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 마음을 움직이는 힘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1
한상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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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솔직히 모르겠다. 이 책은 내가 읽어 본 자기계발서 중 가장 짜임새 있는 소설이며, 다른 우화형 자기계발서에 비해 오그라들거나 억지스러운 구성도 없다. 매끄럽고, 읽기 쉽고, 그러면서도 다 읽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결말을 궁금해가며 읽었다. 하지만... 아직 사회 생활 경험이 부단히 짧은 터일까. 배려가 중요한 것은 머리로도 알겠고, 수많은 명사들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알겠다. 하지만, 정말 성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이 느껴지고, 와닿지가 않는 것은, 어쩌면 아직 자기 수양이 덜 된, 어린 내 탓인 것일까... 다만 이 책에서 이 한 구절은 마음에 아프도록 박혔다.

 

우리가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들 합니다.
첫 번째는 사색하는 길인데 이것은 가장 높은 길이죠.
두 번째는 모방으로 다가서는 방법인데 가장 쉽다고들 합니다.
마지막은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길이죠.

 

나 또한 매일매일 일기를 쓰며 내 자신을 반성하고 하루를 사색하였고, 동기와 선배들을 바라보며 모방함으로써 배웠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하여 삶에 대해 하나하나 깨우쳐 가고 있는 중이다. 세 가지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라고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지만, 그렇게 생각해왔고, 실제로 나라는 사람은 고통을 겪으면서 뼈에 사무쳐가면서 성장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 합리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쉽고, 더 높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부족하고 모자라 가장 고통스러운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이러한 내 자신을 반성하기보다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면서 내 스스로를, 좀 어처구니없지만, 대견스러워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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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 마음을 얻는 지혜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2
조신영.박현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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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하우스의 자기계발 우화 시리즈입니다.

 

내용이 살짝 오글거리기도 하고, 이런 류의 책들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소설적 구성은 다소 허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청력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들을 줄 몰랐던 사람이 실제로 병을 얻어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면서 오히려 경청하는 법을 깨닫고,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클래식을 매개로 하여 베토벤과 연결시킨 점,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악기를 만드는 과정에 녹여서 표현한 점은 꽤 탄탄하고 짜임새 있는 글을 위한 저자의 노력을 짐작하게 합니다. 후반부가 엉성하게 마무리된 점은 조금 아쉽지만요.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어른들보다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에게 오히려 더 큰 조언이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책의 강점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조리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에 녹여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물을 어느정도 먹은 어른들보다 이제 곧 세상에 나올 어린 친구들에게 더 다가올 책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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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밥
토드 홉킨스 외 지음, 신윤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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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지침: 지쳤을때는 재충전하라. 두 번째 지침: 가족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다. 세 번째 지침: 투덜 대지말고 기도하라. 네 번째 지침: 배운 것은 전달하라. 다섯 번째 지침: 소비하지 말고 투자하라. 여섯 번째 지침: 삶의 지혜를 후대에 물려주라.

 

솔직히 오글거리긴 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갓 사회에 발을 내딛은 사람으로서 냉소적이 되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쉽게쉽게 읽히기는 했지만 한 때 넘쳐나던 우화 형식의 자기 계발서에 약간 지친 탓일까... 첫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지침은 와닿지만 짝수번째 지침들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달라질지도... 다만 태클은 절대 아니고 의문이었던 것이,

 

'누구에게나 고민거리는 있는 법이야. 밥 아저씨도 마찬가지일 테지. 다만 밥 아저씨는 그 문제를 잠시 접어두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갖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거야. 당장 해결하지 못하는 자기 문제에만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보다는, 남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돕는 편이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밥 아저씨는 믿고 있을 거야.'

