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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빌 브라이슨 지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09년 7월
평점 :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한 품목으로 어두운 색깔의 타원형 초상화 한 점이 있었다. 높이가 55센티미터, 폭이 45센티미터인 이 초상화는 355기니에 엘스미어 백작이 구입했고, 그 후 챈도스의 초상화로 알려져왔다. 이 그림은 이미 많이 가필되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검게 변해서 그림의 세세한 부부은 상당히 유실되었다.(현재도 그런 상태로 있다.) 초상화는 깔끔하게 턱수염을 기른, 머리가 벗겨졌지만 그리 못생기지 않은 40대의 남자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왼쪽 귀에 금귀고리를 달고 있다. 그의 표정은 자신감이 넘치고 매우 호쾌하다. 이 남자는 당신의 아내나 다 자란 딸을 가볍게 맡길 만한 남자는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빌 브라이슨이 책의 맨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 남자는 셰익스피어다. 아마도 책 표지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는 바로 이 초상화를 모방하여 삽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실제 얼굴은 전혀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셰익스피어의 얼굴을 다 알고 있다. 바로 이 설명대로 생긴, 딱 그 얼굴. 정확히 셰익스피어인지 아닌지도 후대의 우리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머리에 떠올리는 바로 그 모습이다.
우리가 인간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적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작품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희극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천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단시들만이 전해진다면, 그를 아주 검은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을 보고 우리는 그를 우아한 사람, 지적인 사람, 철학적인 사람, 우울한 사람, 책략에 능한 사람, 신경질적인 사람, 쾌활한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 등으로도 생각할 수 있엇을 것이다. 물론 작가로서 셰익스피어는 이 모두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셰익스피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거의 알지 못한다.
셰익스피어가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지는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살아 있을 당시 그 시대에 인기있는 작가는 많았다. 그러나 400여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작품이 읽히고, 무대에 올라가며, 셰익스피어는 생전에 상상도 하지 못했을 기계인 카메라에 의해 영상화되고 있는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말고는 또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 개인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이 거의 없다.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라고 알려진 그 그림도, 실제 셰익스피어인지 아닌지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에식스 백작, 옥스포드 백작 등 다른 인물이 셰익스피어 작품의 실제 저자라는 주장도 있다. 셰익스피어와 한참 동떨어져 있는 나같은 독자도 궁금한 게 많은데, 하물며 현 시대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작가 중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빌 브라이슨이 여기에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단순하다. 우리가 기록에 근거해서 셰익스피어에 관해서 얼마나 많이 알 수 있는지, 실제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이 아주 얇은 한 가지 이유라고 할 것이다.
총 224쪽, 본문은 215쪽인 이 책의 제 1장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찾아서>의 마지막 구절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에 영국 스트랫퍼드에서 출생했다. 당시 영국 인구는 300만명에서 500만명 사이로, 300년 전 페스트가 휩쓸었던 시기보다 더 적은 인구였다고 한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바로 그 해에는 신생아의 3분의 2 가량이 죽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기록이 처음으로 제대로 보존되기 시작한 때로, 스트랫퍼드에서는 1558년이 지나서야 기록을 보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가 런던에서 극작가로 성공하기 전의 기록이 단 네 건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도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아버지 존은 가죽을 다루는 장인이었고, 오늘날의 시장에 해당하는 수석 행정관까지 지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름 있는 가문의 작은 지파 출신으로, 그녀는 4남 4녀를 낳았으나 딸은 하나만 살아남았고, 아들 중 결혼한 사람은 윌리엄이 유일했다. 윌리엄은 그 지역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열여덟에 여덟살 연상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셰익스피어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낳았지만 그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부부사이는 좋았는지, 그녀가 셰익스피어를 따라 런던에 간 적이 있는지 등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셰익스피어의 일생에 관련된 몇 안 되는 확실한 사실들 가운데 두 가지가 그의 결혼이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그가 자신이 번 돈을 가능한 한 속히 스트랫퍼드로 보냈다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기록은 몇 가지에 그칠 뿐이다. 셰익스피어가 런던에 정착해서 극작가로 유명해지기 전의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기록이 단 4건-침례 기록, 결혼 기록, 두 차례에 걸친 자녀 출산 기록-에 불과하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의 아버지가 재산 분쟁으로 제가한 소송에 언뜻 그에 관한 언급이 나오지만, 그 기록은 그가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초년 생활은 가끔 그 편린을 볼 수 있을 뿐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제 우리는 흔히 그의 잃어버린 시절이라고 알려진 시기로 접어들려고 한다. 그 시기의 그의 행적은 정말로 완전히 유실되었다.
