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처음으로 프루스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본 일본 영화 '러브레터' 때문이었다. 중학교 남녀 주인공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로 도서 카드가 등장하고, 남자 주인공은 아무도 빌려가지 않아 도서 카드가 비어 있는 책을 대출하여 그(또는 그녀)의 이름을 대출자에 적는다. 그때 나온 책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중학교 편집부였던 나는, 나중에 문집 편집을 하면서 재직중이시던 선생님의 글을 실었는데 그 중 하나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라는 내용으로 이 영화가 글에 등장했고, 영화를 보면서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한 선생님의 글이 있었다.

 

그만큼 이 책을 어렵고 난해하고 산만한, 하지만 누구나 걸작으로 인정하는데 거부하지 않는 대표적인 고전의 대명사이고, 워낙 책을 좋아했던 나는 도서관에서 빌리려다 방대한 양에 기겁해서 건드리지도 못했다. 나같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참 반갑고 고마운 책이다. 일단 이 책을 읽고 나면 망망대해의 길잡이를 확실히 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워낙 엄청나다 보니 내용을 만화로 옮긴 버전도 있는 것을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확인했다. 일단은 그것부터 시도해봐야 겠다.

 

보통은 정말 알면 알수록, 반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섬세한 묘사, 깊은 통찰력, 언뜻언뜻 돋보이는 세상에 대한 따스한 관조...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충분히 내던질 만하다는 것이다.' 이지만, 내가 읽은 보통의 책들은 절대 던질만한 책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견 냉정해 보이지만,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 없이 이만큼 관찰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에 한번도 만나지 못한 작가가 그저 따뜻하고 친숙하게 느껴질 뿐이다. 앞으로 그가 어디까지 글을 쓸 수 있을지, 계속 기대된다.

 

1.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불행만큼 인간이 전념하는 대상이 또 있을까. 만약에 어떤 악의적인 창조주가 오로지 고통을 주기 위한 목적 하나만으로 우리를 지상에 놓아두었다면, 그 과제를 달성하려고 열성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위로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널리고도 또 널렸다. 우리 육체의 연약함, 사랑의 변덕스러움, 사회생활의 불성실, 우정의 손상, 습관의 둔화작용 등등. 이런 지속적인 고난 앞에서야, 우리가 더 큰 기대를 품고 기다릴 만한 사건은 오로지 우리의 사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2.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두 사람이 헤어질 때, 배려의 말을 건네는 쪽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소설 속 등장인물(또한-기적적으로-읽다 보면 바로 우리 자신인)이 달콤 씁쓸한 추방이라는 똑같은 고통을 겪는 것을 목격하노라면, 그리고 결국에는 살아남는 것을 목격하노라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3.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이것은 인간의 경험이 생략 앞에 얼마나 취약한지, 즉 우리가 뭔가에 중요성을 부여할 떄마다 그 길잡이가 되는 보다 뚜렷한 푯말들이 얼마나 쉽게 벗겨져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4.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사람이 슬플 때에는, 자기 침대의 온기 속에 누워 있는 것이 좋다. 그 안에서 모든 노력과 분투를 포기하고, 심지어 머리를 이불 아래에 파묻은 채, 완전히 항복하고 울부짖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발목을 삠으로써 우리는 신체의 무게 분산에 관해서 금세 깨닫게 된다. 딸꾹질을 함으로써 우리는 이전까지 몰랐던 호흡기 계통의 여러 국면을 깨닫고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연인에게 걷어차이는 것이야말로 감정적 의존성의 메커니즘에 대한 완벽한 입문이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말일세, 젊은 시절의 어느 시기엔가 자신이 말한 무언가가, 또는 자신이 살아간 어떤 방식의 불유쾌했던 경험을 그리하여 나중의 삶에 가서는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기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러했던 경험을 지니게 마련이라네. 하지만 이를 전부 후회해서는 안 되네, 왜냐하면 어리석거나 불건전한 시기를 모조리 지나서 궁극적인 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 되었는지 여부를-적어도 우리 중 누군가가 현명해질 수 있다면-그는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우리가 축복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무지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이리라. 가령 자동차가 잘 움직인다면, 무슨 이득을 바라고 우리가 굳이 그 기계의 복잡한 내부 작동에 관해서 배워야 한단 말인가? 연인이 충실을 맹세한다면, 우리가 왜 굳이 인간의 배신행위의 역학에 관해 숙고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의 모든 만남을 존중해야 한다면, 왜 우리가 사회생활의 굴욕에 관해 조사해볼 의욕이 생긴단 말인가? 오로지 슬픔 속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진실에 직면하고자 하는 프루스트적인 자극을 지니게 된다.

