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세트 (무선) - 전10권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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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성만 보면 다른 작품에 밀릴지는 모르나 대중성만 보면 이 소설만한 작품은 없을 것입니다. 고교 시절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전부 다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련하고 아름답던 순간이었죠. 다 읽고 나면 작가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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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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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의 특징을 택함으로써 끝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고, 사회상을 정확히 반영하였으며,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연민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등 소설의 최고의 매력을 모두 가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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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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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이 소설을 접한 경로는 영화 <어톤먼트>였다.

 

2007년에 개봉했던 이 영화는 영국 로맨스 영화의 명가인 워킹타이틀이 제작했고, 주연 배우인 제임스 맥어보이와 키이라 나이틀리는 둘 다 당시 20대였고, 역시 둘 다 영국 출신으로 상당히 '핫'한 배우들이었다. 감독인 조 라이트는 이 영화 이전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연출했으며,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키이라 나이틀리였다. 제인 오스틴의 삶 자체를 영화화한 <비커밍 제인>에서 세계적인 작가의 평생의 사랑이었던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게 제임스 맥어보이였는데, 이런 식의 중첩, 이라고 할까? 영화 포스터와 영화 소개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영화 내용을 알기도 전에 이런 생각들이 한순간에 머릿속으로 스쳐갔다.

 

내가 왜 이 영화를 보지 않았나, 생각해 보면 좀 의아하기도 하다. 모든 개봉 영화를 다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시공간을 다루고 있으며, 주연 배우들도 모두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배우들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뒤집어보면 더 신기한 것은,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와 그 반전까지 알고 있으니까.

 

사실 내가 그 반전을 일부러 찾아본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주워듣게 되었고, 그래서 아마도 그 영화 개봉 당시에 굳이 영화관에서 볼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나서 서점에서 이 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책의 띠지에는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이라는 설명과 함께 영화의 스틸컷도 함께 인쇄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 책이 다시 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은 최근 듣고 있는 한 팟캐스트 때문. 역대 최고의 반응을 이끌어낸 책이며 두 진행자들이 극찬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니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반전을 몰랐다면 훨씬 충격이 커졌겠지만, 이미 그 엄청난 반전을 알고 난 후에 책을 보다 보니 마치 나의 독서는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독자들이 끝까지 책을 다 읽고 난 후, 전율을 느끼며 다시 앞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하는 것에 오히려 가까웠다. 그 반전이 워낙 엄청나기에, 읽는 내내 소설의 기본 줄거리에 딱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내용이 전개되면서 반전에 대한 생각이 떨어져 나가야 되는데 소설의 끝까지 떨쳐내지 못했다. 결국 내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진행된 것이다. 이 소설의 바로 그 결말, 그리고 읽으면서 점차 가속도가 붙게 되는 소설 속 이야기. 큰 덩어리가 있고, 소설이 점점 진행되면서 그 덩어리에 다닥다닥 덩어리들이 붙어나가는 느낌이었는데 그 큰 덩어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너, 고상한 척 하지마. 그따위 끄적대는 글로 속죄 따위 바라지도 마. 나도 너를 용서못해.'

 

나의 이런 생각은 분명히 작가의 생각을 오독한 것이며, 소설과 인생에 대한 단편적인, 그야말로 응용력도 상상력도 없는 단순하기 그지 없는 수준일 수 있지만, 그래도 뒤집을 수가 없었다. 아니 뒤집기가 싫었다. 그러면서도 우스운 것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끝까지 그 생각이 뒤집히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얌전하게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는 점이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켰고, 그러면서도 책장에서는 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고, 배가 고팠지만 무언가를 먹기 위해 잠시라도 눈을 떼는 시간조차 아쉬웠다. 오랜만에 몰입이었다. 500쪽이 넘어가는 책에 이렇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다 읽고 나서 멍해졌던 느낌. 평소에 나는 빨리 책을 읽은 느낌을 정리하지 않으면 그 생각이 날아가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덮자마자 급하게 감상을 썼던 적이 많았는데 왠지 이번만큼은 감정이 벅차올라서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책을 읽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기는 싫었다. 이 책과는 상관없는 다른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기가 싫었다. 결국 이 소설을 다룬 팟캐스트를 다시 듣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차차 제정신으로 돌아오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이 났다.

