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이동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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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이라는 사람은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꼼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열심히 자기 분야에 매진하며 즉각적인 성공을 의식하지 말고 꾸준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경지에 오를 것이라는, 이 단순해보이지만 결코 평범해보이지 않는 사실을, 갈수록 믿기 어려웠는데 이동진을 보다 보면 그게 가능하기는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70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인간 이동진에 대한 존경심이 제일 크다고 할까. 한 명의 감독과 인터뷰하기 위해 그의 모든 작품을 전부 찾아본 것은 물론이고 모든 질문을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하는 그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연구했을지 노력이 감이 잡히지 않는다.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큰 회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부터 참신하고 깊이 있는 영화 기사로 유명했었고, 조직에 있을 때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가치를 올려 지금은 프리랜서 방송인이자 평론가, 작가로 자기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냈다.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경영학이나 자기 계발서에서 충분히 예시로 들 만한 사례인 것 같다.

 

감독과 문화부 기자 출신 평론가의 영화 대담이지만, 어려운 단어나 이해 안 가는 문장이 없이 잘 읽힌다. 그리고 인터뷰어의 정성에 감동한 탓인지, 감독들 또한 여타 인터뷰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속내를 많이 보여준다. 대중을 상대로 한 책이, 이렇게 깊이가 있고 전문적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여러모로 소장이 아깝지 않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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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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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오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떠올린 시이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고 간절한 당신에 대한 마음이 압축된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약력을 살펴보니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다. 아마도 황동규 시인의 이 시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직 나는 '끌림'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병률의 이름 석 자는 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읽지 않았던 것은, 일종의 반발심리랄까. 모두가 열광할 때 시류에 편승하기보다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떄까지 기다리겠다는 마음? '끌림'이 이병률 시인의 첫번째 여행기라면, 이 책은 두번째 여행기라 할 수 있겠다. 지금의 작가를 있게 한 첫번쨰 여행기가 어떤 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은 확실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모습을, 마치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일상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 누군가에 대한 그 마음이 정말 간절하지만 사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수많은 나라, 다양한 문화 속에서 먹고, 자고, 글을 썼던 시간들을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다루는 데에서 이 여행기가 특징이 있다. 어느 곳에는 어떤 명소가 있고, 거기를 가려면 어떤 교통편을 이용해야 경제적이며, 어떤 맛집과 어떤 문화 유적에 대한 구구절절한 소개가 아니라, 그저 잠시 일상을 떠나 몸도 마음도 가벼운 상태, 그 상태를 위한 최적의 방법으로 여행을 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지구 반대편,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야만 가능한 나라에서의 일들이 흥분되는 모험이라기보다는 편안한 주말 같은 느낌을 준다.

 

책을 읽다 보면 밑줄 치고 싶은 구절도 있고,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속된 말로 오글거린다고 느껴지는 구절도 있다. 아마도 한참 내가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 이 책을 읽으면 눈물날 정도로 반가웠으리라. 그 당시, 이런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위로를 받았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격언처럼, 그 시간 또한 지나가니, 외로움을 다룬 책을 절절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덤덤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슬플 때는 슬픈 음악을 듣고, 못 견디게 외로울 때는 외로움을 다룬 시를 읽으면 오히려 위로가 되듯이, 이 책 또한 그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또 슬픈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것 또한 바이오리듬처럼 시기를 타는 때라, 언제 읽느냐에 따라서 이 책으로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진폭이 차이가 날 수 있겠다. 몇 년 전의 나라면 별 다섯개를 줬겠지. 책도 사람도 타이밍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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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럭셔리하게 쓰는자,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나에게도 여행은 시간을 버리거나 투자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여행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게 있어 여행은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도착은 우리를 100년 전으로, 100년 후로 안내한다. 그러니까 나의 사치는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감히 시간을 사겠다는 모험인 것이다.

일상에서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게 시간이지만 여행을 떠나서의 시간은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준다. 사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 우리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 쪽이질 않은가.

 

여행의 많은 순간순간들을 극한 지경으로 몰다보면 그 안에서 선명한 쾌감을 만난다. 막막히 갈 곳도 없고 깊은 밤이 되어 눈 붙일 데가 마땅하지 않아도 그 상황 속에서 서성이다보면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그 무엇에 대한 애착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거지가 아니라 여행자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이미 멀리 떠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세상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태에 깊숙이 빠져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그 친구에게 사람들은 물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바꾸어놓았느냐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단지 세상의 조각에 불과했어. 나하고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겨우 그 사실을 알았고 그건 충격이었지. 다른 기후 속에서 생각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꿈을 살고 있었지. 나의 정반대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시간에 깨어나서 치열하게 뭔가를 붙들고 있었거든. 난 가능한한 세상의 모든 경우들을 만나볼 거야."