 

이런 생각은 의사를 향한 프루스트의 의구심을 설명해준다. 프루스트의 지식 이론에 따르면, 의사는 뭔가 어색한 입장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체 작용의 이해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면서도, 정작 그들의 지식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몸에 나타난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몇 년간 의과대학에 다녔을 뿐이다.

 

이러한 입장에 놓인 의사들의 완고함이야말로 병을 달고 살던 프루스트를 괴롭힌 원인이었다. 그 당시의 의학 지식의 근거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고려해본다면 이런 완고함은 더욱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5.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내 말이 다른 사람의 말처럼 들리기를 바라는 것에는 그 나름의 유혹적인 면이 있다. 우리가 물려받은 말버릇은 우리의 말이 권위 있는 것처럼, 지적인 것처럼, 세속적인 것처럼, 적절하게 감사하는 것처럼, 깊이 감동한 것처럼 들리도록 해준다.

 

삶이란 클리셰적인 삶보다도 더욱 낯선 실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검은방울새는 종종 그 부모와는 다른 방식으로 뭔가를 해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플루플루, 미주 또는 불쌍한 작은 늑대라고 부르는 데에는 뭔가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6.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

 

모든 우정에 명백히 요구되는 어느 정도의 불성실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정이라는 하나의 우산 아래에서 습관적으로 상충되는 두 가지 계획-애정을 지키기 위한 계획과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표현하기 위한 계획-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프루스트는 "우정을 비웃는 사람들은.......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는 어쩌면 그런 우정을 비웃는 사람들이야말로 보다 현실적인 기대를 지니고 그 유대에 접근하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하기를 회피하는데, 그 주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 주제야말로 너무 중요한 까닭에 대화라는 우연적이고 쏜살같고 궁극적으로 피상적인 매체의 손아귀에 놓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질문에 답변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해, 우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훈계하는 곳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관해 배우는 영역으로 바라보는 데에 대해서 아무런 분개도 느끼지 않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다른 사람의 감수성을 음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결과로 인한 거짓된 친절-가령 나이 들어가는 전직 고급 창부의 외모에 관한 장밋빛 해석, 의도는 좋았지만 범속한 시집에 관한 너그러운 서평-의 필요를 어느 정도까지는 받아들인다. 진실과 애정 모두를 호전적으로 추구하는 대신, 그들은 양립 불가능한 것을 식별하고, 그들의 계획을 나누었으며,가령 국화와 소설 간에, 로르 헤이먼과 오데트 드 크레시 간에, 실제로 보낸 편지와 결국 감춰두었지만, 그래도 쓸 필요는 있었던 또다른 편지 간에 현명한 구분을 가했다.

 

7. 눈을 뜨는 방법...

 

위대한 화가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들 본인의 눈이 시각적 경험의 국면들에 대한 유별난 수용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뭔가를 다시 한 번 바라봄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프루스트의 치료 개념에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불만이 각자의 삶에 본래적으로 결여되었던 뭔가의 결과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각자의 삶을 적절하게 바라보기에 실패한 결과의 가능성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밝혀준다.

 

8. 사랑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만약 연인과의 오랜 연애가 너무 잦은 권태를 낳는다면, 즉 우리가 상대방을 너무 잘 안다는 느낌이 든다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진짜 문제는 우리가 상대방을 충분히 잘 알지는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관계에서는 처음의 신선함이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를 스스로의 무지 속에 남겨놓는 반면, 차후에 벌어지는 연인의 확고하고 물리적인 현존과 연애의 일상은 마치 우리가 진정한 그리고 단조로운 친숙성을 성취했다고 오판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사실 물리적 현존이 길러낸 거짓된 친숙함에 불과하며, 결국 홍수로 인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배우기 전까지만 해도 노아가 무려 600년 동안이나 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느꼈음직한 거짓된 친숙함에 불과한 것이다.

 

한 사람의 매력보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발언이 사랑의 이유가 되는 경우가 더 잦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니요, 오늘 저녁은 한가하지가 않네요."