 

단 하루에 있었던 일로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이 결정된다. 감옥에 가고 전쟁에 나가는 로비도, 가족과 의절하고 간호사가 된 세실리아도, 결국 무덤까지 지니고 갈 무서운 사실을 공유하게 된 동지이자 법적으로도 부부가 된 마셜과 롤라도, 소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여생을 보냈을 로비의 어머니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는 순간까지 그날을 잊지 못했을 브리오니도.

 

등장 인물 중 어디에 감정이입을 하느냐에 따라 소설의 감상은 계속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만약 내가 세실리아라면, 로비라면, 평생 브리오니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행동에 대한 분노를 평생 없애지 못했을 것이며, 속죄라는 명목으로 기어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행위 그 자체를 경멸했을 것이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인물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나와 그 인물과의 심리적인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결정될 터인데, 세실리아나 로비에 대한 이런 저런 묘사들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들의 입장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브리오니에 대해 화가 났는지도. 모든 소설가는 브리오니에 공감할 수 밖에 없으며, 그래서 어쩌면 이언 매큐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브리오니라는 화자를 내세웠던 게 아닐까. 그녀의 나이를 13살로 설정한 것도, 아직 판단력이 미숙하며 아무런 실질적인 힘이 없던 그녀와 비교할 때, 상황과 인물에 대한 판단력과 사건을 다시 재조명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어른들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는 것도, 누군가는 이 사건 때문에 목적을 이루었고 누군가는 위험한 고비를 넘겼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침묵한 반면 브리오니는 평생 동안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를 하며 살아왔다는 대조된 인물의 노년을 강조했다는 것도.

 

단순히 브리오니가 평생 천수를 누렸고 소원대로 성공한 소설가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소설가라면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판을 들을 때도 있으며 이언 매큐언 같은 세계적인 작가 또한 예외는 아니다. 누군가는 소설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할 것이며, 누군가는 소설에 드러난 작가의 세계관에 대해, 누군가는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 누군가는 소설 속 인물에 대해.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작가가 자신 주변의 어떤 인물에 대해 소설 속에서 묘사한 경우가. 독자들은 절대 누군지 모르지만, 작가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는, 어쩌면 소설화된 작가의 지인도 알 수 있을 정도까지만. 소설 속에서 작가가 그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버리거나, 어쩌면 반대로 현실 속에서 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미안한 마음에 자신의 소설에서 긍정적으로 그린다면, 과연 그때 소설가의 태도에 대해 나는 어떤 관점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브리오니에게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나 또한 한때는 판단력이 미숙한 어린아이였으며, 어른이 된 지금도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마도 사람이 누군가를 오해하고, 상처를 주는 행위는 그 사람의 일생에서 평생 지속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소설 속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만, 그 정도가 남들보다 어떤 의미에서 좀 더 클 수밖에 없는, 상상력이 넘쳐 흐르며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마음대로 인물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할 수 있는 그런 소설가에게는 더 클 수 있으며, 거기에 대한 소설가로서의 변명이 아주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하나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 소설. 읽을 때마다, 혹은 읽고 나서 생각할 때마다 새롭게 의미가 떠오르는 소설. 그러면서도 문장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꽉 찬 소설. 아마도 이 소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평론가의 발언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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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7 (완전판) - 서재의 시체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선영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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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 책의 서문이다.

 