 

라는 본문 중 내용이었다. 글쎄, 나는 나의 문제로 정신이 사납고 머리가 어지러울 때는 절대 다른 사람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거나 생각할 여유를 내 주기가 쉽지 않았고 혹시나 정신없는 와중에 어설픈 조언으로 상대의 마음을 다칠까 두려워 최대한 말을 아끼고 고르거나, 그것이 힘들 정도로 느껴지면 아예 내가 힘들때는 누군가와 함께 고민을 하는 행위를 삼갈 정도였는데, 이 구절을 보니 이해가 살짝 되지 않았다. 개인의 차이인지, 아니면 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 것처럼,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도중에도 회사에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남자 사원과, 애인과의 관계가 꼬이자 회사에서 평소보다 약간 흐트러졌다는 여자 사원의 차이를 다룬 책처럼 남녀의 차이인지... 물론 그 구절을 읽는 동안에는 개인적인 특성을 이런 식으로 남녀의 차이로 일반화시켜서 문서화 시킨 작가의 부주의함에 좀 화가 나긴 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남을 가르칠 때 가장 큰 깨달음을 얻는 속성이 있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일이 남을 일깨워주는 와중에 불현듯 큰 깨달음으로 다가오곤 하는 것이다.

 

라는 이 문장에는 많지 않은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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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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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환하게 웃는 케이케이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내가 여자임을 깨달았다.

 

케이케이는 며칠에 걸쳐서 이삿짐을 하나둘 나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이상한 이웃처럼 천천히, 하지만 막상 마지막 숨결을 내뿜는 순간에는 느닷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갑작스레 죽었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열여덟 살이 늙어간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건 꿈을 꾸지 않는 것.

 

그게 누구든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것들이었다. 더 아름다워지기를, 더 매력적이기를, 혹은 더 사랑스러워지기를.

 

그녀는 남자들은, 예를 들자면 그게 목소리든 행동이든, 혹은 아무런 뜻 없이 내뱉는 말투든, 자신이 풍기는 어떤 분위기 때문에 끌리면서도 그게 다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됐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현과 같은 남자와 결혼한다면, 고통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현 정도라면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남자애였고, 실제로 그녀 역시 현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현을 사랑하는 일에는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그렇게 부르는 게 정확한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옷 속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꼭 그만큼, 그네와 미끄럼틀로 녹이 스는 꼭 그만큼, 기압골이 이제 한반도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꼭 그만큼, 내 스물다섯의 나이도 흘러가고 있었다. 스물다섯의 고민이란 그 고민마저도 꼭 그만큼이라는 것.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 꼭 그만큼이라는 것.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아요. 그랬어요. 십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멈춰서 자기를 바라봐야 할 나이, 이젠 좀 솔직해져도 괜찮은 나이, 서른 살이 된다는 건 정말 그런 의미인 것일까?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먼 훗날의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지금의 내가 용서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경우는 어떨까? 먼 훗날의 나라면 지금의 나를 용서할 것인가?

 

<내겐 휴가가 필요해>

 

어이없게도 삶은 단 한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그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들은 말하고 있었다. 도서관에는 그처럼 많은 책이 있으니, 그중에는 단 한권이라도 자기 같은 인생도 이 세상에 필요했다고 말해주는 책이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 당시 내 인생이란 '읽어도 그만, 읽지 않아도 그만'인 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남편은 내게 쓰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에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무서운 밤이었다. 나는 남편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밤에 남편이 내게 던진 질문은 두 가지 뿐이었다. 그 사람에 대한 책을 왜 내가 써야만 하느냐, 자신을 사랑하느냐. 남편의 질문은 결국 남자란 동물은 대단히 부적절한 순간에 사랑을 확인하려 든다는 사실만을 내게 알려준채, 어떤 대꾸도 듣지 못했다.

 

나는 엄마 덕분에 삶과 죽음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고통. 엄마가 죽던 그 순간까지 나는 정신을 잃은 엄마의 손을 어루만지며 침이 마르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엄마의 고통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은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 날이었다. 당연하게도 엄마는 내게 수많은 기억을 남겨두고 갔다.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는 엄마를 바라볼 때, 그 기억들은 나를 웃게 만들기도 하고, 느닷없이 통곡하게 만들기도 했으나, 그때만 해도 아직 엄마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상실감 앞에서 기억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고통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슬픔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깊은 절망일수록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눈에는 금방 들어오게 마련이다.

