는 말을 책 한 권으로 뽑아낸다면 바로 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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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 동서 미스터리 북스 3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이가형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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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동서미스터리북스를 30권까지 차례차례 읽어왔는데 잠깐 정리를 해 보았다.

 

에드거 앨런 포우-황금벌레

아서 코난 도일-셜록 홈즈의 모험

애거서 크리스티-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엘러리 퀸-Y의 비극

G. K. 체스터튼-브라운 신부의 동심

F. W. 크로프츠-

도로시 L. 세이어즈-나인 테일러스

윌리엄 월키 콜린스-월장석

윌리엄 아이리시-환상의 여자

S. S. 밴 다인-비숍 살인사건

대실 해밋-말타의 매

애거서 크리스티-애크로이드 살인사건

P. D. 제임스-검은 탑

엘러리 퀸-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아서 코난 도일-주홍색 연구

S. S. 밴 다인-그린살인사건

조르주 심농-사나이의 목

딕 프랜시스-흥분

존 딕슨 카-화형법정

레이먼드 챈들러-굿바이 마이 러브

애거서 크리스티-미스 마플 13 수수께끼

아서 코난 도일-바스커빌의 개

페르 발뢰, 마이 셰발-웃는 경관

렉스 스타우트-요리장이 너무 많다

앨프레드 메이슨-독화살의 집

대프니 듀 모리에-레베카

개빈 라이얼-심야 플러스1

엘러리 퀸-재앙의 거리

레니 에어드-아기는 프로페셔널

애거서 그리스티-예고살인

 

2회 이상 등장한 작가를 정리하면 아서 코난 도일이 3, 애거서 크리스티가 4, 엘러리 퀸이 3, S. S. 밴 다인이 2회 이다.

31권째가 되어서야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등장하는데, 그 위상을 생각하면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이렇게 편집하였는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범죄자인 주인공을 빨리 등장시키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뤼팽이 매력적인 캐릭터이고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있기는 하지만 일정 부분 주인공과 감정이나 입장을 일치시켜 가며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범죄자와 같은 편에 선다는 것이 마음 한 구석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주인공에게 완전히 동화되기에는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미 몇 년 전 까치출판사에서 나온 아르센 뤼팽 전집으로 읽었다. 그때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서 세계 최초로 아르센 뤼팽 전집을 완간하기까지 성귀수 번역가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소개가 되었다. 그 과정에 대해서도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책 자체만 놓고 보면 당연히 성귀수 번역의 까치출판사가 월등하지만, 제목에 있어서만큼은 원제 그대로 그냥 813이 더 나았을 것 같다. 비밀을 굳이 붙인 것은 사족 같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살인

르노르망 전투개시

세르닌 공작의 계획

르노르망의 계획

르노르망의 패배

파블리 리베일라 아르텐하임

빛 바랜 프록코트

형무소 관저

근세사의 한 페이지

뤼팽의 대계획

샤를마뉴 황제

황제의 편지

일곱 명의 도둑

검은 옷의 사나이

유럽의 지도

살인녀

 

자살-에필로그

 

목차에서 직접적으로 사람의 이름이 다양하게도 등장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른바 부캐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것은 한 명으로 그쳐야 하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과거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에서 새로운 이름과 지위를 다들 사용하고 있어서 소설 전체가 마치 거대한 서커스나 연극같은 느낌이 들었다. 즉 사실성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셜록 홈즈를 읽으면 그 떄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베이커가 221B 번지, 19세기 영국의 다소 축축하면서도 을씨년스러운 공기를 그대로 맡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으면 역시 그떄나 지금이나 존재하지 않는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 20세기 초반 영국 시골 마을의 양지바른 정원이 떠오른다.

이 소설은 아무리 읽어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마치 평행세계의 프랑스 같다고 할까.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식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 활극을 좋아하는 사람은 높게 평가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썩 선호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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