 

역시 축구의 왕국이라 그런지 어딜 가나 축구들을 하고 있다. 지갑 들고 다니듯 어디든 공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 같다. 땀을 식히려고 공터 나무 밑에 앉았는데 저기 건너편에서도 청년들이 열정적으로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경사가 너무 심해서 한쪽 편이 심하게 불리해 보인다. 저건 뭐지? 저래가지고 무슨 축구야?

한쪽 편은 속도를 줄일 수 없었고 또다른 편은 속도를 낼 수도 없는 데다 공조차도 사람 말을 듣지 않았다 경사진 공터에서의 축구는 아무리 봐도 엉터리였다. 헌데,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양편이 서로 방향을 바꿔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쩔쩔매던 상대가 이번에는 훨훨 날고 있었다.

전반과 후반, 경사진 길과 평평한 길.

우리 인생도 그 둘로 나뉘어져 있다.

 

빵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는 유난히 빵집에 집착한다. 지내는 동안 빵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데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곳일 때 빵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로인가. 흐린 날의 빵 굽는 향은 멀리 간다. 그 향을 맡은 공사장의 인부들도, 성당의 신부님도 하는 일 없이 기뻐지거나 괜히 빗방울이라도 후두둑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빵이 너무 커서 가슴팍에 안고 먹어야 하는 그루지아의 화덕 빵이나, 빵 굽는 냄새가 맡아지면 킁킁대며 빵집을 찾아야 하는 시리아의 골목 빵집, 맛이 얼마나 좋으면 한입을 베어 물고 걷다가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 먹을 수 없는 양의 크루아상을 사게 되는 파리의 빵가게. 세상의 빵 냄새에 홀려 동물이 되는 것이 나는 좋다. 사실 빵이야 여행지에서 이렇게도 먹고 저렇게도 먹는 거라서, 빵에 눈을 많이 얹어서 먹은 기억이나 말라비틀어진 방을 석탄기차 난로에 구워서 먹은 기억까지 합하자면 빵에 대한 내 취향은 동물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행기나 여행지의 숙소에서 작은 잼이나 버터가 나오면 하나씩 주머니에 넣어두는 끈적한 버릇까지 생겼다.

 

평범이란 말보다 큰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범한 것처럼 남에게 폐가 되지 않고 들썩이지 않고 점잖으며 순하고 착한 무엇이 또 있을까.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그를 불러 내 앞에 앉혔다.

오늘 떠난다고, 여기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리투아니아의 '십자가 무덤'으로 기도를 하러 갈 거라 했다. 기도를 담은 어떤 물건이라도 좋으니 '십자가의 무덤'에, 너의 기도와 함께 내려놓고 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기도를 하면 어떤 식으로든 응답이 온다고 믿으면서 살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나무든, 철사든, 종이든 십자가를 만들면 어떨까? 작아도 되고, 뭐 커도 되고......."

두시가 되었다.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배웅을 하러 나온 수사님께 청년을 보고 가야 한다고 했더니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사람 말을 듣는 아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혹시 많은 돈을 준다면 모르지. 십자가를 만들어서 나왔을지도."

내가 느릿느릿 그 마을을 떠날 때가지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 불편한 게 아니라, 그와 어울리지 않는 나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그의 존재를 훼손시켰다는 기분이 들어 며칠이 괴로웠다.

 

당신이 맘에 든다. 내가 누군가를 맘에 들어한다는 것은 푸른 바다 밑, 심연 속으로 당신을 끌어내리고 싶어한다는 것. 그러면 당신은 눈을 뜨고 나를 보는지 아니면 두려움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마는지 실험하고 싶은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내면서 옆자리에 앉은 당신에게 키스를 하고자 했을 때 당신이 나를 따라 눈을 감는지 아니면 두려워 정면을 보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다.

(아... 이 부분은 책 전체에서 가장 오글거리는 부분이었다. 감정의 과잉 때문에 읽는 내가 감당하기가 힘든?)