특정한 종류의 소설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판에 박힌 표현들이 있다. 멜로드라마에는 '머리가 벗겨진 사악한 준남작'이 그렇고, 추리 소설에는 '서재의 시체'가 그렇다. 나는 몇 년 동안 '잘 알려진 주제에 적절한 변화'를 줄 가능성을 분명하게 적어두었다. 그리고 스스로 어떤 조건을 설정했다. 우선 문제의 그 서재는 매우 흔하고 틀에 박힌 것이어야 한다. 반면 시체는 전혀 있을 법 하지 않은 대단히 기상천외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것이 문제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나는 이것을 연습장에 몇 줄 끼적거려 놓은 채 그대로 두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 여름에 해변의 멋진 호텔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식당의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가족을 보았다. 불구의 노인 한 명이 휠체어에 타고 있엇고, 젊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가족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다음 날 호텔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 대한 어떤 종류의 지식에도 구속받지 않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책을 쓸 때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하시나요?"라고 물으면 나는 내가 알고 있거나, 얘기를 해본 적이 있거나, 심지어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글을 쓰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하면 어떤 이유에선지 완전히 죽은 인물이 나온다. 하지만 '가공의 인물'을 택해서 그 사람에게 내 마음대로 성격과 상상의 산물을 부여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해서 불구의 노인이 이야기의 중심축이 도었다. 마플 양의 오랜 친구들인 밴트리 대령과 그 부인은 얘기에 딱 어울리는 서재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요리하듯이 테니스 코치, 젊은 댄서, 영화배우, 소녀 단원, 직업 댄서 등과 같은 재료를 넣는다. 그리고 마플 양 식의 식탁을 차려내면 되는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개인적으로 작가의 말을 읽기 좋아한다. 프롤로그든, 에필로그든, 옮긴이의 말이든, 주석이든, 본문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글들에 왠지 작가의 민낯이 보이는 것 같아서이다. 어떤 사람은 작가의 말을 짧으면 짧을 수록 좋으며, 아예 없는 게 가장 좋다는 이도 있다. 자신이 쓰고자 한 글에서 이미 이야기를 다 했어야 한다는 점이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 작가의 말을 남기지는 않았다. 아마도 몇몇 편에만 따로 서문을 남겼다면 특별히 그 작품을 아끼거나, 혹은 반대로 그 작품의 어떤 면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이 서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이유는 작가가 평소에 어떻게 영감을 얻고, 어떻게 사건을 구상하며, 어떻게 인물을 창조하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잘 알려진 주제에 적절한 변화'라고 직접 작가가 언급했다는 것은, 이 소설의 특정 부분이 좋든 싫든 작가의 의식에 깊이 박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에 집중하게 된다. 특히 작가가 직접 언급한 바로 그 부분이 어떻게 등장할까 기대하면서.

 

 마플 양은 그제야 죽은 여자가 현실 속의 사람 같지 않다고 한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서재는 집주인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크고 낡고 어수선한 서재엿다. 서재에는 크고 망가진 팔걸이의자가 몇 개 있었고, 담뱃대, 책, 그리고 지역 신문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오래되고 멋진 가족 초상화 한두 점이 벽에 걸려 있었고, 형편없는 빅토리아 시대의 수채화 몇 점과 익살맞은 사냥 장면들도 있었다. 구석에는 데이지 꽃이 담긴 큰 화병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했고, 부드러우면서 격의 없는 분위기였다. 그 방은 오랫동안 편안하게 이용된 전통 있는 장소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엇다. 하지만 벽난로 앞에 놓인 오래된 곰가죽 양탄자 위에는 생소하고 어설프며 감상적인 무언가가 드러누워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을 한 소녀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머리는 세심하게 매만진 모양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은 장식이 달리고 등이 패인 하얀색 새틴 이브닝드레스에 감싸여 있었다. 짙은 화장이 눈에 띄었다. 흰 분가루는 퍼렇게 부풀어 오른 살갗에서 기괴하게 도드라져 보였고, 속눈썹에 바른 마스카라는 일그러진 볼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으며, 새빨간 입술은 마치 상처가 난 것처럼 보였다. 손톱에는 진한 핏빛 매니큐어를 칠했고, 싸구려 은색 샌들을 신은 발톱에도 같은 색깔을 바르고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천박하고 싸구려 티가 나는 그 모습은 밴트리 대령의 서재가 주는 고지식할 정도로 고풍스러운 편안함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작정하고 보여주는 듯한 꼼꼼한 묘사다. 묘사는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책 전반에 흐르는데, 당시 사회상을 잘 알 수 있어서 흥미롭다. 예를 들면, 죽은 여자의 드레스를 이야기하면서

 

"네, 싸구려 새틴 드레스였죠. 옷감도 안 좋았고요."

밴트리 부인이 말했다.

"맞아요. 모든 물건을 1기니에 파는 허름한 1기니 하우스에서 샀겠죠."

 

라는 대화를 통해 마치 요즘의 천원샵과 같은 상점이 당시 영국에도 존재했구나, 하는 사실에 신기했고, 살인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아홉 살 소년 피터 카모디의 말 중

 

"추리소설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해요. 추리소설이라면 전부 읽었고요. 도로시 세이어스, 애거서 크리스티, 딕슨 카랑 H. C. 베일리한테 사인도 받았는걸요."

