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레드메인즈 동서 미스터리 북스 32
이든 필포츠 지음, 오정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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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레드메인즈의 표지는 온통 빨간색인데, 빨간 머리가 아니라 붉은 천 일부가 날카롭게 찢어져 있고, 그 틈 사이로 사람의 코만 살짝 보이는데 천도 코도 다소 붉은 빛이다.

 

이 표지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목하고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한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코만 살짝 보이고 정체를 꽁꼼 숨긴 누군가가, 마치 바람이 불어서 커튼만 살짝 들춰지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구인지 아직은 전혀 모르겠는 사람이 몸을 감춘 상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엿들으며 실수 한 번 저지르지 않고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느낌.

 

 

이 책을 읽어가면서 누가 범인인지는 사실 금방 눈치를 챘다. 아마 나중에 등장한 피터 건즈도 빠른 시일 내에 알았을 것이다.

 

책을 점점 읽어가면서 이렇게 눈에 보이는데(얼마나 눈에 보이냐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주요 인물의 대화를 생략하는 부분이 있다. 이 책 기준으로 315쪽에 나온다. <건즈가 다시 코담배를 집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수사의 과정으로 말해서 당연히 이 사악한 범죄의 클라이맥스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 다 말해 버리면 오히려 그 올바른 의의를 보여 줄 수 없게 된다. 다만 얼른 듣기에 상식 밖으로 여겨지는 그의 설명이 브랜던의 머리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수사하고 범인 잡는 게 직업인 사람이 이렇게까지, 이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예전에 읽었더라면 현실성이 없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최근 일반인이 합숙하며 짝을 찾는 예능을 몇 편 보면서 이런 일이 실제로도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멀쩡한 사람들이 왜 저 상황에서 감정 조절을 못하고 저런 어이없는 말을 하고 저런 잘못된 판단을 하고 저런 황당한 실수를 하지? 이게 전지적 시점에서 지켜보는 시청자의 생각이지만, 실제 그 상황에서는 충분히 자연스럽고도 가능한 일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큰 주제도 그렇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피터 건즈, 그리고 마크 브랜던의 또 다른 이야기가 너무 궁금한데, 작가는 추가적인 이야기는 쓰지 않은 것 같다. 은퇴한 전설적인 명탐정의 화려한 과거도, 새로운 길을 가게 되는 유능한 형사의 빛나는 미래도, 더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소설 자체로 놓고 봤을 떄 아쉬운 점은 시점이 정돈되지 않은 점이었다. 사실상 마크 브랜던의 속마음을 그대로 노출하는 1인칭 시점이었다가, 갑자기 후반부에서 한동안 브랜던이 사라지고 사실상 피터 건즈의 1인칭 시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은 실제 작가의 서술이 그랬던 건지 번역 떄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추어 작가처럼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작가가 누구의 입장에 있는 것인지 이렇게 우왕좌왕하다니.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노출할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전지적 작가의 시점은 택할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일관성 있게 어느 한 사람의 입장에서 가야 하지 않았나 싶다.

 

 

 

작가 이든 필포츠는 놀랍게도 크리스티랑 관련이 있다. 습작 시절 크리스티의 옆집에 유명한 소설가가 살았는데, 크리스티의 어머니가 딸의 작품을 그에게 보여주며 그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작가가 바로 이든 필포츠, 빨강머리 레드메인즈의 작가이다. 크리스티는 훗날 엔드하우스의 비극이라는 소설을 그에게 헌정했다고 하는데, 아마 늘 고마움을 기억했던 것 같다.

 

 

p. 241

 

"'악한 인간들'을 상대로 평생을 보내는 우리들이니, 저는 이따금 이런 내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통조림을 판다거나, 속옷 장사를 한다든가 하면서 살고 싶을 때도 있구요. 군인이나 선원이라도 좋았을 것입니다. 평생의 과업이 같은 인간의 악을 대상으로 하다니, 이런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직업이 활이나 화살처럼 과거의 유물이 되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연상의 사나이는 웃었다.

 

"괴테가 어디선가 이런 말을 했었소. '백만 년을 살아 봐야 고생거리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또 그것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엷어지지도 않는다'고 말이오. 몽테뉴의 말에도-몽테뉴는 읽어 둬야 하오, 인류가 낳은 가장 현명한 인물이니까 말이오-이 사람도 말하고 있소. '인간의 지혜가 그 자신이 규정한 이상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가령 도달했다 하더라도 다시 또 그것을 넘은 이상을 가리킬 테니까.' 결국 인류가 존속하는 한, 악인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도 되오. 그래서 그들을 잡으러 다닐 사람을 훈련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 거요. 범죄는 이 세상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지 계속될 것이고, 범죄자가 영리해지면 영리해질수록 우리도 더 영리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저는 인간을 좀더 나은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마크의 말에 나이든 친구는 감탄해 보였다.

 

"훌륭한 생각이오. 당신 나이로서는."

 

 

p. 369

 

"그리고 이것만은 꼭 말해 두고 싶소만, 나는 당신을 나무랄 생각은 조금도 없소. 때로는 그 그리운 벗의 짙은 우정을 생각하긴 하오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내가 책망하는 것은 나 자신이오. 마지막에 가서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만 것은 나이지, 당신의 실책이 아니었소. 그 일을 맡긴 내가 바보였던 거요. 그건 아무 변명도 소용없소. 그 때의 당신은 그 일을 맡을 만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거든. 마땅히 그걸 생각했어야 했던 거요. 당신이 실수하고 또 마이클 펜딘이 실수한 것은, 우리들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오. 악인은 그 악행에 상처가 나고, 선인은 그 순백한 경력에 먹칠을 하게 되고. 생각이 깊은 두뇌라도 별안간 고갈하는 수가 있는 법이오. 그 이유는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선과 악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완벽한 것은 거부되고 있기 떄문인데, 그 점 성자나 죄인이나 다 똑같다고 볼 수 밖에 없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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