 

곧 나는 삶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 나만이 느꼈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또다른 누군가도 봤으리라고 짐작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기이하면서도 따뜻한 경험인지 깨닫게 됐다.

 

위안이라고는 말했지만, 그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순간들, 예컨대 엄마의 죽음과 같은 특정한 순간들을 그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체념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 탓에 누군가 내가 본 것과 같은 노을을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온 존재가 떨릴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리얼리티는 변해가는 것이므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표현양식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브레히트의 말을 거론하며, "무슨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순간, 예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그게 바로 내가 아는 리얼리티다"라고 썼다.

 

"봄나무가 아니라, 봄이 되기 직전의 나무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타는 것도 없으리라. 계절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렇게 헐벗은 나무들을 쳐다보게 만든다. 그러나 화신(花信)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꽃은 봄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꽃이 모두 핀 봄나무는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알린다...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순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우리는 하늘을 봤고 우리는 별을 봤고 우리는 바다를 봤지. 하지만 결국에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자신이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너는 너만을 이해했을 뿐이야. 음식을 맛볼 때, 너는 차이를 맛보는 거지, 그 미각을 맛보는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는 리 선생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면 과연 그 첫문장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수많은 첫 문장들. 그 첫 문장들은 평생에 걸쳐서 고쳐지게 될 것이다...그로부터 인생은, 쉬지 않고 바뀌게 된다. 우리가 완벽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이야기는 계속 고쳐질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첫 문장은 달라질 것이다.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갔다.

 

<달로 간 코미디언>

 

내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게 분명해지고 나서 채 십 분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볼 때면 몸에 이상한 온기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또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에 관한 정보를 얻어낼 때마다 그 온기는 조금씩 상승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녀 역시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그 결과 얼굴이 붉어지면서 손끝과 발끝에 이르기까지 온몸이 뜨거워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온기가 지속되는 동안, 나는 1000m를 전력 질주해 숨이 가빠진 중학생이 입을 한껏 벌려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거침없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우리 둘 사이에 온기가 남아 있는 동안 이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바가 하나도 없는, 참으로 무해한 공간이었다.

 

아직 벚나무에 벚꽃은 가득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꽃들 모두 져버리라는 걸 아는 마음 같은 것도 세상에는 있지 않을까?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되려 슬퍼지는 그런 마음 말이다. 함께 누워서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한참 들여다볼 때면 그런 마음이 어떤 마음일지 알 것만 같았다. 모든 일이 지나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으로 행복했고 또 역설적으로 불행했다.

 

우리의 소원은 자고 싶은 만큼 충분히 늦잠을 자고, 얘기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얘기하고, 읽고 싶은 만큼 충분히 책을 읽고, 수영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수영하고, 취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취하고, 사랑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사랑하는 일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던데, 그 기간 동안 내게는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

 

"우리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책 한 권을 오디오로 만들거나 점역하는 일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주로 장애인들의 자립을 도와주는 책이나 베스트셀러만 우리는 접할 수 있으니까요...누군가 선생의 소설을 제게 읽어주지 않는 한, 저는 선생의 소설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요약이 불가능한 책들, 잘 안 팔리는 책들은 나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눈이 멀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책들을 읽을 수있으니까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게 잘 믿기지 않습니다."

 

"어떤 아줌마가 나한테 '어차피 앞도 안 보이는데 그냥 목도리로 얼굴을 다 감아버리지, 왜 목만 가리느냐'고 묻습디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나는 앞을 볼 수 없으니까. 그 말은 어차피 남들이 나를 볼 수 없으니까, 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시각장애의 핵심은 내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보여져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목소리를 내어서 대답하기 전까지 당신이 내 앞에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알 수 없어요. 청각적으로 봐서는 당신은 지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대답하면 '아, 거기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1981년 여름까지 살았던 시각적 세계에서 한번 죽은 뒤, 시각이 사라진 세계에 다시 태어난 셈입니다. 그건 마치 전생의 기억을 안고 사는 것과 비슷해요. 누군가 광화문 거리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제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광화문 거리는 1981년 여름까지의 광화문 거리죠. 안구를 적출한 뒤에는 전에 한번 가본 곳일수록 다시 가지 않으려는 성향이 생기는데, 그건 혹시라도 제 기억과 다른 부분을 발견할까 두려워서죠. 그건 아마도 성장을 두려워하는 일과 비슷할 테죠."