 

몸이 안 좋아 목욕을 하다가 졸도한 노인과, 직접 내 손으로 입히면서 속사정까지 알게 된 그의 남루한 옷가지들과, 대저택의 장미정원. 이 셋의 서늘한 하모니 가운데 어느 하나도 커지거나 작아지면 안 됩니다. 옷이 깨끗해도 안 되고, 장미 정원이 작아도 안 되고, 또 몸이 건강한 노인이어도 안 됩니다. 아마도 그 가운데 하나라도 내가 본 그대로가 아니었다면 나에게 이토록 강렬한 불꽃처럼 기억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완벽히 혼자인 노인에게 그토록 완벽한 장미정원이 있으니 다행입니다.

 

나이만 있고, 나이 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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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베가스
존 터틀타웁 감독, 마이클 더글라스 외 출연 / UEK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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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볼 영화는 아니지만,

 

한 번 볼 때 평타 이상의 즐거움은 확실히 주는 영화.

 

잔잔한 재미, 훈훈한 반전, 유쾌한 감동.

 

 

출연진은 화려하다. 마이클 더글라스, 로버트 드니로, 모건 프리먼, 케빈 클라인. 대체 이 대단한 배우들을 데리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까 궁금했는데 오히려 시나리오가 힘을 쏙 빼서 그저 편안하게 웃을 수 있는 영화다. 네 할배들이 대체 이게 연기인지 실제인지 헷갈릴 정도로 연기가 편안하고 여유가 넘쳐서 보는 내내 미소 머금고 봤다. 누군가는 뻔한 영화라면 볼멘소리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뻔하고 예측 가능한 스토리를 가지고 지루할 틈을 주지 않다니 역시 명배우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 보고 난 후에 든 의문점. 10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듯이, 어느 한 분야에 오랜 시간 공을 들이면 일정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알겠다. 몇십 년 동안 연기를 했던 저들처럼, 나이가 들면 어느 한 분야에서 자연히 저 위치까지 갈 수 있을까. 아, 물론 꾸준히 그 분야에서 젊은 시절부터 노력한다는 가정 하에. 아니면 그것조차도,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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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10년, 그 시간을 쓰고 말하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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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의 시는 이렇게 묻는다. 오늘 너의 기분은 어땠는지? 마음 속으로 어떤 손님이 찾아왔는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잠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감사하여 행복하게 지내다가 떠난 고마운 손님이었는지, 이불이 더럽다고 화를 내느라 밤새 잠들지도 못하다가 급기야 집을 부수기 시작했던 난폭한 손님이었는지. 네 마음 속으로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는 언제나 너일 뿐, 그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네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를. 그가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기를.

 

절망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우리가 뭔가를 원했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스무 살 시절에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실패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네요. 원하는 학과에도 진학하지 못했고, 연애는 대부분 지지부진, 미친 듯이 시를 썼지만 읽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언젠가도 그렇게 쓴 적이 있는데, 열망을 열망하고 연애를 연애하고 절망을 절망하던 시절이었죠. 원하는 현실 대부분은 저 멀리, 아주 멀리 있었어요. 심지어 절망마저도. 그래서 진짜 절망하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어요.

 

'열심히 쓰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어'와 '열심히 쓰면 좋은 소설을 쓸 가능성이 높아져'는 전혀 다른 말이에요. 그 사이에는 우연과 운 같은 게 숨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쓰는 일 뿐이에요. 그 일에서 보람을 찾아야만 하는 거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이에요.

 

예를 들어 정신과 환자의 불안이 있어요. 앞에 의사가 있잖아요? 상담하면 이 의사가 뭘 물어보겠죠? 대답해야만 하는데, 환자는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정신병이 아니라고 판단하는지 그걸 알 수가 없어요. 의사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사실 의사는 원하는 게 업을 수도 잇어요. 그렇지만 환자 쪽에서는 먼저 그가 원하는 걸 알아야, 대답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대답을 강요당할 때 제대로 대답하는 게 맞는지 불안해지죠. 이게 바로 현대인이 가진 근본적인 불안이에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 여기서 신경증이 발생하는 것이죠. 연애 초기에는 누구나 이런 신경증 환자죠. 하지만 신경증 환자들만이 현대문학을 할 수 있어요.