제 2장 <초년, 1564-1585>의 마지막 부분이다. 기네스 펠트로와 조셉 파인즈가 주연했던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생각났다. 사실상 텅 비어 있는 셰익스피어의 한 때를 상상력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재치있고 우아한 영화였다. 이 책의 제 3장 <잃어버린 시절, 1585-1592>에서는, 이 당시 셰익스피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수도 있고, 플랑드르에서 군인으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바다를 항해했다는 추측도 있다. 1564년 출생하여 세례를 받은 기록 후에 1582년 결혼 허가를 신청했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이어 1583년 윌리엄의 장녀 수잔나가 태어났으며 쌍둥이인 주디스와 햄닛은 1585년에 태어났다. 이후 1592년까지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1592년, 1598년, 1603년, 1608년의 서류에 셰익스피어는 배우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희곡은 작가가 아니라 극단의 소유물이었으며, 공식적인 연출자가 없었기에 작가는 연출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배우의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죽으면서 남긴 유품에 희곡 원고나 프롬프터용 대본이 없는 사실을 설명하는 이유가 된다. 완성된 희곡은 극단이 가지고 있어야 했으며, 작가에 배우, 연출자까지 겸했던 셰익스피어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바빴을 것이다. 이 시대는 연극의 황금시대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 쏟아져나왔지만, 희곡을 써서 생계를 넉넉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작가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가 런던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도시 외곽에 여러 개의 극장이 있었고, 계속 극장은 세워졌다. 무엇보다 엘리자베스 여왕 자신이 연극과 같은 오락을 좋아했고, 여왕의 정부가 볼링장, 극단, 오락장 등의 허가를 내줌으로써, 또 그런 장소들에 필요한 물건들의 제조와 판매로 수입을 거두고 있었다는 점은 셰익스피어에게 이로운 일이었다.
당시는 연극의 테크닉이 급격하게 진화하던 시기였다. 스탠리 웰스가 지적한 것처럼 "연극이 더 길어지고, 규모가 커지고, 구성이 복잡해지고, 감정의 범위가 넓어지고 연기자들의 재능이 더 잘 발휘되도록 기획되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이 줄어들었다. 셰익스피어 생전에 자연주의 경향이 더욱 발전했는데 이런 경향을 일으키는 데에 그도 일조했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동시대 작가들은 주제와 배경에 관한 한 아주 폭넓은 자유를 누렸다. 고대 로마의 전통을 따르던 이탈리아의 극작가들은 그들의 희곡 배경을 마을 광장으로 설정해야 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자기 작품의 장소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산허리도 좋고, 요새, 성, 전쟁터, 외딴 섬, 매혹적인 골짜기 등 상상력이 풍부한 관객을 이끌고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았다.