 

라는 대목에서는 잠시 내가 글자를 잘못 봤나,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소설에 당당하게 집어넣는 저 자신감! 아마도 이 소설이 발표될 때쯤에 크리스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영국에서는 없었나보다. 혹시 저 크리스티의 이름을 빼면 전부 가상의 인물일까? 하는 생각에 검색해 보았더니 전부 당대의 추리작가들이라고. 하지만 불멸의 위치에 오른 것은 애거서 크리스티 뿐이다. 생전에 그녀는, 이 소설을 쓸 때의 그녀는, 이 대목을 쓰면서 자신이 역대 최고의 추리 작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이 소설에는 마플 양 시리즈에 나오는 그 인물들이 전부 등장한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밴트리 대령 부부의 서재가 바로 시체가 발견된 그 서재이며, 래드퍼드셔의 경찰서장인 멜쳇 대령, 슬랙 경감, 피살자가 근무한 호텔이 위치한 글렌셔 경찰서의 하퍼 총경에 은퇴한 런던 경시청장인 헨리 클리서링 경까지 합세한다. 헨리 경은 살해된 젊은 여자를 입양하려고 했던 거부 제퍼슨의 절친한 친구로, 둘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사건은 아마도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 나왔던 한 단편의 이야기인 것 같다.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익사>라는 사건의 이야기이다.

 

"내가 멜쳇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 마을에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어. 어느 소녀가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이었지. 경찰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제대로 의심하고 있었지. 그들은 범인이 누군지 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마플 양은 안절부절 못하고 당황해 하면서 나를 찾아왔더군. 그녀가 말하길, 경찰이 엉뚱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거야. 그녀에게는 증거가 없었지만, 그녀는 누가 그랬는지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적은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지. 놀랍게도 제퍼슨, 그녀가 옳았어!"

 

크리스티의 세계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목사관의 살인>에서 젊고 발랄했던 목사 부인이 이 책에서는 기어다니는 아들을 둔 어머니로 잠깐 등장하는데 크리스티 팬이라면 이런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것도 기쁜 일이다. 순서 상으로 이 책은 아마도 40년대 이전에 쓰여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변화하는 영국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 토지는 우리 집안에서 한 300년 정도? 네, 틀림없이 그 정도 살다가 팔아버린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일가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더 이상 쓸모없게 되었던 거죠. 형은 뉴욕으로 갔어요. 출판업을 하고 있죠.......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머지 사람드롣 여기저리고 뿔뿔이 흩어졌어요. 요즘은 사립 중학교를 나온 거 외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직장을 얻기가 힘든 것 같아요. (중략)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댄스와 테니스 밖에 없었습니다. (중략) 주로 하늘이 무너져도 테니스를 칠 수 없을 뚱뚱한 여자들에게 테니스를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파트너가 없는 부자 관객들의 따님들과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일도 하죠."

 

몰락한 가문의 청년의 신세한탄이다. 갑자기 우디 앨런 영화의 <매치포인트>가 생각이 났다. 그 영화의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도 부잣집 자제에게 테니스를 가르치다 결국 그 집의 사위까지 되지 않았나? 영국의 세태가 어떤지 전혀 모르는 나에게는 사실 가진 것이라고는 외모와 테니스 실력 밖에 없는 젊은이가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브레이크가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는 게 의아했는데, 크리스티의 소설을 보면 그런 경우가 아주 드물지는 않았나보다. 물론 그 영화 속 마이어스는 데뷔하지 못한 테니스 선수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 정도의 차이야 시대가 다르니까. 사실 더 놀라운 부분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왔다.

 

"이 집은 베이즐 블레이크 씨의 별장이죠?"

"네, 그리고 저는 다이나 리예요!"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도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중략)

"마을에서는 처녀 때 이름을 계속 쓰지 말라고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군요."

다이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마플 양은 진지하게 말했다.