 

시간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음 사람들이죠. 그래서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어요. 시간이 너무 많으니까 가능한 거죠. 1988년에 교보문고에 처음 갔는데, 그떄는 교보문고에 있는 책을 다 읽을 것 같았어요. 고 3이었거든요.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면 거기 꽂힌 음악도 모두 다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고요. 그땐 시간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탐닉했죠. 심지어는 빈둥거림까지도 탐닉했어요. 중년이 되면 이제 그런 시간은 사라집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요. 그러다보면 점점 고전 쪽으로 관심이 기울게 돼 있어요.

 

C.S. 루이스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참 신기해요. 독서는 혼자서만 할 수 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심지어 수천 년 전의 사람과도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작가로서는 소설 쓰기가 나를 치유해주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소설을 쓰는 일은 치유보다는 나를 넘어서는 일에 가까우니까요. 대신에 노트에다가 뭔가를 쓰는 일은 도움이 됩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노트에다 손으로 뭔가를 쓰면,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쓰게 되면 마음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날마다 일정 분량의 글을 쓰는 일은, 신경안정제를 먹는 일보다 더 좋아요. 그게 무슨 내용의 글이든. 그때는 손으로 쓰시길.

 

사람이 바뀌기란 참 어렵다고는 말했지만, 그건 자신의 의도대로 바뀌는 것을 말해요. 말하자면 아는 대로 행동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렇게 되려면 상당히 노력을 많이 해야만 하죠.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바뀌는 일은 인생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그건 의도하지 않는 변화죠. 외부의 사건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쓴 소설이 그렇게 작용해서 누군가를 바꿀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저의 의도도, 독자의 의도도 전혀 아닐 거예요. 불가항력적인 우연한 사건에 가까울 테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글로 누구도 바꾸지 못하지만, 제 글은 누군가를 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사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대개 우리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들이죠. 우리가 '행하는' 일은 극히 드물어요.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나는 꽃이었다는 사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사실들이 갑자기 의미심장해지는 순간이 찾아오죠. 낙화시절이라는 말이 시어가 되는 이유를 그제야 깨닫게 되고요. 하지만 그것 역시 순간의 깨달음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아요. 이 봄에 제가 진짜 배우는 건 바로 그것입니다. 일순간 깨닫는다고 해서 그게 바로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뭘 아는 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잊어버린다는 것, 언제라도 잊지 않는 것들만이 내가 아는 것이 된다는 것, 그런 것들을 배우려고 애쓰는 봄이랄까요. 언제 어떤 순간에도 기억하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진실을 잘 몰라요. 실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매 순간 까먹거든요. 대개의 경우에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요. 그러니까 타인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잊지 않기 위해서, 예컨대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나는 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글은 쓰지만, 글을 쓴다고 해서 내가 그 사실을 늘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작가의 딜레마입니다. 글 쓰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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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SE (2disc) - 할인판
마이클 커티즈 감독, 험프리 보가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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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상 가장 로맨틱한 장면 1위. 이것이 내가 카사블랑카를 보기 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TV에서 본 적이 없었다. 비비안 리 주연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주말의 명화로 여러 번 봤던 것으로 기억하고, 오드리 헵번 주연의 '로마의 휴일'도 TV에서 봤던 것 같은데 말이다.

 