제 4장 <런던에서>의 한 부분이다. 이 장에 나와 있는 많은 부분들, 예를 들면 여성 역할을 남성 연기자가 맡도록 하는 관행이라든지 셰익스피어가 연출가이자 배우로 활동했다는 이야기라든지 엘리자베스 여왕이 연극과 같은 오락을 좋아했다든지 하는 부분들은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부분이었다. 그 영화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기록을 존중했으며, 고증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미있는 것은 동일한 시대에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여성 역할을 여자 배우들이 연기했으며, 유럽을 여행하던 영국인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곤 했다는 것이다. 또 런던의 극장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려면, 하루에 2000명의 관객을 끌어들여야 했는데 이는 당시 런던 인구의 약 1퍼센트였다고 한다. 서울을 기준으로 한다면, 하루에 10만명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소리이니 당시 연극에 종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할수록 아득해진다. 영화계에서 초대박을 의미하는 천만 관객 이상의 극장 표를 팔아야 한 극장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손님들을 다시 극장에 되될아오게 하려면 공연되는 연극을 계속 바꾸어야 했고, 1주일에 최소한 5편의 서로 다른 희곡이 공연 되었으며, 한 희곡이 1년에 10차례 이상 공연되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당시 희곡들은 줄거리와 등장인물이 서로 비슷한 경우가 많았으며 셰익스피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즉, 먼저 발표된 희곡의 대사나 이름, 제목등을 차용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다만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참고한 수많은 평범한 작품들을 그만의 위대한 작품으로 바꾸어놓았고, 당대 연극의 관행을 깨트리는 파격으로 걸작을 탄생시켰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지식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지리나 역사를 희곡에 언급할 때 사실과 다른 실수를 종종 저질렀다. 그러나 그는 2035개의 단어를 만들어냈고, 지방 사투리를 즐겨 사용하기도 했으며, 떄로 아주 현대적인 언어를 고집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처음 발견되는 단어들의 예는 abstemious, antipathy, critical, frugal, dwindle, extract, horrid, vast, hereditary, excellent, eventful, barefaced, assassination, lonely, leapfrrog, indistinguishable, well-read, zany 등 수없이 많다.('수없이 많다'는 뜻의 countless라는 단어도 셰익스피어가 만들었다.) 이런 단어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이 어떠했겠는가?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지적처럼 셰익스피어는 특히 기존의 단어에 un-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신조어를 만드는데에 능숙했다. unmask, unhand, unlock, untie, unevil 등 이렇게 해서 만든 단어가 314개나 된다.
제 5장 <희곡>의 한 부분이다. 지금도 쓰이는 저 말들을 셰익스피어가 처음 만들어냈다니 참 놀랍다. 단어 뿐 아니라 어구를 만드는데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옥스퍼드 인용사전(Oxford Dictionary of Quotations)」에 따르면, 영어가 생긴 이후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절의 10분의 1이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당시 영어는 존경받는 언어가 아니었고, 공식적인 문서와 학술 서적, 진지한 문학은 전부 라틴어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런 환경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영어에 적지 않게 기여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며, 수많은 단어와 어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빌 브라이슨은 제 5장을 다음의 문단으로 마무리한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동료들의 적지 않은 기여 덕분에, 영어가 그것을 만들어낸 나라에서 마침내 주도적인 자리에 오르기 시작햇다. 스탠리 웰스는 이렇게 말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출생기록은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그의 사망기록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신사'라고 영어로 되어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엘리자베스의 통치기간은 대부분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일생과 겹친다. 셰익스피어 개인에게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왕의 시대가 모든 면에서 황금시대였던 것은 아니며, 특히 엘리바베스 여왕 치세의 말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 실업, 상업적 불황, 전쟁, 흉작으로 고통받는 시기였다. 이 불황기 동안에도 극장이 노동계급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는 분명한 사실은 작가도 미스터리라고 지적한다. 이 시기에 셰익스피어의 명성은 높아지고 직업적으로도 행운이 잇따랐으며 30대 초반에 이미 명예와 부를 다 누리고 있었다. 반면에 개인적으로는 열한 살인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는다. 호사다마일까, 셰익스피어와 그의 동료들은 여왕을 전복시키려는 기도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에식스 백작의 추종자들 중 하나가 셰익스피어가 몸 담고 있던 극단 '체임벌린 경의 사람들'에게 「리처드 2세」의 공연을 해달라고 요구했으며, 왕이 퇴위되어 살해되는 장면을 연극에 삽입하도록 지시한다. 이후 에식스 백작은 여왕을 퇴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하였고 사형당했으며, 극단 또한 조사를 받게 되나 무혐의로 처리된다. 이상이 제 6장 <명성의 시대, 1596-1603>의 내용이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는 셰익스피어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극단 단원들은 궁정 궁내관이 되었고 후한 보상을 받았으며, 셰익스피어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중 대다수가 이 시기에 나왔다.
