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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처음으로 이 소설을 접한 경로는 영화 <어톤먼트>였다.
2007년에 개봉했던 이 영화는 영국 로맨스 영화의 명가인 워킹타이틀이 제작했고, 주연 배우인 제임스 맥어보이와 키이라 나이틀리는 둘 다 당시 20대였고, 역시 둘 다 영국 출신으로 상당히 '핫'한 배우들이었다. 감독인 조 라이트는 이 영화 이전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연출했으며,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키이라 나이틀리였다. 제인 오스틴의 삶 자체를 영화화한 <비커밍 제인>에서 세계적인 작가의 평생의 사랑이었던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게 제임스 맥어보이였는데, 이런 식의 중첩, 이라고 할까? 영화 포스터와 영화 소개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영화 내용을 알기도 전에 이런 생각들이 한순간에 머릿속으로 스쳐갔다.
내가 왜 이 영화를 보지 않았나, 생각해 보면 좀 의아하기도 하다. 모든 개봉 영화를 다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시공간을 다루고 있으며, 주연 배우들도 모두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배우들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뒤집어보면 더 신기한 것은,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와 그 반전까지 알고 있으니까.
사실 내가 그 반전을 일부러 찾아본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주워듣게 되었고, 그래서 아마도 그 영화 개봉 당시에 굳이 영화관에서 볼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나서 서점에서 이 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책의 띠지에는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이라는 설명과 함께 영화의 스틸컷도 함께 인쇄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 책이 다시 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은 최근 듣고 있는 한 팟캐스트 때문. 역대 최고의 반응을 이끌어낸 책이며 두 진행자들이 극찬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니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반전을 몰랐다면 훨씬 충격이 커졌겠지만, 이미 그 엄청난 반전을 알고 난 후에 책을 보다 보니 마치 나의 독서는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독자들이 끝까지 책을 다 읽고 난 후, 전율을 느끼며 다시 앞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하는 것에 오히려 가까웠다. 그 반전이 워낙 엄청나기에, 읽는 내내 소설의 기본 줄거리에 딱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내용이 전개되면서 반전에 대한 생각이 떨어져 나가야 되는데 소설의 끝까지 떨쳐내지 못했다. 결국 내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진행된 것이다. 이 소설의 바로 그 결말, 그리고 읽으면서 점차 가속도가 붙게 되는 소설 속 이야기. 큰 덩어리가 있고, 소설이 점점 진행되면서 그 덩어리에 다닥다닥 덩어리들이 붙어나가는 느낌이었는데 그 큰 덩어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너, 고상한 척 하지마. 그따위 끄적대는 글로 속죄 따위 바라지도 마. 나도 너를 용서못해.'
나의 이런 생각은 분명히 작가의 생각을 오독한 것이며, 소설과 인생에 대한 단편적인, 그야말로 응용력도 상상력도 없는 단순하기 그지 없는 수준일 수 있지만, 그래도 뒤집을 수가 없었다. 아니 뒤집기가 싫었다. 그러면서도 우스운 것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끝까지 그 생각이 뒤집히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얌전하게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는 점이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켰고, 그러면서도 책장에서는 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고, 배가 고팠지만 무언가를 먹기 위해 잠시라도 눈을 떼는 시간조차 아쉬웠다. 오랜만에 몰입이었다. 500쪽이 넘어가는 책에 이렇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다 읽고 나서 멍해졌던 느낌. 평소에 나는 빨리 책을 읽은 느낌을 정리하지 않으면 그 생각이 날아가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덮자마자 급하게 감상을 썼던 적이 많았는데 왠지 이번만큼은 감정이 벅차올라서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책을 읽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기는 싫었다. 이 책과는 상관없는 다른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기가 싫었다. 결국 이 소설을 다룬 팟캐스트를 다시 듣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차차 제정신으로 돌아오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이 났다.
단 하루에 있었던 일로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이 결정된다. 감옥에 가고 전쟁에 나가는 로비도, 가족과 의절하고 간호사가 된 세실리아도, 결국 무덤까지 지니고 갈 무서운 사실을 공유하게 된 동지이자 법적으로도 부부가 된 마셜과 롤라도, 소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여생을 보냈을 로비의 어머니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는 순간까지 그날을 잊지 못했을 브리오니도.
등장 인물 중 어디에 감정이입을 하느냐에 따라 소설의 감상은 계속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만약 내가 세실리아라면, 로비라면, 평생 브리오니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행동에 대한 분노를 평생 없애지 못했을 것이며, 속죄라는 명목으로 기어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행위 그 자체를 경멸했을 것이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인물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나와 그 인물과의 심리적인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결정될 터인데, 세실리아나 로비에 대한 이런 저런 묘사들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들의 입장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브리오니에 대해 화가 났는지도. 모든 소설가는 브리오니에 공감할 수 밖에 없으며, 그래서 어쩌면 이언 매큐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브리오니라는 화자를 내세웠던 게 아닐까. 그녀의 나이를 13살로 설정한 것도, 아직 판단력이 미숙하며 아무런 실질적인 힘이 없던 그녀와 비교할 때, 상황과 인물에 대한 판단력과 사건을 다시 재조명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어른들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는 것도, 누군가는 이 사건 때문에 목적을 이루었고 누군가는 위험한 고비를 넘겼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침묵한 반면 브리오니는 평생 동안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를 하며 살아왔다는 대조된 인물의 노년을 강조했다는 것도.
단순히 브리오니가 평생 천수를 누렸고 소원대로 성공한 소설가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소설가라면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판을 들을 때도 있으며 이언 매큐언 같은 세계적인 작가 또한 예외는 아니다. 누군가는 소설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할 것이며, 누군가는 소설에 드러난 작가의 세계관에 대해, 누군가는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 누군가는 소설 속 인물에 대해.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작가가 자신 주변의 어떤 인물에 대해 소설 속에서 묘사한 경우가. 독자들은 절대 누군지 모르지만, 작가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는, 어쩌면 소설화된 작가의 지인도 알 수 있을 정도까지만. 소설 속에서 작가가 그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버리거나, 어쩌면 반대로 현실 속에서 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미안한 마음에 자신의 소설에서 긍정적으로 그린다면, 과연 그때 소설가의 태도에 대해 나는 어떤 관점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브리오니에게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나 또한 한때는 판단력이 미숙한 어린아이였으며, 어른이 된 지금도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마도 사람이 누군가를 오해하고, 상처를 주는 행위는 그 사람의 일생에서 평생 지속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소설 속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만, 그 정도가 남들보다 어떤 의미에서 좀 더 클 수밖에 없는, 상상력이 넘쳐 흐르며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마음대로 인물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할 수 있는 그런 소설가에게는 더 클 수 있으며, 거기에 대한 소설가로서의 변명이 아주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하나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 소설. 읽을 때마다, 혹은 읽고 나서 생각할 때마다 새롭게 의미가 떠오르는 소설. 그러면서도 문장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꽉 찬 소설. 아마도 이 소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평론가의 발언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