"머지않아 아가씨는 동정과 호의가 무척이나 많이 필요한 처지가 될지도 몰라요. 남편 분도 이웃에게 좋게 보이는 것이 중요할 거예요. 보수적인 시골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답니다. 두 분 모두 부부가 아닌 동거 관계인 척하면서 재미있어 했을 것 같네요. 그러면 아가씨가 '구닥다리 할망구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지레 접근하지 않을 테니 방해받는 일도 없었겠죠. 하지만 구닥다리 할망구들도 다 필요한 때가 있답니다."

다이나가 물었다.

"우리가 결혼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마플 양은 얕보는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허, 이것 참."

 

분명히 크리스티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보수적이었는데, 논란이 있든 없든 당대에 부부가 아닌 동거 관계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 당시 영국이 급변하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호기심이 붙었다. 이 시대가 언제일까, 궁금했는데 본문 중에 답이 나왔다. 영화에 관심이 많던 소녀를 꾀어내기 위해 악당들이 했던 말, 비비안 리가 어떻게 순식간에 런던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며, 일약 유명 여배우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줬다고. 영국 국적의 비비안 리가 오디션을 통해 따낸 할리우드 데뷔작은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 영화는 1939년작이고 이 책은 1942년에 발표되었다. 당시의 비비안 리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소녀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영화에 매혹되었을 것이고. 영국 사회의 변화의 속도가 가장 빠를 때가 아니었을까.

 

소설 속 살인 사건에만 집중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좀 헐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약간 싱겁게 끝나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당대의 사회상을 느낄 수 있는 여러 단어와 문장, 단락을 보다 보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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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6 (완전판) - 침니스의 비밀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소연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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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터니는 이제 자기 일에 제법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가 맡은 일에는 여행 일정을 책임지는 일 말고도, 체면이 구겨진 노신사들의 언짢은 기분을 달래주고 나이 지긋한 부인들에게 그림엽서 살 시간을 넉넉히 주는 일도 포함되었다. 물론 40대 부인들의 넉넉함에 기대어 온갖 말장난을 섞어가며 시시덕거리는 일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앤커니는 그중에서 마지막 일이 가장 쉬웠다. 별 생각 없이 한 마디 던지면 수많은 여자들이 혹시 그 안에 무슨 은밀한 의도라도 숨어 있지 않나 하고 귀를 쫑긋거리기 때문이었다.

 

발칸제국의 위대한 노 영웅.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 교수형을 모면한 거물급 악당. 그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는 오로지 어떤 신문을 구독하느냐에 달려 있지. 하지만 제임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스틸프티치 백작이란 사람은 너나 내가 먼지와 재로 변한 뒤에도 오래 오래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을 인물이라는 점이야.

 

런던 경시청의 배틀 총경이 등장한다. <0시를 향하여>의 바로 그 사람. 소설 속에서 마플 양이 등장한다는 뜻은 한적한 시골 마을인 세인트 메리 미드의 주민들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복수, 유산 상속 등의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할리 퀸이 등장한다면 남녀상열지사가 어떻게든 끼어 있을 확률이 높다. 파커 파인이 등장한다면 살인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건일 가능성이 높고, 푸아로의 경우에는 영국의 촌구석으로부터 전세계에 이르기까지 무대는 자유자재이지만, 확률적으로 엮여 있는 사람들이 부자일 가능성이 높다. 세계적인 푸아로에게 사건을 의뢰하려면 상당한 보수가 필요할 테니까. 배틀 총경이 등장한다는 것은 푸아로와 같은 사립 탐정이 종종 맡곤 하는 은밀한 영역의 사건이 절대 아니라는 것. 대대적인 탐문, 공개적인 수사 과정이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슬랙 경감이나 멜쳇 경찰 서장보다 더 높은 지위에서 더 강력한 공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가 사건을 지휘한다는 것은 국가적인 기밀, 외교 극비 사항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만약, 그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면, 아마도 친분 관계에서 부탁을 받았거나 우연한 기회로 사건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0시를 향하여>는 후자에 속할 것이고 <침니스의 비밀>은 명백히 전자다.

 

이야기가 다소 튄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사건이 진행될 수록 그런 느낌이 강했다. 결말이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지나치게 꼬여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앤터니의 다소 의문스런 초반의 행동들이 후반에 가서 확실하게 해결은 되었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작품의 구성 자체가 좀 아쉽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름 때문에 반전을 눈치 채기가 좀 쉬웠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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