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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환하게 웃는 케이케이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내가 여자임을 깨달았다.
케이케이는 며칠에 걸쳐서 이삿짐을 하나둘 나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이상한 이웃처럼 천천히, 하지만 막상 마지막 숨결을 내뿜는 순간에는 느닷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갑작스레 죽었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열여덟 살이 늙어간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건 꿈을 꾸지 않는 것.
그게 누구든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것들이었다. 더 아름다워지기를, 더 매력적이기를, 혹은 더 사랑스러워지기를.
그녀는 남자들은, 예를 들자면 그게 목소리든 행동이든, 혹은 아무런 뜻 없이 내뱉는 말투든, 자신이 풍기는 어떤 분위기 때문에 끌리면서도 그게 다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됐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현과 같은 남자와 결혼한다면, 고통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현 정도라면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남자애였고, 실제로 그녀 역시 현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현을 사랑하는 일에는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그렇게 부르는 게 정확한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옷 속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꼭 그만큼, 그네와 미끄럼틀로 녹이 스는 꼭 그만큼, 기압골이 이제 한반도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꼭 그만큼, 내 스물다섯의 나이도 흘러가고 있었다. 스물다섯의 고민이란 그 고민마저도 꼭 그만큼이라는 것.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 꼭 그만큼이라는 것.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아요. 그랬어요. 십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멈춰서 자기를 바라봐야 할 나이, 이젠 좀 솔직해져도 괜찮은 나이, 서른 살이 된다는 건 정말 그런 의미인 것일까?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먼 훗날의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지금의 내가 용서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경우는 어떨까? 먼 훗날의 나라면 지금의 나를 용서할 것인가?
<내겐 휴가가 필요해>
어이없게도 삶은 단 한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그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들은 말하고 있었다. 도서관에는 그처럼 많은 책이 있으니, 그중에는 단 한권이라도 자기 같은 인생도 이 세상에 필요했다고 말해주는 책이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 당시 내 인생이란 '읽어도 그만, 읽지 않아도 그만'인 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남편은 내게 쓰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에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무서운 밤이었다. 나는 남편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밤에 남편이 내게 던진 질문은 두 가지 뿐이었다. 그 사람에 대한 책을 왜 내가 써야만 하느냐, 자신을 사랑하느냐. 남편의 질문은 결국 남자란 동물은 대단히 부적절한 순간에 사랑을 확인하려 든다는 사실만을 내게 알려준채, 어떤 대꾸도 듣지 못했다.
나는 엄마 덕분에 삶과 죽음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고통. 엄마가 죽던 그 순간까지 나는 정신을 잃은 엄마의 손을 어루만지며 침이 마르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엄마의 고통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은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 날이었다. 당연하게도 엄마는 내게 수많은 기억을 남겨두고 갔다.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는 엄마를 바라볼 때, 그 기억들은 나를 웃게 만들기도 하고, 느닷없이 통곡하게 만들기도 했으나, 그때만 해도 아직 엄마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상실감 앞에서 기억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고통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슬픔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깊은 절망일수록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눈에는 금방 들어오게 마련이다.
곧 나는 삶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 나만이 느꼈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또다른 누군가도 봤으리라고 짐작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기이하면서도 따뜻한 경험인지 깨닫게 됐다.
위안이라고는 말했지만, 그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순간들, 예컨대 엄마의 죽음과 같은 특정한 순간들을 그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체념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 탓에 누군가 내가 본 것과 같은 노을을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온 존재가 떨릴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리얼리티는 변해가는 것이므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표현양식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브레히트의 말을 거론하며, "무슨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순간, 예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그게 바로 내가 아는 리얼리티다"라고 썼다.
"봄나무가 아니라, 봄이 되기 직전의 나무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타는 것도 없으리라. 계절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렇게 헐벗은 나무들을 쳐다보게 만든다. 그러나 화신(花信)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꽃은 봄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꽃이 모두 핀 봄나무는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알린다...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순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우리는 하늘을 봤고 우리는 별을 봤고 우리는 바다를 봤지. 하지만 결국에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자신이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너는 너만을 이해했을 뿐이야. 음식을 맛볼 때, 너는 차이를 맛보는 거지, 그 미각을 맛보는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는 리 선생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면 과연 그 첫문장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수많은 첫 문장들. 그 첫 문장들은 평생에 걸쳐서 고쳐지게 될 것이다...그로부터 인생은, 쉬지 않고 바뀌게 된다. 우리가 완벽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이야기는 계속 고쳐질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첫 문장은 달라질 것이다.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갔다.
<달로 간 코미디언>
내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게 분명해지고 나서 채 십 분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볼 때면 몸에 이상한 온기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또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에 관한 정보를 얻어낼 때마다 그 온기는 조금씩 상승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녀 역시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그 결과 얼굴이 붉어지면서 손끝과 발끝에 이르기까지 온몸이 뜨거워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온기가 지속되는 동안, 나는 1000m를 전력 질주해 숨이 가빠진 중학생이 입을 한껏 벌려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거침없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우리 둘 사이에 온기가 남아 있는 동안 이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바가 하나도 없는, 참으로 무해한 공간이었다.