 

<해설>

세계는 붕괴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기 베를린장벽은 무너지고, 어느날 갑자기 세계무역센터는 잿더미가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전직 대통령은 뒷산 바위에서 몸을 던진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그 일 이전에 존재했던 세계는 무너지고 만다. 우리 삶의 흐름을 단숨에 끊어놓는 이런 붕괴와 상실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은 목가(牧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본래 이런 붕괴와 상실을 이해해보려는 안간힘으로 씌어지는 법이다.

 

삶은 이야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여자친구가 예전과 다름없이 내 곁에 있을 때까지는, 직업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까지는, 세상을 볼 수 있는 시력이 나에게 있을 때까지는, 삶이라는 이야기는 매끄럽게 진행된다. 그러나 세계가 붕괴하면 그 세계 위에서 진행되던 내 삶의 서사는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지고 만다. 세계의 붕괴 이후 주체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요컨대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서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삶은 이야기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세계는 붕괴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와 더불어 내 삶의 서사도 붕괴하기 일쑤다. 그때 주체는 무너지는 삶의 서사를 필사적으로 복구해야만 한다.

 

한 세계가 붕괴하면서 삶의 서사에 구멍이 뚫릴 때마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도리 없이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들어가 '삶을 쓰는' 일을 되풀이하겠지만 그 서사는 끝내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삶이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삶의 본질은 그저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을 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되려는 경향이 있다...이 둘에게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있는, 어찌할 수 없는 벽이 있다...그 벽이 허물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은 고통의 소통이다. 내가 케이케이를 잃은 것처럼 혜미는 세 살짜리 아들을 잃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어느 지점에서 이렇게 연결된다. 소통의 순간이다. 소통 이전의 언어들이 조금씩 미끄러진다면 소통 이후의 언어들은 통역 없이 이해된다.

 

과연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일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고, 또 과연 어떤 일이 한 사람한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 한 사람과 관련돼 있지 않은 그 어떤 일도 없다는 것도 확실하다고 말이다. 다시 체호프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이 '세계'는 하나의 이야기이고 그것은 무수한 '나'들의 이야기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는 모두가 이야기들로 연결돼 있다고, 그래서 한쪽 끝을 건드리면 다른 쪽 끝이 떨리는 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작가의 말>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별다른 계기 없이, 어떤 영향관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한 작품들이다. 나의 바깥에서 불꽃이 타오를 때, 내 안에서도 불꽃이 타올랐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들을 쓰던 지난 2007년에서 2009년까지의 시간들이 내게는 불꽃이 타오르던 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당신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마도 전염된 각자의 불꽃들이 외롭게 타오르던 한 시기.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건 부정의 문장도, 무엇도 하지 않았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의 얼굴이 서로 닮아간다는 걸 믿는다는, 역시 미신과도 같은 이야기다.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이 미신 같은 이야기는 나를 매혹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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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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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처음으로 프루스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본 일본 영화 '러브레터' 때문이었다. 중학교 남녀 주인공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로 도서 카드가 등장하고, 남자 주인공은 아무도 빌려가지 않아 도서 카드가 비어 있는 책을 대출하여 그(또는 그녀)의 이름을 대출자에 적는다. 그때 나온 책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중학교 편집부였던 나는, 나중에 문집 편집을 하면서 재직중이시던 선생님의 글을 실었는데 그 중 하나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라는 내용으로 이 영화가 글에 등장했고, 영화를 보면서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한 선생님의 글이 있었다.

 

그만큼 이 책을 어렵고 난해하고 산만한, 하지만 누구나 걸작으로 인정하는데 거부하지 않는 대표적인 고전의 대명사이고, 워낙 책을 좋아했던 나는 도서관에서 빌리려다 방대한 양에 기겁해서 건드리지도 못했다. 나같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참 반갑고 고마운 책이다. 일단 이 책을 읽고 나면 망망대해의 길잡이를 확실히 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워낙 엄청나다 보니 내용을 만화로 옮긴 버전도 있는 것을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확인했다. 일단은 그것부터 시도해봐야 겠다.