 

비록 어떤 사람이 갖가지 특징들로 가득 찰 수는 있지만, 유혹자가 이런 특징에 전심으로 집중하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극이 필요하며, 이 자극은 저녁식사 제안에 대한 거절에서 그 완벽한 형태를 발견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저항하는, 누구도 곧바로 소유할 수는 없는, 심지어 처음에는 과연 누군가가 소유하게 될지 아닐지 여부조차도 알 수 없는 여성이야말로 유일하게 흥미로운 사람들이다.

 

프루스트가 보기에, 질투의 주입은 관계가 습관에 의해서 망가지는 상황에서 구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9. 책을 내려놓는 방법...

 

평생을 문학에 바친 사람으로서 프루스트는 책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의, 또는 오히려 물신주의적으로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의 위험에 관한 독특한 자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일면 마땅한 존경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학 제작의 정신을 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쓴 책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유익만이 아니라 나아가 그 한계의 음미에도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

 

독서가 우리에게 자극인 한에서는, 즉 그 마법의 열쇠가 어떻게 해야 들어갈지 몰랐던 우리 내부 깊은 곳에 있는 거처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한에서는,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하다. 반면 우리에게 정신의 독자적인 삶을 일깨우는 대신에, 독서가 그 삶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을 때에는 위험하기도 하다. 즉 진실이 이제 더는 어떤 이상, 즉 오로지 우리 생각의 친밀한 과정이며 우리 마음의 노력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어떤 이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책장 사이사이에 배치된 어떤 것으로, 가령 다른 사람이 완벽하게 마련해둔 꿀처럼, 그저 도서관의 책장으로 손을 뻗어 정신과 육체의 완벽한 휴식 속에서 수동적으로 견본을 뽑아내는 수고만 감당하면 그만인 것으로 나타날 때가 그렇다.

 

우리는 밀레가 자신의 '봄'에서 보여준 그 들판을 직접 가서 보고 싶어하며, M. 클로드 모네가 우리를 지베르니로, 센 강의 강둑으로 그리고 그가 아침 안개 사이로 보여 준 탓에 우리 눈에는 거의 분간이 가지 않는 강굽이로 데려 가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사실은 무엇인가 하면, 단순히 관계의 우연 또는 가족 관계로 인해서...... 밀레나 클로드 모네는 그 근처를 지나거나, 인근에 서 있을 기회를 얻었고, 그리하여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길을, 그 정원을, 그 들판을, 그 강굽이를 그리기로 선택했을 뿐이다. 이 세계의 나머지와 비교했을 때, 그런 장소가 유독 뭔가 다르게, 그리고 뭔가 더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은, 그곳이 일찍이 천재들에게 부여했던 어떤 인상이-마치 파악하기 어려운 반영처럼-그곳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인상이란, 어쩌면 그 화가가 그릴 수도 있었을 다른 풍경 모두의 유순하고도 무관심한 표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독특하면서도 제멋대로 떠돌아다니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이런 사실을 잊게 되면 우리는 의외로 서글픔을 느낄 수 있다. 흥미라는 것이 특정한 위대한 예술가가 그것을 발견한 바로 그 장소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느낄 때, 천 가지에 달하는 경험의 풍경과 장소는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관심을 그만 박탈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네는 오로지 지상의 몇 가지 구역만을 바라보았을 뿐이며, 프루스트의 소설은 제아무리 길어야 인간 경험의 일부밖에는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주의력의 일반적 교훈을 배우는 대신, 우리는 단순히 그 시선이 지목하는 대상만을 추구할 수 있으며 그런 와중에 예슬가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이 세계의 다른 부분을 공정하게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프루스트에 대한 우상숭배자로서, 우리는 프루스트가 결코 먹어본 적이 없는 디저트에, 그가 결코 묘사한 적이 없는 드레스에, 그가 언급한 적이 없는 사랑의 미묘한 차이에, 그가 방문하지 않은 도시에 바칠 시간이 거의 없을 것이며, 대신 우리의 존재와 예술적 진실 및 흥미의 영역 간의 간극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고통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프루스트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경의는 일찍이 그가 러스킨에게 내린 것과 똑같은 평결을 그에게도 내리는 것이리라. 즉 그의 모든 자질 때문에, 그의 작품에 너무 오랜 시간을 소비한 사람들에게는 결국 그의 작품이 어리석고, 광적이고, 속박되고, 거짓되고, 우스꽝스럽다고 증명되리라는 것이다.

 

독서를훈련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극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다. 독서는 정신생활의 문턱에 놓여 있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생활에 소개해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충분히 내던질 만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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