아직 벚나무에 벚꽃은 가득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꽃들 모두 져버리라는 걸 아는 마음 같은 것도 세상에는 있지 않을까?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되려 슬퍼지는 그런 마음 말이다. 함께 누워서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한참 들여다볼 때면 그런 마음이 어떤 마음일지 알 것만 같았다. 모든 일이 지나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으로 행복했고 또 역설적으로 불행했다.
우리의 소원은 자고 싶은 만큼 충분히 늦잠을 자고, 얘기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얘기하고, 읽고 싶은 만큼 충분히 책을 읽고, 수영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수영하고, 취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취하고, 사랑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사랑하는 일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던데, 그 기간 동안 내게는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
"우리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책 한 권을 오디오로 만들거나 점역하는 일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주로 장애인들의 자립을 도와주는 책이나 베스트셀러만 우리는 접할 수 있으니까요...누군가 선생의 소설을 제게 읽어주지 않는 한, 저는 선생의 소설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요약이 불가능한 책들, 잘 안 팔리는 책들은 나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눈이 멀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책들을 읽을 수있으니까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게 잘 믿기지 않습니다."
"어떤 아줌마가 나한테 '어차피 앞도 안 보이는데 그냥 목도리로 얼굴을 다 감아버리지, 왜 목만 가리느냐'고 묻습디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나는 앞을 볼 수 없으니까. 그 말은 어차피 남들이 나를 볼 수 없으니까, 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시각장애의 핵심은 내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보여져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목소리를 내어서 대답하기 전까지 당신이 내 앞에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알 수 없어요. 청각적으로 봐서는 당신은 지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대답하면 '아, 거기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1981년 여름까지 살았던 시각적 세계에서 한번 죽은 뒤, 시각이 사라진 세계에 다시 태어난 셈입니다. 그건 마치 전생의 기억을 안고 사는 것과 비슷해요. 누군가 광화문 거리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제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광화문 거리는 1981년 여름까지의 광화문 거리죠. 안구를 적출한 뒤에는 전에 한번 가본 곳일수록 다시 가지 않으려는 성향이 생기는데, 그건 혹시라도 제 기억과 다른 부분을 발견할까 두려워서죠. 그건 아마도 성장을 두려워하는 일과 비슷할 테죠."
<해설>
세계는 붕괴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기 베를린장벽은 무너지고, 어느날 갑자기 세계무역센터는 잿더미가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전직 대통령은 뒷산 바위에서 몸을 던진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그 일 이전에 존재했던 세계는 무너지고 만다. 우리 삶의 흐름을 단숨에 끊어놓는 이런 붕괴와 상실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은 목가(牧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본래 이런 붕괴와 상실을 이해해보려는 안간힘으로 씌어지는 법이다.
삶은 이야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여자친구가 예전과 다름없이 내 곁에 있을 때까지는, 직업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까지는, 세상을 볼 수 있는 시력이 나에게 있을 때까지는, 삶이라는 이야기는 매끄럽게 진행된다. 그러나 세계가 붕괴하면 그 세계 위에서 진행되던 내 삶의 서사는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지고 만다. 세계의 붕괴 이후 주체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요컨대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서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삶은 이야기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세계는 붕괴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와 더불어 내 삶의 서사도 붕괴하기 일쑤다. 그때 주체는 무너지는 삶의 서사를 필사적으로 복구해야만 한다.
한 세계가 붕괴하면서 삶의 서사에 구멍이 뚫릴 때마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도리 없이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들어가 '삶을 쓰는' 일을 되풀이하겠지만 그 서사는 끝내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삶이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삶의 본질은 그저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을 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되려는 경향이 있다...이 둘에게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있는, 어찌할 수 없는 벽이 있다...그 벽이 허물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은 고통의 소통이다. 내가 케이케이를 잃은 것처럼 혜미는 세 살짜리 아들을 잃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어느 지점에서 이렇게 연결된다. 소통의 순간이다. 소통 이전의 언어들이 조금씩 미끄러진다면 소통 이후의 언어들은 통역 없이 이해된다.
과연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일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고, 또 과연 어떤 일이 한 사람한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 한 사람과 관련돼 있지 않은 그 어떤 일도 없다는 것도 확실하다고 말이다. 다시 체호프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이 '세계'는 하나의 이야기이고 그것은 무수한 '나'들의 이야기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는 모두가 이야기들로 연결돼 있다고, 그래서 한쪽 끝을 건드리면 다른 쪽 끝이 떨리는 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작가의 말>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별다른 계기 없이, 어떤 영향관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한 작품들이다. 나의 바깥에서 불꽃이 타오를 때, 내 안에서도 불꽃이 타올랐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들을 쓰던 지난 2007년에서 2009년까지의 시간들이 내게는 불꽃이 타오르던 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당신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마도 전염된 각자의 불꽃들이 외롭게 타오르던 한 시기.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건 부정의 문장도, 무엇도 하지 않았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의 얼굴이 서로 닮아간다는 걸 믿는다는, 역시 미신과도 같은 이야기다.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이 미신 같은 이야기는 나를 매혹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