 

보통은 정말 알면 알수록, 반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섬세한 묘사, 깊은 통찰력, 언뜻언뜻 돋보이는 세상에 대한 따스한 관조...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충분히 내던질 만하다는 것이다.' 이지만, 내가 읽은 보통의 책들은 절대 던질만한 책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견 냉정해 보이지만,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 없이 이만큼 관찰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에 한번도 만나지 못한 작가가 그저 따뜻하고 친숙하게 느껴질 뿐이다. 앞으로 그가 어디까지 글을 쓸 수 있을지, 계속 기대된다.

 

1.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불행만큼 인간이 전념하는 대상이 또 있을까. 만약에 어떤 악의적인 창조주가 오로지 고통을 주기 위한 목적 하나만으로 우리를 지상에 놓아두었다면, 그 과제를 달성하려고 열성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위로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널리고도 또 널렸다. 우리 육체의 연약함, 사랑의 변덕스러움, 사회생활의 불성실, 우정의 손상, 습관의 둔화작용 등등. 이런 지속적인 고난 앞에서야, 우리가 더 큰 기대를 품고 기다릴 만한 사건은 오로지 우리의 사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2.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두 사람이 헤어질 때, 배려의 말을 건네는 쪽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소설 속 등장인물(또한-기적적으로-읽다 보면 바로 우리 자신인)이 달콤 씁쓸한 추방이라는 똑같은 고통을 겪는 것을 목격하노라면, 그리고 결국에는 살아남는 것을 목격하노라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3.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이것은 인간의 경험이 생략 앞에 얼마나 취약한지, 즉 우리가 뭔가에 중요성을 부여할 떄마다 그 길잡이가 되는 보다 뚜렷한 푯말들이 얼마나 쉽게 벗겨져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4.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사람이 슬플 때에는, 자기 침대의 온기 속에 누워 있는 것이 좋다. 그 안에서 모든 노력과 분투를 포기하고, 심지어 머리를 이불 아래에 파묻은 채, 완전히 항복하고 울부짖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발목을 삠으로써 우리는 신체의 무게 분산에 관해서 금세 깨닫게 된다. 딸꾹질을 함으로써 우리는 이전까지 몰랐던 호흡기 계통의 여러 국면을 깨닫고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연인에게 걷어차이는 것이야말로 감정적 의존성의 메커니즘에 대한 완벽한 입문이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말일세, 젊은 시절의 어느 시기엔가 자신이 말한 무언가가, 또는 자신이 살아간 어떤 방식의 불유쾌했던 경험을 그리하여 나중의 삶에 가서는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기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러했던 경험을 지니게 마련이라네. 하지만 이를 전부 후회해서는 안 되네, 왜냐하면 어리석거나 불건전한 시기를 모조리 지나서 궁극적인 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 되었는지 여부를-적어도 우리 중 누군가가 현명해질 수 있다면-그는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우리가 축복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무지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이리라. 가령 자동차가 잘 움직인다면, 무슨 이득을 바라고 우리가 굳이 그 기계의 복잡한 내부 작동에 관해서 배워야 한단 말인가? 연인이 충실을 맹세한다면, 우리가 왜 굳이 인간의 배신행위의 역학에 관해 숙고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의 모든 만남을 존중해야 한다면, 왜 우리가 사회생활의 굴욕에 관해 조사해볼 의욕이 생긴단 말인가? 오로지 슬픔 속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진실에 직면하고자 하는 프루스트적인 자극을 지니게 된다.

 

이런 생각은 의사를 향한 프루스트의 의구심을 설명해준다. 프루스트의 지식 이론에 따르면, 의사는 뭔가 어색한 입장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체 작용의 이해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면서도, 정작 그들의 지식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몸에 나타난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몇 년간 의과대학에 다녔을 뿐이다.