우연히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을 보고 완전히 반해서 그녀의 대표작이라는 카사블랑카를 보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깜찍하고 청순한 미인이 인기가 있는지 오드리 헵번이나 올리비아 핫세보다 덜 인기가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나는 사진만 보고 바로 좋아진 고전 영화의 여배우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유일했던 것 같다. 다른 여배우들과는 다르게 특유의 지성적인 이미지와 깊은 눈매가 단 몇 장의 사진만으로도 느껴질 정도였기 때문이다. 오드리 헵번은 보면 참 기분 좋아지는 배우이고, 말년의 인생도 아름다웠다고 느껴지지만, '전쟁과 평화''사브리나''티파니에서 아침을''로마의 휴일' 등을 보면서 그녀가 연기를 엄청 잘한다고 생각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슷한 이미지가 계속 되풀이되어서 조금 식상하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후대에 영향을 줄 정도인 그녀의 패션 감각은 지금 보아도 참 대단하다고 느껴지고, 사생활도 건전하다는 점이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그러고 보면 잉그리드 버그만은 오드리 헵번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가 된다고 할까? 벨기에 출신인 오드리 헵번처럼, 잉그리드 버그만은 스웨덴 출신으로 둘 다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할리우드로 건너온 미인이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많은 부분이 다르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치과 의사와 결혼하고 딸이 있는 상태에서 유부남인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오로지 그의 영화에 반해서 편지를 띄우고 이탈리아어를 전혀 모르지만 영어를 할 줄 아는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할 경우에 자신이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것은 로맨틱하기도 하다. 이 불륜은 1남 2녀를 남기고 재정적인 파탄 속에서 끝나게 되고, 다시 할리우드로 올아온 잉그리드 버그만은 두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복귀한다. 그 후 수많은 영화에 출연 후 마지막으로 노년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는 사생활은 깨끗한데 연기나 작품으로 임팩트가 없는 배우와, 사생활에는 조금 굴곡이 있더라도 연기가 뛰어난 배우 중 한 쪽에 손을 드렁주어야 한다면 나는 후자일 것 같다. 버그만은 나중에 회고하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비록 바닥까지 추락했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걸 만한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은 자신의 직업인 영화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로셀리니에게 가기 전에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최고의 여배우였고, 할리우드 복귀작에서도 두번째로 또 수상하며 멋지게 복귀했으며, 죽기 전까지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명작을 남겼고, 노년에 세번째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과정을 보면, 정말 영화를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대신 모나코의 왕비 자리를 택한 배우도, 상대적으로 빨리 은퇴한 후 평생 봉사를 한 배우도 다 각자의 인생을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서 찬미의 대상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인생 전체를 열정적으로 살다간 잉그리드 버그만 쪽이 훨씬 더 감동적이라고 할까. 그녀의 딸은 이사벨라 로셀리니로 랑콤의 얼굴이었고, 현재까지 활동하는 배우이며, 이사벨라의 딸도 랑콤의 모델이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큰 딸은 한동안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했으나 그 이후에는 화해하여 죽을때까지 잘 지냈다고 한다. 이 디스크의 특별 영상에서 험프리보가트의 아들과 함께 각자의 부모를 소개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잉그리드 버그만은 다 가진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 대한 극찬은 수없이 많다. 또 이런 저런 뒷이야기도 많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이른바 쪽대본으로 남녀 배우들이 끝까지 결말을 몰랐으며, 실제 카사블랑카에는 안개가 끼지 않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부실한 세트를 가리기 위해 설정한 안개가 오히려 영화사에 길이 남는 명장면을 만들었다는 것 등. 그 유명한 Here's looking at you, kid라는 대사는 보가트가 당시 영어가 서툴었던 버그만에게 체스를 가르치며 자주 했던 말을 애드리브로 넣은 것이며, 너무나 유명한 OST인 AS time goes by는 영화를 다 만든 후 다시 음악을 만들어 작업을 하려고 했으나, 버그만이 다음 영화를 위하여 머리를 짧게 잘라버린 까닭에 결국 원래의 노래로 진행했다는 것 등. 수많은 우연이 이 영화를 명작으로 만들었고, 어떻게 보면 이런 저런 임기 응변이 이 영화를 인상깊게 만들었다는 점은 역으로 출연 배우들의 매력이 어마어마했다는 말도 되겠다. 이 디스크에는 이런 저런 스페셜 영상이 많았는데 한 영화 평론가의 마지막 코멘터리가 인상 깊다. 자신에게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면 시민 케인을 꼽겠지만,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카사블랑카를 꼽겠다는 말.

 

카사블랑카 근처에도 가 보지 않은 영화이며, 이런 저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다 보게 되면 가슴이 먹먹하게 된다. 험프리 보가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 1위로 선정된 적이 있다는데 이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작은 키, 잘생기지 않은 외모지만 목소리와 몸짓, 눈빛은 정말 매력적이다. 잉그리드 버그만 역시 눈물이 고인 눈, 아래로 시선 처리할 때의 모습 등은 몇 번을 보아도 설렌다. 왼쪽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게 나와서 일부러 그 구도로 많이 찍었다는데, 그래서 험프리 보가트와 투샷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거의가 오른쪽에 위치하며 왼쪽 옆얼굴을 보여준다. 그때 두 배우의 케미스트리가 또 장난 아니다.

 

여태껏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특별 영상이 많았던 것 같다. 코멘터리도 두 편, 아이들과 배우자 인터뷰 영상, 다큐멘터리와 애니매이션까지. 웬만하면 부가 영상은 스킵해버리는 나인데 80% 정도는 다 본 것 같다. 누군가 나에게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아마 당분간은 이 영화를 꼽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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