1609년 5월 20일, 토머스 소프라는 출판업자가 셰익스피어의 단시들을 모은 책을 펴내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총 154편의 단시들 중 126번까지는 1부로, 시인은 아름다운 청년을 찬미하며, 127번부터 154번까지의 2부는 "검은 귀부인"에게 말하는 형식이다. 많은 시들이 눈에 띄게 동성애적이며 당시 동성애는 법률적으로 사형까지 처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다. 단시를 비롯해서, 이 당시 셰익스피어는 다른 작가들과 협력해서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집필 속도도 조금씩 느려지는 등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도 나이가 든 것일까. 제 7장 <제임스 왕의 치세, 1603-1616>의 한 부분이다.
"셰익스피어는 나이가 들면서 전혀 다른 작가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재기가 넘쳤지만, 더욱 도전적으로 변했어요." 스탠리 웰슨은 한 인터뷰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의 언어는 더욱 농축되고 간결해졌어요. 그는 일반 관객들의 욕구와 관심에 신경을 덜 쓰게 되었습니다. 희곡들이 덜 연극적이고 더욱 내향적이 되었지요. 만년에는 그는 아마 별로 인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의 후기 희곡들-「심벨린」,「겨울 이야기」,「코리올라누스」등-은 그의 중기 희곡들보다 인기가 덜합니다."
1616년 셰익스피어가 사망한 후, '체임벌린 경의 사람들'의 원년 멤버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은 두 사람이었던 헤망과 콘델은 그의 모든 작품을 담은 퍼스트 폴리오를 출판했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나온 약 230여편의 희곡들이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그중 15퍼센트가 퍼스트 폴리오에 들어 있다. 따라서 헤밍과 콘델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절반을 구해 후대에 남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시대와 제임스 1세 시대의 희곡들의 상당 부분을 후대에 전하는 공로를 세운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 그가 언젠가는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추앙받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프랜시스 보몬트, 존 플레처, 벤 존슨이 더 인기가 있었고 더 존경을 받았다. 퍼스트 폴리오에는 찬양의 시가 단 4편 실려 있는데 이것은 아주 적은 양이다. 지금은 거의 잊혀지다시피한 윌리엄 카트라이트가 1643년에 죽었을 때, 60명의 찬미자들이 조시를 바치러 몰려들었다고 한다. "명성이란 이렇게 덧없이 변하는 것"이라고 쇼엔바움은 그의 「간결한 다큐멘터리 일생」에서 한탄한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어느 시대고 그 시대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에는 대체로 무능한 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연 몇 사람이 펄 벅, 에리크 폰토피단, 루돌프 오이켄, 셀마 라게를뢰프에게 노벨상을 주라고 투표할 것인가? 이 밖에도 자신이 살던 세기가 끝나면서 그 명성도 끝나버린 작가들은 얼마든지 더 있다.
제 8장 <죽음>의 일부이다. 그의 아들은 어릴 때 사망했고, 두 딸은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았으나, 그 자식들은 전부 소생을 남기지 못했다. 이렇게 셰익스피어의 직계는 대가 끊기게 된다. 그가 사망하고 지금까지, 그는 영국이 낳은 최고의 작가이자 세계적인 문호의 자리에 올랐고, 수많은 연구가 뒤따랐다. 그로 인해 다소 이색적인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다른 누군가가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온 책만 5000종 이상이며, 그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학 교수와 작가들도 많다. 그러나 제 9장 <이색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서 저자 빌 브라이슨은 말한다. 여러 셰익스피어 후보자들에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쓰는 데 필요한 시간과 재능, 동기를 무리하게 부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했음을 암시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9장의 마지막 부분이면서 동시에 이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평가해볼 때, 우리는 물론 한 사람이 그렇게 많고 현명하고 다양하고 재미있고 또 언제나 기쁨을 주는 작품들을 생산해냈다는 데 대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 자체가 천재성의 증거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오직 한 사람만이 우리에게 그런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는 환경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스트랫퍼드 출신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였다.