 

이러한 입장에 놓인 의사들의 완고함이야말로 병을 달고 살던 프루스트를 괴롭힌 원인이었다. 그 당시의 의학 지식의 근거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고려해본다면 이런 완고함은 더욱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5.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내 말이 다른 사람의 말처럼 들리기를 바라는 것에는 그 나름의 유혹적인 면이 있다. 우리가 물려받은 말버릇은 우리의 말이 권위 있는 것처럼, 지적인 것처럼, 세속적인 것처럼, 적절하게 감사하는 것처럼, 깊이 감동한 것처럼 들리도록 해준다.

 

삶이란 클리셰적인 삶보다도 더욱 낯선 실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검은방울새는 종종 그 부모와는 다른 방식으로 뭔가를 해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플루플루, 미주 또는 불쌍한 작은 늑대라고 부르는 데에는 뭔가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6.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

 

모든 우정에 명백히 요구되는 어느 정도의 불성실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정이라는 하나의 우산 아래에서 습관적으로 상충되는 두 가지 계획-애정을 지키기 위한 계획과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표현하기 위한 계획-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프루스트는 "우정을 비웃는 사람들은.......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는 어쩌면 그런 우정을 비웃는 사람들이야말로 보다 현실적인 기대를 지니고 그 유대에 접근하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하기를 회피하는데, 그 주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 주제야말로 너무 중요한 까닭에 대화라는 우연적이고 쏜살같고 궁극적으로 피상적인 매체의 손아귀에 놓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질문에 답변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해, 우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훈계하는 곳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관해 배우는 영역으로 바라보는 데에 대해서 아무런 분개도 느끼지 않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다른 사람의 감수성을 음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결과로 인한 거짓된 친절-가령 나이 들어가는 전직 고급 창부의 외모에 관한 장밋빛 해석, 의도는 좋았지만 범속한 시집에 관한 너그러운 서평-의 필요를 어느 정도까지는 받아들인다. 진실과 애정 모두를 호전적으로 추구하는 대신, 그들은 양립 불가능한 것을 식별하고, 그들의 계획을 나누었으며,가령 국화와 소설 간에, 로르 헤이먼과 오데트 드 크레시 간에, 실제로 보낸 편지와 결국 감춰두었지만, 그래도 쓸 필요는 있었던 또다른 편지 간에 현명한 구분을 가했다.

 

7. 눈을 뜨는 방법...

 

위대한 화가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들 본인의 눈이 시각적 경험의 국면들에 대한 유별난 수용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뭔가를 다시 한 번 바라봄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프루스트의 치료 개념에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불만이 각자의 삶에 본래적으로 결여되었던 뭔가의 결과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각자의 삶을 적절하게 바라보기에 실패한 결과의 가능성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밝혀준다.

 

8. 사랑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만약 연인과의 오랜 연애가 너무 잦은 권태를 낳는다면, 즉 우리가 상대방을 너무 잘 안다는 느낌이 든다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진짜 문제는 우리가 상대방을 충분히 잘 알지는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관계에서는 처음의 신선함이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를 스스로의 무지 속에 남겨놓는 반면, 차후에 벌어지는 연인의 확고하고 물리적인 현존과 연애의 일상은 마치 우리가 진정한 그리고 단조로운 친숙성을 성취했다고 오판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사실 물리적 현존이 길러낸 거짓된 친숙함에 불과하며, 결국 홍수로 인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배우기 전까지만 해도 노아가 무려 600년 동안이나 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느꼈음직한 거짓된 친숙함에 불과한 것이다.

 

한 사람의 매력보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발언이 사랑의 이유가 되는 경우가 더 잦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니요, 오늘 저녁은 한가하지가 않네요."

 

비록 어떤 사람이 갖가지 특징들로 가득 찰 수는 있지만, 유혹자가 이런 특징에 전심으로 집중하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극이 필요하며, 이 자극은 저녁식사 제안에 대한 거절에서 그 완벽한 형태를 발견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저항하는, 누구도 곧바로 소유할 수는 없는, 심지어 처음에는 과연 누군가가 소유하게 될지 아닐지 여부조차도 알 수 없는 여성이야말로 유일하게 흥미로운 사람들이다.

 

프루스트가 보기에, 질투의 주입은 관계가 습관에 의해서 망가지는 상황에서 구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9. 책을 내려놓는 방법...

 

평생을 문학에 바친 사람으로서 프루스트는 책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의, 또는 오히려 물신주의적으로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의 위험에 관한 독특한 자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일면 마땅한 존경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학 제작의 정신을 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쓴 책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유익만이 아니라 나아가 그 한계의 음미에도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

 

독서가 우리에게 자극인 한에서는, 즉 그 마법의 열쇠가 어떻게 해야 들어갈지 몰랐던 우리 내부 깊은 곳에 있는 거처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한에서는,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하다. 반면 우리에게 정신의 독자적인 삶을 일깨우는 대신에, 독서가 그 삶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을 때에는 위험하기도 하다. 즉 진실이 이제 더는 어떤 이상, 즉 오로지 우리 생각의 친밀한 과정이며 우리 마음의 노력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어떤 이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책장 사이사이에 배치된 어떤 것으로, 가령 다른 사람이 완벽하게 마련해둔 꿀처럼, 그저 도서관의 책장으로 손을 뻗어 정신과 육체의 완벽한 휴식 속에서 수동적으로 견본을 뽑아내는 수고만 감당하면 그만인 것으로 나타날 때가 그렇다.

 

우리는 밀레가 자신의 '봄'에서 보여준 그 들판을 직접 가서 보고 싶어하며, M. 클로드 모네가 우리를 지베르니로, 센 강의 강둑으로 그리고 그가 아침 안개 사이로 보여 준 탓에 우리 눈에는 거의 분간이 가지 않는 강굽이로 데려 가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사실은 무엇인가 하면, 단순히 관계의 우연 또는 가족 관계로 인해서...... 밀레나 클로드 모네는 그 근처를 지나거나, 인근에 서 있을 기회를 얻었고, 그리하여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길을, 그 정원을, 그 들판을, 그 강굽이를 그리기로 선택했을 뿐이다. 이 세계의 나머지와 비교했을 때, 그런 장소가 유독 뭔가 다르게, 그리고 뭔가 더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은, 그곳이 일찍이 천재들에게 부여했던 어떤 인상이-마치 파악하기 어려운 반영처럼-그곳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인상이란, 어쩌면 그 화가가 그릴 수도 있었을 다른 풍경 모두의 유순하고도 무관심한 표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독특하면서도 제멋대로 떠돌아다니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이런 사실을 잊게 되면 우리는 의외로 서글픔을 느낄 수 있다. 흥미라는 것이 특정한 위대한 예술가가 그것을 발견한 바로 그 장소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느낄 때, 천 가지에 달하는 경험의 풍경과 장소는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관심을 그만 박탈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네는 오로지 지상의 몇 가지 구역만을 바라보았을 뿐이며, 프루스트의 소설은 제아무리 길어야 인간 경험의 일부밖에는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주의력의 일반적 교훈을 배우는 대신, 우리는 단순히 그 시선이 지목하는 대상만을 추구할 수 있으며 그런 와중에 예슬가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이 세계의 다른 부분을 공정하게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프루스트에 대한 우상숭배자로서, 우리는 프루스트가 결코 먹어본 적이 없는 디저트에, 그가 결코 묘사한 적이 없는 드레스에, 그가 언급한 적이 없는 사랑의 미묘한 차이에, 그가 방문하지 않은 도시에 바칠 시간이 거의 없을 것이며, 대신 우리의 존재와 예술적 진실 및 흥미의 영역 간의 간극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고통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프루스트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경의는 일찍이 그가 러스킨에게 내린 것과 똑같은 평결을 그에게도 내리는 것이리라. 즉 그의 모든 자질 때문에, 그의 작품에 너무 오랜 시간을 소비한 사람들에게는 결국 그의 작품이 어리석고, 광적이고, 속박되고, 거짓되고, 우스꽝스럽다고 증명되리라는 것이다.

 

독서를훈련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극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다. 독서는 정신생활의 문턱에 놓여 있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생활에 소개해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충분히 내던질 만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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